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96화 (96/126)

< 퍼블리셔스마켓(1) >

*

그 시각,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직장인들 대부분이 살짝 늘어져 있을 늦은 오후.

“···.”

SFF프레스의 장르 전문지 <사이언스앤드픽션> 담당자 마크 는 한동안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발신인 : [email protected]]

[마크 담당자님께, 신작 관련하여 메일 드립니다···]

안 그래도 그는 ‘우리 에곤 작가님의 신작이 나온다면’이라 는 가정을 수없이 해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빅토리아 팀장이나 해리슨 편집장 모두 이렇게 말했 었다.

‘다음 작품에선 아마 작가님을 놓아드려야 할 거야.’

‘그래, 이제는 우리 SFF프레스에선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볼륨이 되었으니까.’

‘그럼에도 마크, 이거 한 가지는 충분히···.’

셋이서 그렇게 대화하며, 에곤 K의 잡지 담당자인 마크 자신  또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던 터다.

분명 그랬는데···.

“그래도, 신작이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마크는 에곤 작가가 보낸  메일 전문을 읽고 또 읽었다.

아무리 읽어봐도 그것은 자신의 신작 <캐슬>의 초고가 완료 되었으며.

이번 작품은 에이전트를 통해 퍼블리셔스마켓에 내보내 경 합을 붙일 거라는 내용이었으니까.

“···흐으.”

전부 예상했는데도, 막상 눈앞으로 닥쳐오니 가슴이 먹먹해 진다.

하지만 그건 에곤 작가에게 서운해서라기보단 오히려 그 반 대에 가까웠다.

“작가님이, 먼저, 메일을 보내주시다니···.”

에곤 K 작가가 SFF프레스에 먼저 그 사실을 알려줬다는 것 이 감동적이었으니까.

애초 마크도 그렇고, 빅토리아 팀장과 해리슨 편집장 모두  이렇게 짐작했었다.

···만약 에곤 작가님의 신작이 나온다면, 자신들 또한 라이터 스홈에서 보낸 쿼리레터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될 거라고 말 이다.

‘그런데 작가님은···.’

마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키보드에 손을 올려 채 팅 메시지를 작성했다.

[S&F편집부_마크 : 에곤 작가님, 보내주신 메일 잘 받았습니 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미리 언질주시다니··· 생각도 못 했는 데 정말 감동이네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에곤 작가가 SFF프레스와 전속 계약을 한 것도 아니거니와,  무엇보다 이미 두 작품이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함께 해주 지 않았던가.

‘베스트 선집 출간도 흔쾌히 동의해줬고.’

출판계에서 작가들의 몸값은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아무리 마음이 맞는 상대와 오래 일했어도, 결국은 자본주의 의 논리대로 움직이기 마련.

그런데 지금 이 에곤 작가는-

‘그럴 의무가 없는데도, 우리에게 미리 얘기를 해준 거지.’

···괜히 말을 꺼냈다가 더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을  감수하고서도 말이다.

진심을 담아보낸 마크의 메시지에, 에곤의 답장이 금방 날아 왔다.

[에곤_K : 그거야 당연하죠. 다른 곳도 아니고, SFF프레스는  첫 작품부터 함께해온 곳인걸요.]

[에곤_K : 그리고 어떻게 보면 이 ‘에곤’이라는 필명과 정체성  자체가··· <사이언스앤드판타지> 공모전이 아니었다면 아예 탄 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을 본 마크는 가만히 두 눈만 깜박였다.

‘참, 우리 에곤 작가님은 글 솜씨도 작품도 정말 좋지만 인간 미가 넘치신다니까.’

다만, 그 인간미 넘치는 작가님의 실물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웠지만 말이다.

그래도 작가님이 계속 글을 쓰신다면 언젠가는 직접 볼 날이  오지 않을까?

[S&F편집부_마크 : 저야말로 작가님의 데뷔 시절부터 지금 까지 함께 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영광이었습니다!]

마크의 답장은 그저 상투적인 문구가 아니라, 순도 100%의  진심에 가까웠다.

‘세상에 어떤 편집자가, 생신인 초짜가 대박 베스트셀러 작 가가 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을까.’

그런 행운을 붙잡은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을, 마크는  매순간 실감하고 또 놀라워해왔으니 말이다.

그렇게 감사의 말을 보내고 난 뒤.

키보드에 손을 올린 채로 잠시 고민했다.

‘···빅토리아 팀장님이랑 해리슨 편집장님이 꼭 그 얘기를 하 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장편은 다른 곳이랑 하셔도 단편은 우리랑 계속  해주셨으면 좋겠다- 라는 간단한 요청이지만.

지금 분위기에선 왠지 그런 말을 꺼내기가 조금 꺼려진다.

‘기껏 감동적인 얘기를 해놓고, 뒤늦게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선뜻 그 말을 꺼내지 못하던 그때, 띠링- 소리와 함께  에곤의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에곤_K : 그건 그렇고 마크 담당자님. 어쩌면 염치 없는 얘 기일지도 모르겠는데···]

이내 이어진 메시지에 마크의 눈이 커졌다.

그러니까 그것은, 비록 장편은 다른 곳과 하더라도.

[에곤_K : 단편은 앞으로도 꾸준히 <사이언스앤드판타지>에  싣고 싶습니다]

“···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른 마크의 목소리에 다들 이쪽을 돌아 봤지만.

시선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마크는 타다다닥- 하며 그대로  답변을 작성했다.

[S&F편집부_마크 : 그럼 그럼요!저희야 언제나 환영이죠.]

[S&F편집부_마크 : 사실은 제 쪽에서 먼저 그런 부탁을 드리 려고 했습니다 하하]

그러자 곧바로 에곤의 답장이 날아왔다.

[에곤_K : 이거, 저희 마음이 통했나 본데요?]

으흐흐.

마크는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웃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케빈은 여전히 걸신 들린 사람처럼 화면 속의 텍스트를 읽는  중이었다.

[“성 요하임께서는 말씀하셨다.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 신의 소명을 부여받기 마련이고.”

나이 든 사제의 말에 따르면, 여기 있는 ‘성의 주민’들의 소명 이란···.

“검은돌을 캐거나, ‘시험의 풀’을 키우는 것이다. 두 가지 모 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일들이지.”

라이언은 검은돌을 캘 때마다 폐부 깊은 곳에서 기침이 터져  나오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게 캐낸 검은돌은 한 달에 한 번씩 이 성에 날아오는, 마 법의 힘을 지녔다는 거대한 강철새가 싣고 간다는 것도.

‘시험의 풀은 또 어떻고.’

이름 그대로 시험에 들게 하는, 수확하기가 고되기 그지없는  작물.

이곳 주민들은 농기구도 없이 오로지 맨손으로 그것을 캐냈  는데, 칼날을 쓰면 풀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자체로도 힘겹지만, 조슈아 아저씨처럼 목숨을 잃는 경 우도 있어.’

갈 곳 없는 고아인 그에게 친절히 대해주던 소수의 사람 중  하나였던 조슈아.

그는 아픈 아내의 몫까지 대신 일하기 위해 평소보다 훨씬  오래 밭에 머물며 수확하다가 변을 당했다.

흔히 그러듯 그 지독한 향에 기절해버리는가 싶더니, 이튿날 에도, 사흘째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아예 영영 깨어나지 않았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슈아네는 바로 지난달에 ‘신입 주민’,  그러니까 아이를 인도받은 참이었다.

주민 모두가 모여 새로운 아이의 도착을 축하해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조슈아의 병약한 아내가 제법 큰 아이를 안고서 울부짖던 모 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가운데, 사제의 목소리가 이어 졌다.

“네가 아무리 모두에게 천시받는, 뿌리 없는 고아라고는 해 도.”

소년을 내려다보는 사제의 눈빛은 엄격하고도 매몰찼다.

“태어나면서부터 새겨진, 소명을 부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검은 돌과 ‘시험의 풀’이라.

이 두 가지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고, 주민들은 어째서 이 일 에 동원되는 걸까.

케빈의 머릿속에서 고개를 드는 의문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늘 허기를 느끼는 라이언과 달리, 어떻게 주민들은 빵 한 덩 이를 먹고 온종일 분주하게 일할 수 있을까.’

가만히 생각에 잠기던 그때, 언젠가 유진이 했던 말이 떠올 랐다.

“그러고 보니··· 이 <캐슬>의 프리퀄도 이미 기획 중이라고  하셨던가.”

언뜻 지나가듯 말하기로, 그 작품의 제목이-

“<잊혀진 성자들>.”

그래, 잊혀진 성자들.

그 제목을 입 밖에 낼 때 유진이 짓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 다.

‘제게는, 음···. 여러모로 많은 의미가 있는 작품이 될 건데요.’

어떻게 보면 이 <캐슬>은, 그 <잊혀진 성자들>을 위한 포석 이나 다름없다는 것.

‘<잊혀진 성자들>은 <캐슬>보다 몇 백 년 이전의 이야기가  될 겁니다.’

‘···몇 백 년 전의 이야기라고요?’

중세풍의 세계관에서 몇 백 년 전이라면 고대풍의 세계관을  말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일순 들었지만.

“아니다, 다 계획이 있으시겠지.”

케빈은 고개를 젓고는 다음 장면을 읽기 시작했다.

[소명이라니, 이 얼마나 우습고도 편리한 단어인가?

이곳의 주민들이 주어진 것 외의 다른 일은 넘보아서도, 꿈 꿀 수도 없다는 것을 ‘소명’이라고 부른다면···.

라이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생각했다.

‘나는, 그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의문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째서 평생토록 이 높은 성벽 안의 세계에서만 지내 야 하는 것일까.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괴물을 어째서 그토록 두 려워한단 말인가···]

정신 없이 읽던 와중, 문득 눈이 너무 빡빡한 느낌에 눈꺼풀 을 깜박였더니.

“읏.”

희미한 통증과 함께, 건조해진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눈이 얼마나 건조하면 눈물이 다 날까.’

케빈은 황당한 심정으로 눈가를 닦아낸 뒤, 시간을 확인하고 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뭐야. ···벌써 한 시간 반이 지났다고?”

1시간 반.

자신이 노트북 화면에 코를 박은 채 유진의 원고를 읽기 시 작한 지로부터 흐른 시간이다.

즉 90분 내내 꼼짝 않고 앉아서 화면만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

그래선지 고개를 살짝 움직이자 뻐근해진 뒷목에서 뚜둑 소 리가 난다.

‘···이거, 나중에 유진 작가님한테 혼나겠는걸.’

자신에게도 일할 때 15~20분에 한 번씩은 꼭 스트레칭을 하 라고 잔소리, 아니 조언해주는 작가님이 아닌가.

하지만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다.

“원고가 너무 재밌는걸 어떡하라고···.”

무릇 군침도는 이야기란 독자를 유혹하여.

제발 한 페이지만, 한 페이지만 더 읽게 해달라고 간절히 애 원하게 하는 법이니 말이다.

게다가, 이렇게 원고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점이 있다면.

에곤 K는 작품마다 그 주제나 색깔이 분명히 다르지만.

‘문체만큼은 명확한 특징이 있단 말이지.’

화려한 미사여구나 수사적 기교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한 편.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도 정갈하며-

‘이미지를 선명하게 그려내고, 의미를 오롯이 밝혀내는 데  집중한다.’

그래서일까.

어떤 글은 독자의 빛바랜 기억을 일깨우거나 오랜 감정을 건 드리는 데 집중하거나.

또 어떤 글은 깊은 성찰을 통해 독자의 행동을 수정하도록  유도하기도 하지만···.

‘에곤 K의 작품은, 독자들을 그저 그 안에 데려다놓을 뿐이 지.’

이야기 속 세계에 풍덩- 빠뜨려놓고.

독자가 그 세상을 온전히 체험하는, 아니 등장인물의 삶을  대신해서 살게 하는 식.

자신이 90분 내내 정신 못 차리고 읽기만 했던 것 또한.

‘내가, 바로 이 라이언이 된 듯한 기분 때문이겠지.’

이 아이오와시티에서 장기 출장 중인 4년차 에이전트 케빈  클레그가 아닌-

으스스한 고성 안에서 평생토록 살아온, 고아 소년 라이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라고.

···그런 결론을 내린 순간, 팔 위로 오스스 소름이 돋는다.

케빈은 옆에 놓인 물잔을 집어들어 목을 가볍게 축이고는.

그럼에도 여전히 목 마른 이처럼 정신없이 원고를 읽어나가 기 시작했다.

[라이언이 그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주민들의 경멸 어린 시선과 날카로운 말은 소년에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했다.

이는 마치 ‘이 거대한 성이 살아 있고, 더 나아가 신성한 힘  을 지닌 무언가’라는 것을, 전혀 믿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입가에는 기분 좋은 웃음이 걸려 있었는데.

···이 <캐슬>이 가져올 어마어마한 열풍을, 이미 머릿속에 그 리는 사람 특유의 기대감 가득한 미소였다.

그 이후.

“와···.”

케빈 클레그가 <캐슬> 초고를 다 읽은 것은 꼬박 몇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였다.

그저 감탄밖에는 나오지 않는 와중에도.

향후 케빈C 에이전시를 설립해 승승장구하며 ‘미다스의 손’  이라 불릴 에이전트는, 지금 이 순간 바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잊지 않았다.

“···좋았어.”

좋은 작품을 만날 때 특유의 흥분감과 열정이 가슴을 가득  채우는 가운데.

케빈 클레그는 뚝뚝 소리를 내가며 가볍게 손을 푼 뒤, 노트 북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럼 어디, 본격적으로 작성을 시작해볼까.’

[라이터스홈| 회원사 여러분께 에곤 K의 신작 <캐슬>을 소 개합니다···]

그것은 앞서 랜든 비숍이 유진에게 설명해줬던 대로.

회원 출판사들에게 저자의 원고를 소개 및 홍보하는 피칭 메 일인 ‘쿼리레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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