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92화 (92/126)

입덕부정기(2)

*

짐작하건대 <토끼 남작> 사인회에 성인 독자들이 생각보다 꽤 많이 온 것은-

“비숍 작가님··· 덕분이겠지.”

블로그 ‘어느 노인의 낙서장’에 올라온 <토끼 남작>의 리뷰로 유입된 독자 같았다.

그리고 인형탈과 인형옷을 입은 채 몇 시간 동안 사인해준 나와 네드, 케이트는 말 그대로-

“진짜 죽는 줄 알았지.”

그것은 정말 순도 100퍼센트의 진심이었다.

더군다나 이 셋 중 내가 담당한 토끼 남작 베니 캐릭터가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했던 만큼···.

“그때를 떠올리면 왠지 산소가 부족한 기분이야.”

“그거 뭐라더라, 공황장애? 뭐 그런 거 아닌가?”

내 말에 맞장구치는 네드.

그날 우리가 입은 인형탈과 인형옷이 나름 가볍고 편하게 만든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입고 몇 시간 내내 있는 건 진짜로 힘들었으니까.’

분명, 한 30분 정도까지는 모든 게 다 좋았다.

그게 아마 클로이와 마리사에게 사인해주고 함께 사진 찍던 즈음이었지.

현장 이벤트 자체도 재미있었고, 우리의 책을 이렇게 많은 독자들이 사랑해준다는 사실 그 자체가 참 감동적이고 감개무량했고.

참, 분명히, 좋았는데···.

‘어, 잠깐만요 담당자님. 저기, 지금 저 줄이···.’

그 넓은 서점을 꽉 채울 정도로, 끝이 보이지 않게 줄을 서 있던 아이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현기증이 나는 기분이었다.

‘너무 죄송해요 작가님, 저희도 이렇게 많은 인원이 올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해서···.’

덧붙이자면, 최근 10년간 이뤄졌던 저자 사인회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수준이라고.

“괜히 팔이 아픈 게 아니었어.”

나와 마찬가지로 그때를 떠올리던 네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야 뭐 그림까지 그려줬으니 더했지.”

그리고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

한 번 더 해달라고 떼쓰는 아이들, 인형탈을 통째로 뽑아가려는 아이들, 눈을 찔러 보려는 아이들은 그렇다 쳐도.

책 다섯 권을 들고 와서 전부 다 사인해달라거나, 온갖 포즈로 사진을 요구하거나 하는 어른들도 제법 있었다.

중간 중간 지나친 경우는 출판사 직원들이 잘 제지해주긴 했지만···.

“이런 게 바로 대면서비스의 고충이구나를 깨달았음.”

나중엔 당근검까지 뺏어가려고 했다, 하니 고개를 저으며 대꾸하는 네드.

“야, 넌 그래도 꼬리의 공은 뜯기지 않았잖냐.”

“공이 아니라 꼬리 곤봉이겠지.”

“그거나 저거나. 암튼, 내 쪽에 온 애들은 곤봉이 신기하다고 신나게 잡아당기는데···.”

당혹스러운 것도 그렇지만, 인형옷이 망가지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다고.

“···그래도 애들이 좋아하니까 좋긴 하더라.”

“그건 그렇지.”

인생 최고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베니를 보고서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아이들.

‘그런 모습은 참 사랑스러웠으니까.’

나와 네드는 지금 내 방에 모여 그때의 일을 회상하는 중이었다.

···<토끼 남작의 모험> 2권을 기념하는 사인회가 엄청난 성황리에 마무리된 지 정확히 1주가 지난 시점.

“아 근데 이거 맛있다. 이거 뭘로 만든 거야?”

침대에 반쯤 드러누운 채, 책상 위 접시에 놓인 간식을 무의식적으로 입에 넣는 네드.

“고구마 {말랭이}.”

“음? {말···뤵···이}가 뭔데.”

음, 영어로는··· 뭐라고 하지.

“Jerky인가?”

“오, 어떻게 만든 거?”

최근, 아버지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걱정하던 새어머니에게 내가 알려드린 것으로.

입이 심심해 과자나 단것을 자꾸 먹는 아버지의 간식을 이 고구마 말랭이로 대체하기로 했단다.

“전자렌지나 오븐으로 만들 수 있어, 쉬움.”

“오, 우리도 이거 해 먹어봐야겠다. 은근 입에 자꾸 들어가네···.”

나 또한 말랭이 하나를 집어 우물거리는데.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뒤적거리던 네드가 오, 하고 외쳤다.

“왜.”

“야 이거, 이거 봐봐.”

네드가 보여준 것은 SF 서브레딧 게시판.

아예 즐겨찾기까지 해논 걸 보니 자주 들어가는 모양인데-

“···.”

어느 게시물의 내용을 본 나는 순간 입을 다물고 말았다.

[1.1k 토끼 남작은 대체 누가 쓴 거냐]

[책에는 베니 르 레푸스라고 써 있던데 이거 주인공 캐릭터 이름 아님?]

└ㅋㅋㅋㅋ베니가 쓴 거 맞음

└베니 미국으로 귀화한 거 몰랐냐

└아 그거 공동저자라고 들었음 검색해보면 나오던데

└여기 나오네 www.writershome.com/our-authors/

└유진 권, 네드 밀러, 케이트 권 이 세 명이라고

└아 ㅋㅋㅋ 그럼 그때 그 인형탈 썼던 게 이 세 명이구나

└어? 유진 권? 뭔가 익숙한 느낌인데

···

제법 많은 댓글이 이어지는 가운데, 유진이라는 이름에 누군가가 주목하기 시작했고.

이내 그들은 ‘유진 권’이라는 이름을 어디서 봤는지를 기억해냈다.

└이거 그거네! 비숍 팬보이 https://www.reddit.com/r/scifi/11e2d5/who_is_bishop_fanboy_...

└아 맞다 ㅋㅋㅋㅋㅋ

└우리 팬보이 뭐 하고 지내나 몰라

└팬보이는 서브레딧 안 하려나

└인싸들은 이런 데 안 오지

└근데 잠깐만, 비숍 팬보이가 토끼 남작 작가라고?

└말이 되는 소릴 해라 ㅋㅋㅋㅋ

└유진은 한국에서 생각보다 흔한 이름임

└ㅇㅇ 동명이인이겠지

···

북콘에서 SF 거장 랜든 비숍과 함께 낭독회를 했던 성덕이자 팬보이인 ‘유진 권’과.

<토끼 남작의 모험>의 공동저자 중 한 명인 ‘유진 권’이 동일인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제기되려다가-

“흐지부지··· 돼버렸네?”

네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음. 어떤 의미론 다행인걸.”

···어째선지 조금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

한편 댄 토레스의 리뷰가 <인디북리뷰>가 실린 것은 바로 다음 주, 그러니까 10월 마지막 주의 일이었다.

“이야, 이거 보셨어요 팀장님?”

“와, <인디북리뷰>가 완전히 태세 전환을 했는데요.”

“내 이럴 줄 알았지!”

원더테일의 편집부 직원들 모두가 그 기사를 돌려보며 신나하는 가운데.

‘···이야, 이 밥맛 없는 인간이 웬일로 이런 글을 다 써줬네.’

<토끼 남작>의 담당인 수석 편집자 대니얼 앤더슨 또한 기사를 읽으며 신기해하는 참이었다.

댄 토레스.

안 그래도 원더테일과는 그닥 사이가 좋지 않은 <인디북리뷰>에서 제일 비판적, 아니 재수 없는 기사를 쓰기로 유명한 기자인데 말이다.

그리고 이처럼 태도를 바꾼 것은 <인디북리뷰>뿐이 아니었다.

이곳과 함께 <토끼 남작> 1권이 거품이라며 신나게 비판하던 곳들 모두가-

[토끼 남작의 모험 2권, 예정된 성공 행보··· 비결은 무엇?]

[토끼 남작의 모험 시리즈 신간, 공룡 왕국으로 : 연일 기록 경신 중]

[토끼 남작의 모험, 공룡은 역시 흥행보증수표? 1권의 기록을 뛰어넘다]

···

언제 그랬냐는 듯.

<토끼 남작> 2권의 성공을 전부터 예견했다는 식의 기사를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중에서도 제일 정성스럽게 써낸 곳이 바로 이 <인디북리뷰>였는데.

“근데 이거, 완전 진심이 느껴지지 않아요?”

“그러게, 내가 보기엔 댄 토레스 이 인간도 이미 입덕했어.”

“으흐흐, 아기 티라노의 귀여움엔 누구도 당해낼 수 없지···.”

아동서 출판사 특성상.

귀여운 것을 몹시 좋아하는 직원들 대부분이 가방에 베니 인형 하나씩을 매달고 다니는 가운데.

“아 맞다, 이거 보셨어요?”

직원 중 한 명이 요즘 텀블러, 그러니까 10대와 20대가 애용하는 이미지 위주의 SNS에서 무언가를 검색해 보여줬다.

“오, 잠깐만. 지금 이 해시태그···.”

“흐흐, 맞아요. 베니 짤.”

“와 이거 엄청난걸?”

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부 굿즈 마니아들이 이 베니 인형에 눈독을 들였고, 그리하여 베니의 초판 한정 굿즈가 중고시장에서 제법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기 시작했으며-

“#Bennytherabbit? 이거 맞아?”

“네네, 그거 그거.”

“이야, 검색 결과가 꽤 나오네.”

#Bennytherabbit이라는 해시태그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는 것.

베니 인형을 가방에 달고 다니는 사진은 물론.

“와, 팬아트도 있는데요?”

“오 그러게!”

베니를 비롯해 여러 캐릭터들을 등장시킨, 팬들의 2차 창작 이미지까지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바로 잘 만든 컨텐츠의 힘일까.’

보면 볼수록 대니얼이 뿌듯한 기분을 어쩔 수가 없던 그때.

지잉, 핸드폰이 진동하며 단체 채팅방에 새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이 떴다.

‘초등학교 동창들이 있는 채팅방이잖아?’

꽤 오랫동안 아무도 대화를 하지 않아 죽은 거나 다름없던 채팅방에 올라온 메시지는 다름 아닌-

[-이거, 대니얼네 회사에서 만든 책 맞지?

-그래 그래, 요즘 우리 애도 이 책에 엄청 빠졌더라고 ㅋㅋ

-와 엄청나네

-대니얼 이번에 완전 대박났구나!

···]

<토끼 남작의 모험>에 관한 대화였다.

[-ㅋㅋㅋ 2권에선 공룡이 나오던데?

-그거 보니까 어릴 때 공룡놀이 하던 거 생각나더라

-맞다 키튼 저 자식이 공룡박사로 유명하지 않았나···]

공룡 이야기로 자신의 동창들까지 대동단결한 것을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토끼 남작, 성인독자마저 사로잡다!> 같은 기사도 곧 뜨겠는걸.’

대니얼 앤더슨은 밀려드는 기분 좋은 예감에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리고 이 시기,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곳은 <토끼 남작>의 출판사뿐이 아니었다.

[에곤 K 원작 소설 영화화,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흥행 돌풍 시작되나]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선댄스 영화제 공식 초청!]

[에곤 K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긍정적 예감···]

···

선댄스영화제에 공식 초청된 이후,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상영관이 잡혀 제작사 썬웨이필름스는 그야말로 연일 환호성을 지르는 중이었고.

그것은 영화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의 스탭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선댄스 영화제 효과겠죠?”

“그것도 그렇고, 일단 관객 시사회 반응이 엄청 좋았잖아?”

“그렇지. 사실 선댄스에 초청될 만한 성질의 영화는 관객 시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가 쉽지 않은데···.”

양쪽 모두의 반응이 좋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청신호라는 것.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개봉관이 확 늘어났고, 덕분에 흥행 가능성 또한 높아지게 된 것.

“그나저나, 우리 감독님은 잘하고 계실런가 모르겠네.”

어느 스탭의 말에, 막성스 라미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편집감독이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 안 해도 될걸? 우리 감독님이 말 하나는 청산유수잖아.”

“하긴.”

“얼굴 까고 하는 방송에서도 긴장 하나 안 하는데 라디오 토크쇼 정도야···.”

그들의 말대로, 영화 <호수괴물>의 감독 막성스 라미는-

“<시네마틱 에어>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우리 애청자분들이 많이 기대하신 게스트분들이 오셨는데요···.”

각각 소년 버전과 성인 버전의 일라이저 루스를 연기한 두 명의 주연배우와 함께.

영화 전문 라디오 토크쇼에 출연한 참이었다.

“···와, 에곤 K 작가님과의 인연이 그렇게 시작됐군요?”

“네, 뭐라고 해야 하나. 보통 첫눈에 반했다고 하잖아요? 같은 필름아카데미의 동기가 추천해준 책이었는데.”

감독 막성스 라미는 영화 자체의 홍보에 열을 올리기보다는, 원작 소설을 향한 애정을 내보이기 바빴다.

물론 여기에는 -토크쇼 며칠 전, 따로 감독을 찾아와 원작 홍보 또한 잘 부탁드리겠다는 말을 잊지 않은- 에이전트 케빈 클레그의 덕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야, 이건 완전히 진심에서 우러나온 팬심인걸?’

토크쇼 진행자가 헛웃음을 지을 정도로 엄청난 열정이었는데.

오히려 그런 감독의 태도가 -전형적인 홍보 방송에 이골이 난- 토크쇼 진행자와 애청자들에게는 흥미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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