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승세(1)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는 흐뭇한 얼굴로 멘트를 이어나갔다.
“이거, 듣기만 해도 좋네요. 이렇게 상당한 인기를 자랑하는 원작을 각색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부담이 되는 일인데.”
그 부담감을 어떻게 이겨냈냐, 라는 질문에 막성스는 기다렸다는 듯 에곤 K와의 사전 미팅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 덧붙이길-
“무엇보다, 저희 두 배우분들이야말로 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정말로 큰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음, 오히려 저는 그 공을 제 능력의 150퍼센트를 이끌어내주신 감독님께 돌리고 싶은데요.”
감독의 칭찬을 성인 역의 배우 빈스 싱클레어가 겸허하게 받아넘긴다.
이번 촬영 현장이 본인에게는 한계를 넘어서는, 몹시 인상적인 경험이었다는 것.
“맞아요, 촬영장에 가보면 특유의 분위기라는 게 있는데···.”
예쁘장한 외모의 아역배우 노아 또한 열세 살답지 않은 표현으로 맞장구를 쳤다.
7세에 데뷔해 지금까지 수많은 현장을 경험해온 바로, 감독의 열정이나 완벽주의가 꼭 좋게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이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현장에선··· 모든 게 착착 맞물려서 완벽한 시너지로 거듭났다고 생각해요.”
“역시 6년차 배우다운 평가인걸요.”
“아하하.”
그리고 다음 질문은 -헐리우드의 라이징스타로 불리는- 아역배우 노아를 향한 것이었는데.
“노아 군은 이번 영화가 본인의 커리어에서 하나의 기점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게 어떤 의미일까요.”
그러자 기대했던 질문이라는 듯 곧바로 대답해나가는 노아.
“제가 지금까지는 주로··· 정말 어린이로서의 연기를 했잖아요?”
“그렇죠.”
“근데 이번에 처음으로 어린이가 아닌, 청소년 연기를 하게 된 셈인데.”
노아 데보로는 7세의 나이에 어느 CF에 등장해 인형처럼 귀여운 외모로 화제를 모았다.
그것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모델과 배우 일을 시작해 한동안 상당한 인기를 끌었지만-
“음, 중간에··· 조금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공백이 좀 있었잖아요? 그래서 한동안은 제대로 된 배역을 얻지 못하다가.”
지난 번에 출연한 영화에서 말 그대로 ‘미친 연기’를 선보이며 대호평을 받았고.
그 기세를 타고 이 <호수괴물>의 오디션에도 합격했던 것.
“이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가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건, 제가 지닌 여러 가지 얼굴을 보여줄 수 있었던 첫 번째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막 사춘기로 접어드는 청소년의 내면에 다양한 자아가 태어나듯 말이죠.”
몹시도 진지한 말에 라디오 진행자가 키야, 감탄성을 냈다.
“아니 잠깐만, 노아 군, 진짜 열세 살 맞아요? 어쩜 이 나이에 이런 성숙한 생각을 하죠. 난 그 나이 때 뭐했더라.”
그러자 불쑥 끼어들어 한마디씩 하는 막성스 감독과 빈스 배우.
“포켓몬을 모았죠.”
“저는··· 마인크래프트.”
“크흐흐, 이것 봐요. 그 나이엔 아직 포켓몬 모으고, 응? 게임하고 노는 거 아니에요?”
진행자의 말에 노아 또한 웃으며 대꾸했다.
“아 저도 포켓몬은 좋아하거든요? 그중에서도 리자몽을 제일···.”
네 사람은 어떤 타입의 포켓몬을 제일 좋아하냐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잠시 나눴고.
“내 정신 좀 봐, 또 얘기가 딴 데로 샜네. ···아 맞다, 아까부터 질문드리고 싶었던 건데.”
혹시 원작자인 에곤 K 작가님은 영화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이셨냐- 라고 질문하자.
막성스 라미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메시지를 꺼내 보였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을 대비해, 미리 에곤 K 작가님께 허락도 받아 왔습니다.”
“우와, 준비성이 엄청난걸요. 그럼 어디···.”
그리고 이내.
에곤 K가 손수 적어보낸 메시지 내용을 소리 내어 읽은 라디오 진행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와, 이거··· 메시지 받고 진짜 너무 뿌듯하셨겠는데요?”
“네, 그야말로 영광 그 자체라고 할까요.”
막성스는 신나하며 웃다가 이내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모든 창작자는 자신의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이기에 앞서서··· 반드시 누군가의 독자, 누군가의 관객, 누군가의 애청자일 수밖에 없다고.”
어릴 때부터 누군가의 ‘팬’이 되어 그 작품을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저 스스로 창작자로서의 꿈을 키우게 되는 가장 큰 동인이라는 말에-
“···.”
두 명의 배우는 물론, 토크쇼 진행자까지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는, 에곤 K 작가님의 팬인 사람으로서 이 영화판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를 무사히 잘 만들어냈다는 데 큰 안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게, 라디오 토크쇼는 훈훈한 분위기로 잘 마무리되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화기애애한 가운데서 출연자들이 토크쇼 진행자와 스탭들과 인사를 마친 뒤.
노아 데보로가 매니저와 함께 자리를 떠나려던 그때-
“저기 잠깐만, 노아.”
감독 막성스 라미가 그를 불러 세웠다.
“아, 감독님.”
“가기 전에, 이거.”
“···?”
젊은 감독이 건넨 것은, 다름 아닌 아동용 동화책이었다.
‘<토끼 남작의 모험>··· 나 이 제목 들어봤는데.’
“케빈 클레그라고, 에곤 작가님 에이전트 알지? 그분이 며칠 전에 나랑 미팅할 때 선물로 준 책이야, 새로 계약한 저자의 책이라고.”
“아, 저 이 제목 안 그래도 들어봤어요!”
“하하, 정말?”
“네, 텀블러에도 해시태그로 종종 올라와서. ···그림이 진짜 귀여운데요.”
흐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막성스 감독.
“이거, 고등학생 둘이서 글 쓰고 그림까지 그린 책이라 하더라고.”
“정말요?”
“어어,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동생한테 생일 선물로 만들어준 책이 대박났다고···.”
“와, 신기하네.”
“노아 너도 동생이 꽤 어리다고 하지 않았어?”
지나가듯 그가 던진 말에 노아는 일순 움찔했다가, 이내 평소의 미소를 되찾았다.
“네, 그렇죠.”
“너도 읽고, 동생한테도 보여주고.”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는데, 감사합니다.”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막성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동생을 위해 책을 만드는 고등학생이라.’
그의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며 노아는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런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혹은 더 많은 돈과 더 빛나는 명예, 더 강대한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소중한 사람을 위해 애쓰는 것.’
···그리고 그런 노력의 결실이 보상받는다는 건 동화 속에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노아는 -어느새 얼굴이 무표정해진 채- 가늘어진 눈으로 무심하게 표지를 넘겼다.
척 보기에도 사랑스러운 그림들.
그리고 아기 토끼들로 바글바글한 토끼굴을 그려놓은 첫 페이지의 삽화를 마주하고서.
“···푸흐, 이게 뭐야.”
소년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까.
실없는 이야기의 연속에 피식 피식 웃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동생이 좀 부러워지네.’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진심을 다해 동생을 아껴줄 수 있는 저자 또한 부럽다고 말이다.
‘나도 그렇게··· 순수하게 가족을 아끼던 때가 있었는데.’
조금 쓸쓸한 기색으로, 아역 배우 소년은 눈을 두어 차례 깜박이고는-
“가자, 형.”
제 매니저를 무감정한 목소리로 불렀다.
*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11월 중순.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네.’
9월 말엔 스콜라스틱 시상식 때문에 뉴욕에 갔고.
2주 뒤였나, 여튼 10월 중순쯤엔 사인회 때문에 캘리포니아에 갔다.
짧은 시간 내에 비행기를 두 번이나 타기도 했고.
···그리하여 아이오와시티의 계절이 늦가을에서 초겨울의 길목으로 접어들 즈음.
“···드디어.”
나는 마침내 <캐슬>의 초고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수없이 고쳤음에도, 어딘가 미진한 구석이 남아 있는 맨 마지막 문장을 쓴 뒤.
그 아래에 적은 [끝]이라는 단어를 보고 있자니.
···그제서야 엄청난 탈력감이 온몸을 덮쳤다.
‘이런 기분도 정말 오랜만인걸.’
회귀한 이래, 그러니까 10학년 여름으로 돌아온 이래로 나는 제법 여러 개의 작품을 썼다.
그러나 그중 대부분이 단편이었으며 <피터 팬>은 중편 3개를 모아놓은 픽스업 소설에-
‘그중 제일 길다는 <호수괴물>도 200페이지 중반대에 불과했지.’
말하자면, 이 정도 분량의 장편을 마무리한 것은 이 <캐슬>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주변에 티는 잘 내지 않았지만, 그때 그 호수에서 비숍 작가님의 조언 덕분에 집필의 벽을 시원하게 뛰어넘어 버린 후.
나는 매일처럼 이 <캐슬>을 집필해왔다.
“···삼시 세끼 밥을 먹듯이, 꾸준하게 썼지.”
그것은 스콜라스틱 시상식 때문에 뉴욕에 갔을 때도, <토끼 남작> 사인회 때문에 캘리포니아로 갔을 때도 계속되었는데.
단 하루, 클로이를 비롯한 온 가족이 다 함께 캘리포니아의 어느 어린이 유원지를 방문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정말로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썼으니까.’
언젠가 네드와 아델이 나더러 주 7일 글만 쓰는 기계냐라고 놀렸을 때도 아닌 척했지만, 사실은 그 말이 맞았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을 정리해보자면-
‘몇 개월간, <캐슬>의 세계에 완벽하게 몰입해 있었던 셈.’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눈앞의 노트북 화면 속에 띄워진 텍스트를 훑어보았다.
글자 수로 따지자면 80만 자에 육박하는.
그야말로 방대한 분량의 원고가 불과 지난 몇 달 사이에 나왔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기도 했고.
‘물론, 퇴고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이지.’
퇴고하다 보면 마음에 안 드는 구석도 나올 것이고.
그러다 보면 중간에 방향을 슬쩍 비틀거나, 에피소드 차례를 바꾼다는 식의 대공사도 있을 수 있겠지만···.
“왠지, 그럴 것 같진 않은걸.”
‘끝’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은 지금은, 그 정도의 수정은 하지 않을 것 같다는 강렬한 확신이 든다.
게다가, 이 <캐슬>의 주인공 라이언.
이 몇 달간 나는 이 라이언이라는 캐릭터와 매순간 함께했던 터다.
‘흔히들 주인공은 작가의 페르소나라고 하는 것처럼.’
나는 권유진인 동시에 <캐슬>의 세계 속 라이언.
가진 것이라고는 본인의 육체와 힘, 이성만이 전부인-
한 마리의 고독한 늑대 같은 소년에 완벽하게 몰입한 채로 지내왔다.
지금의 탈력감이 이렇게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내가 만든 세계 속에서 나를 대변하는 또 하나의 자아와 이별하는 순간이, 눈앞으로 찾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만 해도 조금 낯설었는데 말이지.”
매 작품을 쓸 때마다 그렇지만.
작가 본인에게도 주인공과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첫 등장씬에서만 해도 이 거대한 성에서 하나의 불순물에 불과했던 소년이.’
제 두 다리로 일어서고.
스스로 문자를 익히고, 그것으로 다양한 지식을 손에 넣고 더 나아가서는-
‘이 거대한 미궁과도 같은 숨 막히는 성을 탈출해, 바깥 세계로 나아가기에 이르지.’
그곳에서 마주한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진실, 강렬한 배신감.
그럼에도 새로운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소년이 느끼는 기대감.
‘캐슬’ 안에서 완벽하게 홀로였던 라이언이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나 또한, 이 라이언과 점점 더 친숙해진 거겠지.’
앞선 작품들에 비해 이번 작품에 유난히 몰입했던 걸 보면, 내가 이 <캐슬>에 많은 것을 쏟아붓긴 한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과, 그간 꿈꿔온 모든 것을 이 안에 전부 넣어보자고 마음먹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그 수많은 요소들은 이 <캐슬>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서사 속에서 제법 그럴싸한 조화를 이루는 듯 보였다.
‘나중에 이성이 좀 더 돌아오고 나서 읽으면 아쉽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그저 완벽한 만족감이 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렇게 기분 좋은 감각에 멍하니 취해 있던 그때.
지잉, 핸드폰이 진동하며 네드에게서 연락이 왔다.
“···타이밍 한 번 기막히다.”
곧바로 전화를 받아 한마디하니 들려오는 네드의 목소리.
-타이밍? 무슨 타이밍? 너 뭐 하고 있었어?
“아, 그렇다기보다···.”
내 말을 다 들은 네드가 펄쩍 뛰며 놀란다.
-뭐? <캐슬>을··· 500페이지 넘는 원고를 벌써 다 썼다고?
“그냥 초고이긴 한데.”
-미친, 너 진짜 기계 맞지? 사람이 아니고, 그 안에 뭔가··· AI라든가 그런 게 심어져 있는 거 아니냐.
흥분해서 아무 말이나 해대는 네드의 목소리에 픽 웃고 말았다.
“헛소리 그만하고, 전화는 왜 했는데.”
-아 그게.
그리고 이내, 네드가 몹시 밝은 목소리로 늘어놓은 설명에.
“···와, 미쳤네.”
나는 말 그대로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네드가 <토끼 남작의 모험>의 그림 작가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덕분에-
-으흐흐, 나 지금 좀 정신이 나가 있다. 스캐드라니, 진짜 꿈만 꾸던 곳인데···.
네드가 늘 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사바나 예술대학(Savannah College of Art and Design, 통칭 SCAD).
만화/애니메이션 과정에 특화돼 있어 만화가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는 소위 꿈의 학교라고 불리는 곳이지만, 굉장히 비싼 학비로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그곳의 만화애니메이션 학과에서 네드에게 4년 전액 장학금을 제안해왔다는, 무척이나 반가운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