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99화 (99/126)

< 제일 부유한 고등학생(2) >

*

‘백만 달러 이상이라니···.’

반갑다 못해 충격에 가까운 연락을 받은 지 한 시간 후.

나는 문예창작 클럽 활동을 마친 뒤 차를 몰고 시내의 카페 로 향하는 중이었다.

부우웅-

운전대를 잡고 가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얼마 전 뉴욕에 갔 을 때 일이 떠오른다.

‘어우, 유진 군이 너무 인기 많아서 얼굴 보기도 쉽지가 않네 요.’

···카네기홀 근처 숙소에서 하루 자고 난 다음 날 점심.

로렌 루먼 교수님과 만나 커피 한 잔을 마셨을 때 말이다.

‘원래는 리셉션장에서 얘기하고 싶었는데, 다른 교수님들 견 제가 얼마나 심하던지···.’

‘하하하.’

우리 쪽으로는 다가올 엄두를 못 냈다는 그녀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때 같이 있던-

‘···으, 어, 그러니까··· 유진, 어떻게, 로렌 루먼 작가님과?’

레너드 선생님은 나와 루먼 교수님이 구면이라는 사실에 마 시던 음료를 뿜을 뻔할 정도로 놀랐는데.

‘으, 아니, 이게, 와아아··· 의 연극화라니···!’

자초지종을 다 들은 뒤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가.

‘반갑습니다, 미스터 레너드. 로렌 루먼이라고 해요.’

‘와아, 저, 저는 레너드! 레너드 하인스입니다!’

···루먼 교수님과 통성명하며 인사할 때는 벌게지는 것이 아 닌가.

알고 보니 레너드 선생님은 <루나 그래피티>를 본 후로 루 먼 교수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는 모양이었다.

‘흐으, <루나 그래피티> 극본집이 집에 있는데···.’

못내 아쉬워하던 미스터 레너드는 결국, 자신의 핸드폰 뒷면 에다가 사인을 요청했다.

‘어, 여기에 사인을 해도 괜찮을지···.’

‘당연히 괜찮습니다! 영광이지요 하하!’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던 레너드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리자  슬그머니 웃음이 지어지는 가운데.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운전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 했다.

딸랑.

1층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가는데, 어쩐지 등  뒤로 시선이 느껴지는 기분이다.

어쨌거나 예약해둔 미팅룸 안에 들어서자.

“작가님—!”

미스터 케빈이 활짝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

아까 통화했을 때도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캐슬>의 저작권 딜 현황은 그야말로 고무적인 수준이었다.

‘40여 곳에서 입찰한 것도 그렇지만···.’

나는 눈앞의 보고서에 적힌 최고입찰액을 마주하고 잠시 두  눈을 깜박였다.

아무리 다시 봐도 이 숫자는···.

“200만 달러.”

한화로 25억이 훌쩍 넘어가는 어마어마한 금액에 내가 멍하 니 중얼거리자.

케빈 클레그가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쉽다고 생각합니 다.”

“아쉽다고요?”

“아 물론 절대적으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맞습니다, 하지 만···.”

출판계에서 7자리 숫자 딜은 생각보다 제법 있는 케이스이 며.

특히 이번처럼 빅파이브 출판사들이 모두 참여할 경우에는  선인세 금액이 천정부지로 높아지기 마련이라는 그의 설명.

“제가 평가한 이 <캐슬>의 잠재력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수 준이니까요.”

“···.”

“사실, 이 이상의 숫자가 나올 수도 있었습니다만 2백만 달 러 선에 그친 것은-”

케빈 클레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다른 권리를 함께 묶지 않고, 오로지 ‘미국 내 출판권’만 거 래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나는 그가 말하고자 한 바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 외의 권리까지 요구해온 출판사들이 있나 보군요.”

“맞습니다, 작가님.”

라이터스홈처럼, 출판권만 거래하려는 곳은 굉장히 양심적 인 에이전시다.

···대부분의 에이전시는 가능한 모든 권리들을 그러모아 선인 세의 ‘자릿수’를 최대치까지 높이려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자사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도 도움이 될 뿐 더러.’

에이전시의 손에 떨어지는 수수료 또한 커지기 때문.

그렇지만-

“저자를 위해서라면 모든 권리를 따로 거래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니까요.”

역시 믿을 수 있는 에이전트다운 말이다.

특히나 에곤 K처럼, 작가의 이름이 이미 어느 정도 알려진  상황에서는 더더욱 따로 거래하는 편이 맞으니까.

“그건 그렇고 여기, 빅파이브들에서 제안해온 것들을 보시 죠.”

미국 출판시장 파이의 80퍼센트가량을 대표하는 다섯 개의  거대 출판기업들.

이 다섯 개 중에서도 명실상부한 1위라 할 수 있는 펭귄랜덤 하우스는-

“미국 출판권의 경우 2백만 달러, 영상화 판권까지 묶어서  거래할 경우 7백만 달러라. ···묶어서 거래하는 건 따져볼 가치 도 없네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지금 벌써부터 온갖 제작사에서 영 상화 판권도 문의해오는 중인데.”

앞서 <피터팬> 때 입찰했던 대형 제작사들이 너나 할 것 없 이 관심을 보이는 것 보면-

“이 영화 판권만으로도 충분히 6~7자릿수의 옵션 금액을 체 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영상화 판권 딜은 앞서 <피터팬> 때 했던 것처럼  작품의 출간 직전에 오픈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것.

“저도 미스터 케빈 의견에 동감입니다. ···두 가지 딜이, 어느  정도 구분되어 진행되는 게 더 효과적일 테니까요.”

내 말에 씩 웃으며 말을 이어나가는 미스터 케빈.

“다음 건은 사이먼앤슈스터인데요, 여기서는···.”

이곳 또한 굴지의 출판 대기업.

사이먼앤슈스터는 미국 출판권만은 180만 달러, 영연방(영  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을 같이 거래할 경우 230만 달러를 제안했다.

‘이건 조금 애매한걸.’

미스터 케빈의 표정을 보니 그 또한 나와 비슷한 결론을 내 린 듯했고.

이후 비슷한 금액대의 제안 몇 개를 더 보다가, 맨 마지막 ‘ 리암홀트’라고 적힌 페이지에서 눈이 멈췄다.

“여긴··· 이름이 익숙한데.”

“아, 맥밀란 산하의 문학 전문 대형출판사입니다.”

아, 듣고 보니 기억났다.

기존의 유명 작가들뿐 아니라 시장의 저변을 넓힐 수 있는,  이른바 ‘새로운 가능성’에 대거 투자하기로 유명한 출판사 아 닌가.

‘책도 만듦새 있게 잘 만들기로 유명하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미스터 케빈의 설명이 이어졌다.

“리암홀트도 대기업 산하 출판사다 보니 상당한 선인세를 제 시했는데···.”

여기는 정말 딱, 미국 출판권만 2백만 달러라고 깔끔하게 제 안해왔다.

그러니까, 다른 것은 일절 탐내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보여준  것.

“그 외에도···.”

나머지 수십여 개 출판사에서 제시해온 금액과 조건들은 물 론.

주요 출판사들에 대한 미스터 케빈의 전문적인 조사 및 평가  결과를 전부 듣고 나자.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어느덧 두 시간이 흐른 것에 나와 미스터 케빈 모두 깜짝 놀 라고 말았다.

여하튼, 우리는 이 중 어느 곳과 저작권 딜을 진행할지 최종  의견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리암홀트···가 작가님의 선택이군요.”

리암홀트.

···대기업 산하인 덕분에 대규모의 자본력과 마케팅 수단을  갖춘 동시에, 유명 문학기자 출신의 편집장 제임스 베넷이 막 강한 독립권을 갖고서 목소리를 내기로 유명한 곳.

다른 어느 곳보다도, 나의 이 <캐슬>에 안성맞춤인 출판사 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네, 맞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하자, 미스터 케빈이 활짝 웃었다.

“안 그래도 저도 이곳을 추천드리려 했는데, 따로 설득할 필 요가 없어졌는데요?”

그의 말에 나 또한 하하, 웃음짓고 말았다.

*

이처럼 신작의 출간을 준비하는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비숍 작가님! 신작 출간 축하드립니다!”

···나의 우상, 랜든 비숍 작가님 또한 신작 장편 시리즈 <어둠  속의 방문자들> 1권 <그림자와의 조우>의 출간을 눈앞에 두 고 있는 상황.

그리고 나는, 비숍 작가님이 보내주신 증정본을 마주하고서  작가님께 전화를 건 참이었다.

-하하하, 목소리를 들으니 잘 받았나 보구만.

“그냥 잘 받은 게 아니라, 완전 감동했습니다 작가님.”

나는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채로 <그림자와의 조우> 면지를  펼쳐보았다.

[내가 본 그 누구보다도 빛나는 재능을 지닌 동료 작가, 유진 에게

-Landon Bishop]

친필 사인본이라니 이건 못 참지. 게다가···.

‘동료 작가라.’

불과 1년 반 전, 회귀한 직후만 하더라도.

다른 사람도 아닌 랜든 비숍 작가님에게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거다.

조금 잠기려는 목소리를 모른 척하며, 일부러 더 과장스럽게  말했다.

“진짜라니까요 작가님, 면지에 사인 있는 거 보고 눈물을 터 뜨릴 뻔···.”

-에이 이 사람, 호들갑도 적당히 떨게 하하.

비숍 작가님이 기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책은 자네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어.  내가 항상 감사하고 있네.

“제가 뭘 했다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비숍 작가님을 처음 봤을 때가 문득 떠 올랐다.

‘그때는··· 한창 슬럼프에 시달리셨다고 했지.’

이 시대에 한 획을 그은, 판타지와 과학소설의 거장.

그런 랜든 비숍이 다시금 집필에 매진하는 데 내가 조금이라 도 계기를 제공할 수 있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제겐 영광인걸요.”

진심을 담아 말하자, 핸드폰 저편에서 들려오는 작가님의 목 소리에도 웃음기가 배어난다.

-허허, 그것참 고마운 말이로군. 아 그렇고!

비숍 작가님은 전화를 건 진짜 용건을 입 밖에 냈다.

“TV쇼요?”

-그래. <티미 샐먼의 투나잇쇼>에 출연하게 됐거든. 티미 샐 먼 이 친구가 전부터 나와는 인연이 오래됐기도 하고···.

신작 홍보도 할 겸 겸사겸사 나가는 거란 말에 잠시 두 눈을  껌벅였다.

‘티미 샐먼쇼라니.’

미국을 대표하는 간판 토크쇼 방송에 신작을 홍보하러 나가 다니 과연 SF의 거장이구나 싶은 동시에.

“···티미 샐먼과 아는 사이시라고요?”

-아아, 10년 전에도 <투나잇쇼>에 출연했었거든.

그때 만남을 계기로 친해져 꾸준히 연락을 이어왔다는 말에  조금 감탄하고 말았다.

···비숍 작가님이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유명인사였는걸.

-그래서 말인데, 혹시 부탁할 건 없나? 에곤 K에 관해서 얘기 하고 싶은 거라든가.

“에이, 작가님 신작 홍보하러 나가는 자리인데···.”

-아니 아니, 정말로 편하게 말해보게.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비숍 작가님이 재촉한 끝에 나는 내심 고민하는 것을 입 밖 에 내었고, 작가님은 내 말을 이렇게 정리했다.

-그러니까··· 에곤 K를 너무 노인네로 받아들이지 않게 해달 라, 이 말이지?

···에곤 K의 정체에 관한 사람들의 오해가 너무 커지지 않도 록 해달라는 것이 그 요지였다.

“작가님 나오시는 방송, 생방으로 볼게요!”

비숍 작가님은 껄껄 웃으며 걱정말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 었다.

“TV쇼라니, 와.”

방송에 얼굴을 비추는 게 부럽다기보다는, 비숍 작가님의 영 향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그리고 이내-

‘···1권이 이렇게 빨리 출간되다니!’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림자와의 조우>를 집어들었 다.

[어둠 속의 방문자들 트릴로지 #1

그림자와의 조우

랜든 비숍 SF 장편소설

SFF프레스 출판]

제법 두툼한 책의, 홀로그램박으로 반짝거리는 표지가 몹시  근사하다.

···척 봐도 고급스럽기 그지없게 만들어진 이 특별 소장판본 은 SFF프레스에서 발행한 것.

‘이번 주말은 이 책과 함께해야겠네.’

<캐슬>의 집필을 마친 뒤로 나는 간만에 완벽한 독자가 되 어 맘 편히 독서를 즐기는 중이었는데.

안 그래도 주말에 무얼 읽을까 고민하던 차, 이렇게 완벽하 게 취향에 맞는 책이 나타나주다니.

“흐흐, 신나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책의 첫 장을 펼치자, 헌사 페이지에  적힌 문구가 내 두 눈을 사로잡았다.

[독자가 아닌 이는 단 한 번의 인생을 살지만.

독자는 수백, 수천의 인생을 산다.

지금 이 책을 집어든 당신 또한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게 되 리라는 것을, 나는 마음 깊이 확신한다.

-랜든 비숍]

“···.”

자연스레 자세를 고쳐 앉은 채.

나는 <어둠 속의 방문자들> 시리즈의 주인공, 토드 칼슨이  될 준비를 마친 채 다음 장을 넘겼다···.

*

제법 한가롭게 지낸 뒤, 그주 금요일 저녁.

네드와 아델은 비숍 작가님이 출연하는 <티미 샐먼의 투나 잇쇼>를 함께 보기 위해 우리 집에 와 있었다.

“우와, 기사 장난 아니게 쏟아지네.”

그리고 지금은, 내 방 책상 앞에 붙어 앉은 채 노트북 화면으 로 <캐슬> 관련 기사를 잔뜩 검색하는 중.

[에곤 K의 신작 <캐슬>, 원고 상태에서 저작권 딜 오픈··· ‘열 기 후끈’]

[에곤 K <캐슬>의 저작권 딜에 40여 곳이 참여, 치열한 경쟁  속 승자는 누구?]

[‘출판 공룡’ 맥밀란 산하의 리암홀트, 에곤 K <캐슬>의 최종  입찰사 되다!]

[에곤 K 신작, 리암홀트와 일곱자릿수의 선인세 딜 체결···]

···

기사를 하나 하나 읽어볼 때마다 네드와 아델의 눈이 튀어나 올 듯 커진다.

너무 놀랐는지 한동안은 아무 말도 못하다가, 멍하니 나를  돌아보는 네드.

“유진.”

“응?”

“너 이러다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고등학생 10명 중 하 나로 꼽히고, 뭐 이러는 거 아니냐?”

“···뭐래.”

이 정도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평범한 고등학생의 시선으로 보기엔 어마어마한 금액이 맞 긴 하다.

아델은 본인이 다 흥분해서인지, 두 뺨이 발그레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으으, 유진. 나 늘 입이 어엄청 근질거리는 거 알아?”

“몰랐는데.”

“흐으, 모르긴 뭘 몰라. 이 에곤 K가 바로 내 친구라고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다 는 말에 웃음이 절로 나오는 가운데.

우리의 화제는 자연스레 <캐슬>에서 <토끼 남작>으로 이 어졌다.

···즉, 영국판 <토끼 남작>의 초판이 이미 다 매진됐다는 것.

“우와, 엄청나···! 너희 나중엔 영국에서도 출간 행사하는 거  아냐? 영국 출판사가 초대한다든가.”

“어어, 진짜 그럴 수도 있겠네?”

아델의 말에, 미국 밖으로 한 번도 나가본 적 없다는 네드가  두 눈을 빛내는데.

“글쎄, 잘은 모르지만··· 영국판도 이렇게 잘 나가는 걸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 아닐까.”

“오오오!”

“으아, 영국이라니 나도 가고 싶다···.”

둘이 벌써부터 영국행이 확정된 것처럼 굴던 그때.

핸드폰이 지잉- 진동하며 ‘로렌 루먼’이라는 이름이 화면에  떴다.

“루먼 교수님, 잘 지내셨어요?”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전화를 받자, 전보다 친근한 느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유진 군도 잘 지냈어요?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요. 다름이  아니고, 오늘 전화한 건···.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본론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

그것은 다름 아닌, 연극 의 공식 공연일정이 확 정되었으며.

-유진 군 일정만 괜찮다면, 뉴욕에서 진행될 리허설에 초청 하고 싶은데요.

내가 원작자로서 의 리허설에 참가해, 수정할   부분이 있는지 최종 점검차 함께 봐주면 좋겠다는 요청이었다.

‘···AI 데이지를 무대 위에서 벌써 보게 되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너무도 반가운 소식이었기 때문일까.

“물론이죠, 교수님. 영광입니다.”

한 박자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하자, 스마트폰 저편에서  안도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164화.

리더인 영원의 부름에 필구가 흠칫하며 멈춰 섰다.

영원의 분위기가 뭔가 평소와 다른 것도 같다.

혹시, 나 혼나는 건가.

필구가 쭈글거리며 그대로 뒷걸음질 쳐 영원의 앞에 섰다.

“뭐야, 우리 멍뭉이 혼내려고? 이영, 살살 해.”

막 나가려던 수진이 그 광경을 보고 키득거리며 한마디 던졌다.

그러자 유현이 수진의 허리 언저리를 콱 꼬집었다.

“유수진, 제발 눈치 챙겨.”

“으악. 형, 나 거기 민감해.”

“허리? 왜?”

“아, 그런 이유가 있어! 떽!”

수진이 방금 꼬집힌 자리를 손으로 슥슥 문지르며 얼른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설은 마지막까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영원과 필구를 슬쩍 쳐다보곤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영원은 다른 멤버들이 모두 나간 걸 확인한 뒤에야 필구와 눈을 맞췄다.

“필구야, 왜 그렇게 서 있어? 편하게 앉아.”

“엇, 어어. 저 앉아도 돼요?”

“당연하지. 내가 언제 너 못 앉게 한 적 있어?”

영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얘, 누가 보면 내가 그동안 너 쥐 잡듯 잡은 줄 알겠다.

필구가 정말로 비 맞은 생쥐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긴 하다만.

그러게 이럴 거면서 뭘 그렇게 대들었어.

영원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필구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필구야, 아까 내가 그렇게 단호하게 말한 건 네가 미워서가 아니야.”

“네? 네에.”

“다른 멤버들 앞에서 우리 막내 기죽이려고 그랬던 것도 아니고.”

“그, 그럼요…?”

필구가 금방 촉촉해진 눈빛으로 영원에게 되물었다.

영원은 해탈한 듯한 보살 미소를 지으며 슬쩍 턱을 괴고 무심하게 답했다.

“뭐, 굳이 따지자면 회사에 대한 강력한 의견 어필.”

“강력한… 의견 어필이요?”

“쉽게 말하자면, 생색낸 거라고.”

영원이 상큼하게 웃으며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내가 우리 멤버들한테 이렇게까지 강하게 몰아붙여서, 회사의 리드에 따르고 있으니까. 그만큼 제대로 된 프로듀싱 결과물을 가져오라는 거지.”

“앗? 아아.”

“거기다 혹시 우리 막내가 메인 프로듀서의 말에 반항한다거나, 삐딱 선을 탄다는 말이 나올까 봐 미리 선수 친 거기도 하고.”

“그렇군요….”

“원래 사람 여럿이 모여서 알력 다툼을 하는 곳에서는 소문이 언제 어떻게 날지 모르거든.”

영원의 깊은 뜻에 필구가 그제야 마음이 풀린 듯 민망하게 웃었다.

여전히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고.

필구는 소매 끝으로 눈가를 슥슥 닦아냈다.

“필구가 쓴 곡으로 활동할 수 없어서, 나도 진짜 안타까워.”

“흐잇.”

“우리끼리 있어서 솔직하게 하는 얘기지만, 빌보드에서 이름 날린다는 작곡가들보다 우리 필구 곡이 더 기대되기도 하고.”

영원은 일부러 필구를 더욱 부둥부둥 추켜세워 줬다.

그러자 필구는 방금 전 눈이 벌게지도록 울었던 것도 잊은 듯 금방 씨익 웃었다.

[임무 알림] 정필구 행복 지수 8점 돌파!

순간, 영원의 눈앞에 임무 알림창이 떴다.

그러나 사실 지금 영원은 임무 같은 건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임무창을 치워버리려는 듯 한 손으로 양쪽 눈을 쓱 눌러 닦아냈다.

잠깐 방해 좀 하지 말아 봐요.

나 필구랑 중요한 얘기하는 중이야.

“지금은 우리 초반 기세를 몰아서 계속 치고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했어. 병법에서도 군사들의 기세가 좋을 때 파죽지세로 밀고 가야 한다고 가르치거든.”

“벼, 병법이요?”

“응? 아니, 말이 그렇다고. 아하하하.”

“하여간 옛날 얘기 진짜 좋아해요, 리더. 우리 동네 할아부지들 같아.”

“그,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그냥 동양 고서에 조예가 깊다고 해두자.”

영원이 저도 모르게 세자 수업 때 들었던 내용을 인용하곤 멋쩍게 웃었다.

아이, 참. 현실에 적용할 만한 사례나 가르침이 병법에 얼마나 많은데.

이걸 멤버들 붙잡고 가르쳐 줬다간 또 꼰대 할아범 소리 듣겠지?

“아무튼, 속도를 올려서 한 곳을 파고들어야 하니까, 우리는 다른 일에는 신경을 끄고 활동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판단이야.”

“네에, 저도 리더 말이 뭔지 이해는 해요. 흐음.”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이 안 따라준다는 거지?”

“맞아요! 정확해요! 어떻게 제 마음을 그렇게 잘 알아요?”

필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원에게 물었다.

영원은 푸흐흐, 웃으며 손을 뻗어 필구의 구불구불한 웨이브 헤어를 슥슥 문질렀다.

“나는 우리 멤버들한테 온 신경이 쏠려 있으니까, 알 수 있지.”

“흐이.”

“필구야.”

“넵. 리더.”

“마음이 생각처럼 되면, 사는 게 너무 재미없지 않겠어?”

“흐음. 어렵네요.”

“쉬운 예시를 들어볼까. 수진이나 정윤이가, 내가 말하는 대로 모두 따른다면 우리 팀이 재미가 있을까?”

“으익. 상상도 안 돼요.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되면, 지인짜로 재미없을 거 같아요!”

필구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소리치듯 답했다.

영원은 여전히 그런 필구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다.

“그러니까 필구가 지금 속상한 것도 나는 다 이해해.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 럴까요?”

“응.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런 마음을 품고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필구도, 나는 기대하고 응원해.”

“앗.”

“성장통이겠지? 아휴, 우리 필구 갑자기 쑥쑥 자라서 나보다 커지면 어떻게 하나.”

영원이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말하며 필구의 어깨를 다독였다.

필구의 얼굴이 상기되며 세상에서 가장 씩씩한 표정으로 금세 바뀌었다.

“저 결심했어요!”

“응? 뭘?”

“잘나가는 프로 작곡가들은 곡을 어떻게 쓰는지 이번에 제대로 배울래요! 그래서 다음에 다시 제가 우리 팀 곡을 만들게 되면 더 잘 만들 거예요!”

필구가 양 주먹을 꼭 쥐고 본인의 무릎을 쿵 치며 말했다.

어이쿠, 몇 분 만에 벌써 성장했네.

역시 10대 성장기는 다른가.

영원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일부러 진지한 척하는 표정을 지었다.

“좋아, 나도 우리 필구, 다음 곡 기대할게.”

“기대해주세요!”

필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순간, 다시 한번 임무 안내창이 떴다.

[임무 알림] 정필구 행복 지수 10점 안착!

필구야, 너 지금 진짜 행복하구나.

멤버의 행복을 두 눈으로 확인한 것 같아 내심 뿌듯하고 흐뭇한 영원.

역시 아이돌 그룹의 리더는 멤버들이 행복해하고 팬들이 기뻐할 때가 가장 보람찬 법이지.

아아, 세자의 보람과는 또 다른 길이로다.

그런데 왜 또 미션 성공창이 안 뜨지.

“아직 덜 행복한 자가 남았단 말이냐.”

영원이 웅얼거리듯 말하자, 필구가 머리 위에 커다란 물음표 하나를 띄웠다.

“네? 리더? 뭐라고요?”

“응? 아냐. 필구 먼저 연습실 가 있어. 나도 금방 갈게.”

영원은 의아해하는 필구를 서둘러 쫓아내곤 문에 등을 바짝 기대고 섰다.

그리고는 입술을 꿈틀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누가 행복하지 않은지는 알려줘야 임무를 수행할 거 아니오? 임금이 신하에게 임무를 내릴 때도 이렇게 모호하게는 말하지 않거늘.”

영원이 떨떠름한 말투로 투덜거리자, 오랜만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하하하하하.

“지금 웃음이 나오나요.”

-웃기잖아. 세자가 투덜거리는 거. 웃음이 안 나오겠어?

여전히 축축 늘어지는, 나른한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영원의 뇌리에 감겨들었다.

그러나 영원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심기가 불편한 듯 눈썹만 움찔했다.

“우리 멤버들 중에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남았다는데 어떻게 웃음이 나와요?”

-아, 그게 또 그렇게 되나. 뭐, 그럼 일단 웃어서 미안하다고 해둘까.

약 올리는 듯한 ‘목소리’에 영원의 표정이 더 싸늘하게 식었다.

필구야 본인이 하고 싶던 작곡 롤을 빼앗겼으니 잠시 행복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겠다만, 다른 멤버라면 말이 다르다.

혹시 영원에게 말하지 못한 고민이나 불행을 안고 있는 멤버가 있을까.

아니면, 아까 일단 영원의 의견에 동의하는 듯했던 설이… 내심 불만을 품고 있는 걸까.

맏형이라는 무게감 때문에 쉽게 반대하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영원이 리더로서 좀 더 넓고 깊게 살피지 못한 게 되는데.

“하아.”

영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곤 똑바로 앞을 노려보며 말했다.

“말로만요?”

갑자기 변한 영원의 분위기에 목소리도 조금은 당황한 듯하다.

-으응?

“웃어서 미안하다면서요. 말로만?”

-아아. 내가 또 내 무덤을 팠네. 우리 세자 저하는 협상의 달인인 걸 내가 자꾸 잊는단 말이지.

영원의 말뜻을 이제야 이해한 목소리가, 다시 웃음기가 묻어나는 여유로운 말투로 받아쳤다.

이영원한테는 빌미를 주면 안 된다.

바로 이렇게 잡아먹히거든.

목소리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무장 해제한 것 같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래서 이번엔 받고 싶은 게 뭔데?

“멤버들의 행복 지수.”

-어떤 멤버?

“전부 다요.”

-크하하하핫!

영원의 당돌한 대답에 목소리가 기절할 듯이 웃었다.

그러나 영원은 이번에도 어디까지 웃을지 보자는 듯 입안에서 혀를 도록도록 굴리며 가만히 기다릴 뿐.

목소리는 그 뒤로도 얼마간 더 웃다가 갑자기 웃음을 뚝 멈췄다.

-너무하잖아. 작은 꼬투리 하나 잡아서 이렇게 덤탱이 씌우는 건.

“그럼 그렇게 변태처럼 어딘가에 숨어서, 내가 다시 사는 걸 지켜보는 건 안 너무한가요.”

-하아, 할 말 없게 만든다니까.

영원의 빈틈 없는 압박 수비에 목소리가 다시 한번 너털웃음을 지었다.

졌다, 졌어.

이번엔 내 실수다.

-좋아. 현재 행복도 만점인 정필구를 제외하고, 나머지 멤버들의 행복도를 알려주면 되는 거지?

“예.”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후회요?”

-으응. 예상치 못한 멤버가 혹시 지금 불행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하면, 충격받지 않겠어? 어쩌면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아아.”

목소리의 부연 설명에 영원이 이미 헝클어진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슥슥 빗어 단정하게 정리하며 애매한 리액션을 했다.

그러자 오히려 애가 닳는 건 목소리 쪽이 됐다.

-최악의 경우에는, 정필구 빼고는 모든 멤버의 행복도가 제로일 수도 있다고.

계속되는 목소리의 도발에도 오히려 영원은 태연하게 씨익 웃었다.

이야, 웬만큼 기가 세다는 인간들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만나 봤지만 이영원은 급이 다르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저런 미소를 지을 수가 있나.

목소리는 오히려 영원에 대한 흥미가 한껏 끓어올랐다.

관찰대상으로 딱이야.

“그럴 리가요.”

-뭐가?

“우리 멤버들이 그런 상황에 있는데도 나한테 한마디도 하지 않을 리가요.”

-뭘 믿고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나.

“당연히, 멤버들이죠.”

-아하하하. 당돌해, 당돌하구나.

“그러니까 빨리 말해주세요. 시간 없어요.”

기세 좋은 영원의 재촉에 목소리가 키득키득 웃으며 응했다.

-좋아. 우선 간부터 볼까. 현재 가장 행복도가 낮은 멤버의 점수부터 알려주지.

“간잡이도 아니고요. 높은 분 같은데, 치사하시네.”

-도발에 넘어가는 건, 오늘은 한 번뿐이야. 그렇게 긁어도 안 먹힌다고.

“흐음.”

-보자아, 현재 행복도가 4군.

“4요?”

영원이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으나, 사실 조금 충격적인 점수이긴 했다.

절반에도 못 미치는 행복도라니.

혹시 누구일까.

지금 이 함정에 빠져 있는 나일까.

“그거, 저인가요?”

-그럴 리가.

명쾌한 목소리의 대답에 영원은 더욱 미궁으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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