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97화 (97/126)

< 퍼블리셔스마켓(2) >

*

평소라면 별일 없이 평온하게 지나갔을 11월 하순의 어느  저녁.

지금 출판계는 오늘 오전, 명문 에이전시 라이터스홈에서 보 내온 한 통의 쿼리레터로 난리가 난 참이었다.

[발신인 : [email protected]]

[라이터스홈| 회원사 여러분께 에곤 K의 신작 <캐슬>을 소 개합니다]

최근 이 출판 에이전시 업계에서 가장 떠오르는 인물인 케빈  클레그.

그의 계정으로 발송된 이 한 통의 메일은, 수백 개에 달하는  회원 출판사들 대부분에서 그 내용을 열람했고.

“와, 이거··· 물건인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걸.”

“지금 당장 통원고 요청해!”

이 쿼리레터에 첨부된 시놉시스와 샘플원고를 읽어본 출판 사의 90퍼센트 이상이 전체원고를 요청했다.

여기서 전체 원고를 요청한다는 것은, 해당 작품의 출간 계  약 경쟁에 참여할 의사가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처럼 원고를 요청한 곳 중에는 이미 <호수에 무언가가 산 다> 시절부터 에곤 K의 작품을 탐냈던-

[리암홀트| 편집장 제임스 베넷]

맥밀란 그룹 산하의 문학 전문 대형출판사, 리암홀트 또한  포함돼 있었다.

···편집장 제임스가 사용하는 편집장실은 이 리암홀트 빌딩의  최고층에 위치해 있는데.

그곳의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을 보고 바깥의 직원들이 수근거 리는 중이었다.

“편집장님 아직 퇴근 안 하신 거야?”

“그런가 본데.”

“신기하네, 원래 이 시간까지 계속 계시는 법이 없는데···.”

그러자, 분주하게 메일함을 살펴보던 편집자 한 명이 혀를  차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들 왜 이렇게 느리냐, 진짜. 오늘 에곤 K 신작 쿼리레터   떴잖아. 아무리 본인 담당이 아니라고는 해도 좀 살펴보라고.”

“···에곤 K 신작이 벌써 나왔다고?”

“지난번 책 출간된 지도 얼마 안 됐잖아, 이번엔 중편이나 중 단편이라도 내는 건가?”

그러자 곧바로 고개를 젓는 편집자.

“장편, 그것도 550페이지 분량의 초장편이야.”

“···뭐? 벌써?”

“아니 그게 말이 돼?”

“왜, 가끔 보면 그런 작가들 있잖아. 일반적인 논리로는 설명 하기 어려운, 규격 외의 괴물들.”

그리고 그 규격 외의 괴물 작가가 써낸 <캐슬>의 따끈따끈 한 초고를-

“와, 이거 진짜··· 폼이 미쳤구만.”

리암홀트의 편집장실 안.

편집장 제임스는 그저 홀린 듯이 읽는 중이었다.

분량이 워낙 많다 보니 프린트하는 대신 킨들 리더기에 파일 을 담아서 읽는 가운데.

“···.”

편집장의 정신은 이미 이곳에 있지 않았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무게가 흉벽 곳곳에 내려앉아 있다.

이 거대한 성채가 언제 처음 누구의 손으로 지어졌는지 아무 도 알지 못했다.

성은 그저 이 안에서 되풀이되는 무수한 비극을 침묵의 파수 꾼처럼 지켜볼 뿐이었다···]

<캐슬>의 세계 속.

먼지투성이의 고색창연한 공간 한가운데서, 가슴 깊은 곳에  지독한 외로움을 간직한 고아 소년 라이언과 함께하는 중이었 으니.

[···소년의 손 아래서 종이가 바스락거리며 넘어갔다.

어둑한 불빛 아래서 수많은 글자들이 눈앞에서 춤을 춘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낯선 글자였지만, 라이언은 낙담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라이언이 글자를 하나씩 익혀가며 책을 읽는 기쁨을 알게 되 고.

틈날 때마다 도서관에 들어가 그곳의 지식을 전부 흡수하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이 모르는 것들이 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

···이른바 소년이 알을 깨고 바깥 세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편집장은 반쯤 홀린 듯 지켜보았다.

[라이언은 혼자였지만, 이곳에서만큼은 혼자가 아니었다.

이 비밀 도서관에서는 지혜를 속삭여주는 학자 ‘성자 앨러릭’ 이, 외로운 마음을 위로해주는 ‘성녀 이졸데’가, 용맹한 기사 ‘ 엘드릭 경’이 늘 그의 곁에 함께했으니까···]

읽는 중간 중간 감탄을 한다거나.

깊은 한숨을 내쉰다거나.

혹은 입술 새로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흘리는 것 외에는-

“···.”

이곳 편집장실은 그저 완벽한 적막 그 자체였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평화로운 풍경 속, 정신없이 <캐슬>의  세상 속에서 독서를 이어나가던 편집장의 눈이 이내 화들짝 커 졌다.

“뭐? 이게 무슨···.”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튀어나온 경악의 신음.

이내 이어지는 내용을 제임스 편집장은 눈이 튀어나온 채 읽 어내려 갔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제 눈을 못 믿겠다는 사람처럼 킨들 리더기의 버튼을 눌러가 며 한참 더 앞으로 갔다가.

원고 안에서 검색도 해봤다가.

이내 자신이 읽던 그 부분으로 돌아왔다.

그러고서는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다는 듯, 그러나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채로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히야, 미쳤네 진짜.”

조금 더 고급스럽고 전문적인 표현으로 감상을 말하고 싶지 만.

어쩐지 입에서는 자꾸 ‘미쳤다’ 같은 식의 단순한 탄성밖에 는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라이언이 각고의 노력 끝에 성을 탈출하 여 바깥 세계의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하는 장면이었다.

[···난생 처음 마주한 바깥 세상은 기이함 그 자체였다.

유리와 금속으로 만든 첨탑은 구름을 뚫고 솟아올랐고, 빛나 는 강철덩어리들이 질주하는 말보다 빠르게 달린다.

‘마법의 새가··· 이곳에도 있잖아.’

주민들이 ‘마법의 새’라며 신성시하던 각양각색의 강철 새들  이 허공을 활공하며, 강철 몸을 지닌 일꾼들이 거리를 분주히 청소하는-

그야말로 믿기 힘든 풍경 앞에서 라이언은 강렬한 현기증을  느꼈다···]

즉 라이언을 비롯한 주민들이 지내는 ‘고성 안의 세계’와는  달리, 바깥 세계는 각종 신기술이 발달한 세계라는 것.

제임스 편집장은 걸신 들린 사람처럼 빠르게 다음 내용을 읽 어나갔다.

1인용 우주선, 웜홀, 노동용 안드로이드와 플라즈마건 따위 가 등장하는 것을 보니-

‘미래 문명, 그것도 스페이스오페라에 가까운 세계관이로군.’

하아, 제임스 편집장은 저도 모르게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 고 말았다.

“그래, 그랬구만. 그래서 그런 거였어···.”

앞에서 읽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그냥 넘어갔던 대목들 이 이제야 하나 둘씩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캐낼 때마다 기침이 터져나오는 검은돌.

이건 아마도 유독한 성분의, 그러나 사회의 유지에 필수적인  연료일 터이고.

-그것을 달에 한 번씩 실어간다는 ‘마법의 강철 새’란 수송용  항공기를 말하는 것일 터이며.

-캐낼 때마다 자칫 정신을 잃기 일쑤라는 작물은··· 향정신성  의약품의 원료가 되는 마약류 식물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다면, 대체 누가 이 주민들을 이 성에 몰아넣었을까?’

주민 중 누구도 실체를 모르며, 알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괴 물’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 그것보다-

성 안의 ‘주민’들과, 바깥 세계의 ‘시민’들의 차이는 대체 무 엇인가.

떡밥들이 하나 둘씩 모여 착착 들어맞고, 이내 퍼즐의 큰 그 림을 이루는 모습에 쾌감이 느껴진다.

‘이거 이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으면 기분이 좋을 수밖 에 없지.’

어디 그뿐인가.

앞에서만 해도 일반적인 중세풍 판타지에 가까웠던 세계관 이-

‘<듄>이나 <스타워즈>를 연상케 하는 스페이스 오페라 장 르로.’

···걷잡을 수 없이 단숨에 확장된 것에 황홀감마저 드는 가운 데.

편집장은 이런 가설을 세웠다.

‘에곤 K는 이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시리즈물을 기획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캐슬>을 얻는다면, 이후의 시리즈도 한결 수월하게  얻을 수 있으리라.

그런 결론을 내리자 편집장의 가슴이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게다가, <캐슬>은 에곤 K의 전작들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 궤를 달리하지.’

물론 <멸망한 세계의 피터팬>도,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도 각각 대단한 성공을 거둔 작품들이었지만.

이번 작품은 스케일부터가 아예 다르다.

그저 한 권의 소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설부터 시작해, 이 <캐슬>이 그래픽노블, 영화, 드라마, 뮤 지컬 등 수많은 장르로 각색되며 더 나아가서는-

‘어쩌면 게임화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훨씬 더 거대한 영역을 넘볼 수 있는 ‘대형 프랜차이즈 컨텐 츠’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작품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반드시-

“···이번 작품은 우리 리암홀트에서 잡아야만 해!”

편집장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외치고 말았다.

그리고는 이내, 혼잣말치고는 목소리가 많이 컸음을 의식하 고는.

“아, 나머지도 얼른 읽어야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독자가 되어 다음 문장을 읽기 시작했 다.

*

출판 에이전시에서 연중 가장 긴장되는 시기를 꼽아보라 한 다면.

대부분의 에이전트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거야 뻔하지, 신작 원고의 쿼리레터를 보낸 직후가 아니 겠어?’

이 쿼리레터를 보낸 이후, 출판사들이 보이는 반응과 업계가  돌아가는 분위기에 따라.

이번 저작권 딜의 규모가 어느 정도가 될지 대략적으로 예측 되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이전트 케빈 클레그가 담당하는 에곤 K의 신작 원고 <캐  슬>은 쿼리레터를 보낸 당일부터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RE: 라이터스홈| 회원사 여러분께 에곤 K의 신작 <캐슬>을 ···]

[RE: 라이터스홈| 회원사 여러분께···]

···

메일을 보낸 지 1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점.

전체 원고를 열람하고 싶다는 회신메일 몇 십 통이 쏟아져  들어왔음은 물론이고.

“케빈, 이거 봤어?”

“네? 무슨-”

“케인북스. 여기서 입찰서를 그냥 넣어버렸는데?”

선배의 말에 케빈은 멍하니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요? 벌써?”

“어어, 금액까지 써서. ···와, 엄청나게 썼네. 여기 대표도 아주  칼을 갈았나봐?”

“···.”

두 사람이 이렇게 놀란 데는 이유가 있다.

일반적인 저작권 딜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여유 있게 진행된 다.

‘거래의 대상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원고의 저작권인 만 큼.’

원고의 내용을 충분히 검토하고 그 가능성을 판단하는 데 시 간이 어느 정도 필요하기 때문.

출판사가 입찰서를 넣기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1주일.

보통은 2주, 최대는 한 달 정도의 기간을 두고 입찰 여부를  결정하는 식인데···.

“지금, 우리 쿼리레터 보낸 지 몇 시간밖에 안 지났죠?”

“어어. 이런 열기는 진짜 오랜만이네.”

이번의 <캐슬> 같은 경우는 아주 이례적으로, 레터를 보낸  직후부터 입찰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케인북스처럼 몇 시간 만에 입찰서를 넣은 것은 양반이었 고.

“잠깐만, 여긴 어디야? 던퍼블리싱?”

“여긴 아예 전체원고도 요청 안 하고 그냥 질러버린 것 같은 데요.”

“크흐흐, 다들 눈이 돌아간 모양이야.”

덕분에, 출판 에이전시 가운데서도 상당한 규모와 인력을 자 랑해온 이 라이터스홈조차-

“잠깐만, 지금 우리 픽션팀 인원이 너무 부족해. 아동서 파트  손 남아돌지?”

“네네, 그쪽 애들 전부 저희 쪽으로 지원돌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아까 10분 전엔가, 퀼프레스랑 피닉스북스에서도 입 찰서 왔지? 그거 전부 다 정리해서 케빈한테 돌려놔···.”

에곤 K의 신작 타이틀 때문에, 타 부서의 인력까지 모두 동 원해야 하는 전대미문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으하하하, 케빈 저 복덩이 같으니라고!”

픽션팀 팀장이 케빈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내며 하는 말처럼.

행복에 겨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태풍의 한가운데에 있던 케빈 클레그는 정말 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는데.

“···와, 이건 정말 역대급인걸?”

이 상황에서 가장 놀라운 일을 꼽아보자면-

“잠깐만, 지금 이거··· 진짜야? 펭귄랜덤하우스, 사이먼앤슈스 터, 맥밀란에···.”

어느새 곁에 다가온 채, 케빈의 모니터를 보고는 입을 떡 벌 린 선배의 물음에 케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펭귄랜덤하우스, 아셰트, 맥밀란, 하퍼콜린스, 사이먼앤슈스 터.

···미국의 ‘빅파이브’라 불리는 초거대 출판기업 모두가, 이번  입찰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

‘아무래도 판이, 엄청나게 커지겠는걸?’

이것이 고작 <캐슬>의 쿼리레터를 오픈한 지 겨우 1주 만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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