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98화 (98/126)

< 제일 부유한 고등학생(1) >

*

어느새 12월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부쩍 추워진 날씨에 옷차림이 한층 두꺼워진 가운데.

‘···<캐슬>의 초고를 손에서 떠나 보내서일까.’

나는 한동안 가슴 한구석이 헛헛한 기분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 같은 감상을 솔직하게 입 밖에 내자.

-푸흐흐흐, 자네 말 들으면 무슨 딸이라도 시집 보낸 줄 알겠 어.

···스마트폰 저편에서 비숍 작가님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비숍 작가님은 요즘 이렇게 컨디션이 좋았던 적이 없다며 잔 뜩 신이 나 계셨는데.

‘그건 아마도, <어둠 속의 방문자들> 때문이겠지.’

앞서 집필했던 동명의 단편을 원작으로 하는, 몇 년 만의 신 작 3부작 시리즈.

그 1권인 <그림자와의 조우>가 다음 주에 곧 출간되기 때문 이다.

···당장 독자인 나부터도 이렇게 기대되는데, 비숍 작가님 본 인이야 더하실 터.

“음, 근데 틀린 말은 아니긴 합니다 작가님. 물론 제가 딸을  키워본 적은 없지만.”

아주 잠깐, 클로이를 시집보낸 상상을 했더니 벌써부터 눈앞 이 흐려진다고 덧붙이자.

-이거 이거, 이런 동생 팔불출을 봤나.

껄껄 웃어젖히던 작가님이 좀 더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 다.

-그건 그렇고, 자네 지금 당장이라도 <캐슬>을 퇴고해야 한 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지?

“···어떻게 아셨어요?”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말에 깜짝 놀랐다.

-허허, 내가 자네 같은 스타일의 작가를 좀 잘 알지. 그러니 까, 몇 십 년 전의 내가 꼭 유진 군 자네 같았거든.

“···.”

-자네가 몇 달간 그 세계에 푹 빠져 있었잖나, 근데 그렇게  오랫동안 몰입해 있다 보면.

당연히 눈에 보여야 하는 것도 잘 안 보이게 마련이라는 것.

그러니 일부러 머리를 식히고, <캐슬> 원고에서 거리를 두 라는 것이 작가님의 조언이었다.

-한 달 정도 푹 쉬고 난 다음에 다시 원고를 들여다 보면, 그 때는 비로소 조금 객관적으로 퇴고할 거리들이 보일 거야.

그야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지극히 맞는 말들이었다.

*

그리하여 나는 원고를 자꾸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을 억 누르며 일부러 다른 쪽에 정신을 쏟았다.

한동안 소홀히 했던 학교 공부는 물론이고, 원고를 집필하느 라 종종 빠졌던 클럽활동에 다시 열을 쏟기로 한 것.

···그리고 지금 역시, 간만의 문예창작 클럽활동을 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힐크레스트 지니어스다!”

“오, 금메달리스트 유진! 잘 지냈어?”

“우리 같은 수업 듣는 거 알지?”

얼굴만 아는 애들이 친한 척 말을 걸어오는 것은 물론.

“야 너 화면빨 은근 잘 받더라.”

“이번 주말에 울집에서 파티하는데 여자애들 많이 오니까···.”

에이든의 브이로그에도 곧잘 출연하는, 인싸 스타일의 에이 든 친구들에게선 자꾸만 파티 초대를 받았고.

“근데 유진, 너 혹시 미식축구 해볼 생각 없냐? 그새 몸이  꽤···.”

“이 자식 꿈도 크네.”

“크흐흐, 문학 천재를 지금 어디에 데려오려고.”

제이든의 미식축구부 친구들.

그러니까 어마무시한 체격의 근육질 친구들도 나만 보면 어 깨를 친근하게 쳐대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 어깨에 멍들겠는걸.’

물론, 여기저기서 나를 친근하게 대하는 것이 절대 나쁘지는  않았다.

게다가.

“잠깐, 유진 학생! 잠깐만 들렀다 가요.”

의도하진 않았지만, 행정실의 미스 에인절과도 자주 얼굴을  보며 친해지게 되었다.

“아, 오늘도 공문이 왔어요? 이번엔 어디.”

“아이다호대학이랑, 미시건대랑··· 퍼시픽대학? 난 여기에 문 예창작과가 있는 줄은 상상도 못했지 뭐예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한 뭉치의 서류를 안겨주는  미스 에인절.

···스콜라스틱 시상식에 다녀온 이후.

전국의 온갖 대학들에서 입학 제안을 공문으로 보내오는 탓 에,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행정실에 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행정실 직원, 그러니까 미스 에인절과도 사담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으니.

“후후, 그건 그렇고 유진 학생, 오늘 난 기사 혹시 봤어요?”

“네? 무슨 기사···.”

내가 그 말을 하길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보 여주는 미스 에인절.

“이거 봐요, <아이오와시티프레스> 기사에 댓글이 달렸는 데.”

[‘토끼 남작’의 고등학생 작가이자 스콜라스틱 금메달리스트  유진 권, 의외의 실물?]

흔히 보던 제목과 내용의 기사였지만 차이점을 꼽자면.

중간에 -스콜라스틱 공식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내가 무대 에 올라가 수상하는 사진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토끼남작 저자! 얼굴이 궁금했는데 예상했던 거랑 다르네

└케이팝 아이돌 느낌

└나 힐크레스트 학생인데 저 사진보다 실물이 나음 :D

└오 직접 보고 싶다

···

···으음.

민망한 기분에 작게 신음하자, 미스 에인절이 깔깔 웃으며  더 좋아한다.

그녀에게 인사하고 빠르게 행정실을 나오는 가운데, 쏟아져  들어오던 인터뷰 요청들을 떠올렸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긴 하지.’

이미 <토끼 남작>의 판권이 여섯자릿수로 거래됐을 때부터  온갖 매체에서 들어오던 인터뷰 요청은, 스콜라스틱 시상식 직 후 극에 달했는데.

그런 유의 메일들을 나는 죄다 나의 에이전트에게 토스하고  있는 참이었다.

미스터 케빈이 요즘 <캐슬>의 저작권 딜 때문에 정신없이  바쁜 걸 아는 만큼 조금 미안하긴 했는데.

‘미안하긴요, 작가님. 그렇게 생각하실 것 전혀 없습니다! 원 래 에이전트가 이런 걸 하라고 있는 건데요, 하하.’

자칫 잘못하면 괜히 꼬투리만 잡힐 수 있으니, 아예 열람조 차 하지 말고 자신에게 메일을 통으로 전달해달라는 것.

‘그러면 제가 읽어보고 적절하게 답변을 보내겠습니다.’

미스터 케빈이 든든하게 지원해준 덕분에, 한동안 귀찮기 그 지없던 상황은 지금 와서는 훨씬 잠잠해졌고.

그 후로도 내내 인터뷰 요청에 응하지 않자 일부 기자들은  알아서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러니까 본인들의 상상력을 이용해서 말이지.’

방금 미스 에인절이 보여준 기사도 그런 사례 중 하나였다.

잠시 후.

“오! 유진 왔구나!”

“흐흐, 간만에 얼굴 보네.”

“유진이야 뭐 바쁠 테니···.”

문예창작클럽룸에 도착하자 먼저 도착해 있던 친구들이 나 를 반긴다.

“유진, 벌써 12월이라니 믿겨져?”

“난, 왜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지···.”

개학할 때도 똑같은 말을 하던 미아.

그리고 늘 그렇듯 부지런히 지내고서도 자책하는 샬롯.

“샬롯 너 이번 학기 엄청 열심히 보냈잖아. 과제도 그렇고,  수업 참여도 열심히 하고.”

“···.”

내 말에 샬롯이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는데, 한층 더 건장해 진 모습의 제이든이 끼어들었다.

“으하하! 난 근육량 증가에 성공했지!”

“···거기서 더 늘리면 안 될 것 같은데.”

가슴 앞에서 팔짱을 낀 채 한마디하던 미아가 말을 이었다.

“근데 제이든 너, 진짜로 미식축구는 안 할 생각이야? 프로를  지망해봐도 될 것 같은데.”

미식축구 클럽 소속인 건 알았지만, 그 정도인 줄 몰랐는걸.

그러나 제이든은 결심이 확고해 보였다.

“난 무조건 문예창작 쪽으로 갈 거임.”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스포츠 재능은 아무나 타고 나 는 게 아니잖아?”

미아의 지극히 일리 있는 말에 고개를 젓는 제이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스포츠는 진짜 극소수 천재들만 살아 남을 수 있는 분야라고.”

그리고 자신이 그 천재가 아니라는 건 너무나 잘 안다는 제 이든.

“뭐, 우리 학교 클럽에서야 나쁘지 않은 실력일지 모르겠지 만···.”

자신은 그보다는 문학에 뜻이 있음을 담담하게 얘기하던 그 때, 로완이 끼어들었다.

“뭐, 제이든 너라면 어떤 분야든 성공할 것 같은데.”

“어어, 웬일로 칭찬이야? 니가 이렇게 나오니까 좀 무서운데,  크크.”

“···.”

전만 해도 조금 불편해 보이던 둘은, 이전의 합평 때 로완이  진심으로 사과한 후로 제법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요즘 로완이 많이 유해지기도 했고.’

지난번, 스콜라스틱 시상식 이후로 로완은 내게 따로 축하의  메시지까지 보낸 터였다.

“아 그건 그렇고, 유진.”

뿌듯한 얼굴로 로완 녀석이 내보인 핸드폰의 화면 속.

익숙한 제목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오.”

그것은 다름 아닌 로완의 중편소설 <다중세계에서 들려온  멜로디>의 자가출판 페이지였다.

약 2주 전에 출간된 소설에는, 서너 개 정도의 리뷰가 달려  있었다.

“하하, 물론 의미 있는 수치는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내 책을 돈 주고 읽는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기분 좋더라.”

“···.”

마냥 행복한 얼굴로 말하는 로완에게 나는 KDP 저자 페이지 도 보여달라고 했고.

판매부수와 추이, 별점과 리뷰를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데?”

“어, 정말?”

“어어. 이거, 출판 에이전트들한테는 보내봤어?”

“아, 그게.”

···이미 원고 상태일 때 수없이 보냈지만 전부 다 거절당한 원 고라는 것.

로완이 쑥스러워하며 꺼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지금 이 상태로 말야.”

“지금 이 상태?”

“응. ···에이전트들도 신이 아니잖아? 그 사람들도 막상 출판 시장에선 뭐가 잘 나갈지 모른다고. 그런데···.”

나는 핸드폰 속의 판매추이 그래프를 손으로 짚어 보였다.

“지금 이렇게, 실질적으로 판매가 이뤄지고 있다는 자료를  첨부해서 보낸다면?”

“···아!”

내 말의 요지를 곧바로 이해한 듯 탄성을 외치는 로완.

눈빛이 변하더니 이내 밝아진 얼굴로 말한다.

“니 말대로 한 번 해볼게.”

그렇게 로완과의 대화를 마무리하던 그때.

“···어, 이거 뭐야. 유진! 이거, 이거 봐봐!”

옆 테이블에 모여 있던 클럽원들에게서 경악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대체 뭔데 그러나 싶어 그쪽으로 가보자.

공용 모니터 화면 속, 이번에 스콜라스틱 공모전 1위작으로  꼽힌 에 관한 기사들이 떠 있었다.

[<루나 그래피티>의 천재 극작가 로렌 루먼, 차기작은 ‘천재  고등학생’의 단편?]

[천재 극작가 로렌 루먼의 선택, 스콜라스틱 1위작 는 어떤 소설···]

[고등학생 공모전 1위작 , 천재 극작가에 의해  연극화된다]

[로렌 루먼이 선택한 를 쓴 고등학생 유진 권은  누구?]

···

수없이 뜨는 검색 결과를 보던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안 그래도 이 맘때 기사화될 거라고 들었던 만큼 딱히 놀라 지 않았는데.

“야, 아- 가 뭐야, 대체 무슨 반응인데.”

“으어어, 이, 이거 진짜야?”

“진짜로? 로렌 루먼이면··· 천재 극작가라고 불리는 사람 맞 지?”

“아 나도 로렌 루먼 기사 읽어봤어! 연극계의 판도를 바꿀 천 재라고··· 그런 사람이 를 연극으로 만든다고?”

“와, 미쳤네···.”

···문예창작 클럽 친구들은, 놀라도 보통 놀란 게 아닌 모양이 었다.

‘네드와 아델은 로렌 루먼이 누군데- 하는 반응이었지만.’

이 친구들은 문예창작을 지망하는 학생답게 그녀의 존재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상황.

그리고 이내, 로렌 루먼이 만들 를 향한 기대감 이 그들의 얼굴에 떠올랐다.

“와, 상상만 해도··· 어마어마한데.”

“그러게. 나, 처음 읽었을 때 펑펑 울던 게 아직 도 기억나.”

“으아, 너무 기대돼! 나중에 초연하면 우리 다같이 보러 가면  안 돼?”

“미스터 레너드도 그러자고 할 것 같은데···.”

시기나 질투보다는 그저 순수한 감탄과 기대감으로 가득한  반응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참, 괜찮은 애들이라니까.’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 친구들의 모습에 흐뭇해하던 그때.

지잉- 진동음과 함께 미스터 케빈에게서 전화가 왔다.

-작가님, 작가님 혹시··· 오늘 저녁에 잠깐 미팅 가능하실까요?

몹시 다급해 보이는, 그러나 기분 좋은 흥분이 가득한 목소 리다.

그의 용건은 당연히도 원고 <캐슬>의 저작권 딜이었다.

-펭귄랜덤하우스, 아셰트, 맥밀란, 하퍼콜린스, 사이먼앤슈스 터! 즉 빅파이브가 전부 다 입찰에 참여했고···.

총 40여 곳의 출판사가 입찰에 참여했다는 것 자체도 어마 어마했지만.

-지금 현재, 입찰가가 일곱자릿수까지 올라가고 있습니다!

···일곱자릿수.

그러니까 최소, 백만 단위의 선인세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는  말에 잠시 눈앞이 아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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