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103화 (103/126)

어머니인 동시에 딸인(1)

*

이처럼 유진 일행이 비행기를 타고 맨해튼시어터클럽으로 향하던 그때.

그들의 목적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역시 뉴욕에 위치해 있는 대형출판사 리암홀트는 몹시도 열정적인 분위기였다.

“좋아, 곧바로 미스터 클레그에게 연락하자고.”

“계약서 초고 작성했어? 법무팀에 보내서 체크 확실하게 하고, 그대로···.”

최상층 제일 안쪽에는 편집장실이, 그 바로 앞에는 편집부가 위치한 가운데.

“자, 이쪽으로 오시죠 작가님.”

문학1팀, 마커스 스톤의 담당 편집자 닉이 그를 근처의 미팅룸으로 안내했다.

마커스 스톤.

이라크전 참전 경험을 담은 첫 작품 <여우굴>로 펜헤밍웨이 문학상을 수상한, 이제는 제법 상당한 인지도와 팬층을 자랑하는 젊은 작가.

탁, 미팅룸 문이 닫히는 것을 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오늘 따라 에너지가 넘치는 느낌인데요.”

“그렇죠?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캐슬> 때문이죠?”

“오, 어떻게 아셨어요?”

짧게 깎은 머리 때문에 동그란 두상이 한층 돋보이는, 마커스가 제 머리를 습관처럼 손으로 빗어넘겼다.

“하하, 제가 사실은 에곤 작가님 팬이라.”

“아 맞다, 언젠가 인스타에도 올리신 적 있죠?”

그 말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마커스.

한때 이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조차 본 적이 없었다.

마커스가 과거 샌포드 에이전시 에 소속돼 있을 시절, 에이전트 캠벨이 출판사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막았기 때문.

‘그런 건 에이전트가 하는 거라고. 작가는 작품에 집중해야지.’

하지만 이제, 케빈 클레그와 에이전트 계약을 맺은 지금은 달랐다.

‘오히려 저는 미팅을 해보시길 적극 추천드립니다. 물론 작가는 자신만의 글을 쓰는 게 맞지만···.’

또 한편으로.

업계 최전방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것 또한 작가에게 새로운 영감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런 고로, 딱히 신작 원고가 준비된 것은 아니었지만.

뉴욕 작가협회의 초청을 받아서 오게 된 김에 겸사겸사 편집자와 미팅을 하게 된 것.

맨 처음 만날 때만 해도 마커스는 조금 어색해했지만-

‘와, 드디어 이렇게 마커스 작가님을 뵙게 되다니!’

마커스의 전작 <전선의 끝에서>의 책임편집을 맡았던 담당자 닉은 감개무량해하는 눈치였다.

‘사실 그때, <전선의 끝에서>를 진행할 때 개인적으로 너무 아쉬웠거든요. 저는 수정본 말고 처음 주셨던 원고가 너무 좋았는데, 작가님과 소통할 길이 없어서···.’

‘아마 초고 버전 그대로 진행했다면, 저희가 원래 기대했던 대형 프로모션도 충분히 받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작품은 저와 아이디어 단계부터 함께 열심히 진행해보시죠!’

애정과 진심이 느껴지는 말들 덕분에, 마커스 스톤은 이 초면의 편집자에게 빠르게 마음을 열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 뉴욕을 떠나기 전, 한 번 더 만남의 자리를 가지게 된 것.

“근데 작가님, 디모인으로 이사가신다는 건 계획이 잡힌 건가요?”

“아, 네. 아마 다음 달에 바로 갈 것 같아요.”

디모인의 드레이크대학에서 MFA과정을 무료로 수강하게 해주는 것은 물론.

마커스 스톤이라는 이름을 홍보에 사용하게 해준다는 조건 아래 근처 숙소까지 제공해주기로 했으니까.

“그쪽에 형네 부부가 사는데, 이 참에 자주 왕래도 하고 조카랑도 놀아줄까 싶네요 하하.”

“오, 잘됐네요. 중서부라, 그쪽은 한 번도 안 가봤는데···.”

그새 부쩍 친해진 덕분에, 오래된 사이처럼 자연스레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

화제는 자연스럽게 <캐슬>로 이어졌다.

“리암홀트에서 <캐슬> 낙찰받았다고 다들 난리던데요.”

마커스의 말을 반갑게 받는 편집자 닉.

“하하, 솔직히 저희는 가망이 없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펭귄 쪽에서 7백만을 불렀다고 해서.”

“헉, 7백만이요?”

“네, 어마어마하죠? 물론 그쪽은 영화판권을 합친 거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워낙 엄청난 금액이라.”

그에 반해, 리암홀트는 정말로 딱 소설만 출간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것.

“근데 그게 유효했던 건지, 저희를 택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네요.”

여튼 덕분에 직원들 모두가 엄청 들떠 있다- 라고 말하려던 순간.

‘아차.’

편집자 닉은 이내 아차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마커스 작가님을 앞에 놓고 다른 작가 얘기를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으니까.

하지만-

“하하, 에곤 작가님은 언제나 진심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니까요. 닉도 이거 봤어요? 이게 요즘 에곤 K 서브레딧에 올라온 글인데.”

오히려 마커스는 그런 화제가 몹시 기껍다는 듯 진성팬다운 화제를 꺼냈다.

그가 보여준 것은 바로 얼마 전, 네드와 아델이 보고 기겁했던 ‘에곤 K가 알고 보니 고등학생?’이라는 게시물이었다.

“으흐흐, 에곤 작가님이 고등학생이라니.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진짜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아! 저희 편집부에서도 이거 봤어요.”

다들 엄청 웃었다는 편집자 닉의 말에 마커스가 웃음을 터뜨리자, 닉이 덧붙였다.

“고등학생은 너무 나간 것 같지만··· 에곤 작가님이 진짜로, 완전히 예상 밖의 모습이라면 재밌을 것 같긴 해요.”

“아, 여성작가라든가 알고 보면 유명인이었다든가.”

“아하하, 그렇죠, 다들 엄청 놀랄 것 같은?”

그러면서도 두 사람 모두, ‘고등학생일 리는 없다’라고 굳게 믿는 가운데.

“마커스 작가님은 에곤 작가님과 개인적인 연락도 하신다고 들었는데.”

“그럼요, 이것.”

마커스가 이내 자랑스럽게 보여준 것은 바로-

“오, 걸음수 체크앱이네요.”

“저랑 에곤 작가님이 1~2주 간격으로 한 번씩 서로 체크해서 사진을 보내거든요.”

매일 얼마나 걸었는지, 얼마나 운동했는지를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

“이야, 작가님도 운동 열심히 하시네요. 하긴 체격도 워낙 좋으시니까.”

“하하, 뭐 그렇긴 한데 저보다 에곤 작가님이 더 열심이시더라고요. 전에 큰 병을 앓으셨던 모양인지···.”

그런 얘기를 하던 두 사람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런 것 보면, 50대 초중반 정도가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무리 그래도 비숍 작가님 동년배면 그렇게 왕성하게 작품 활동 하실 수가 없죠.”

“하긴.”

랜든 비숍이 적극적으로 오해를 해명하려고 나서준 덕분에 예상 연령대는 어느 정도 깎을 수 있었지만.

유진이 원하던 효과까지는 달성하지 못한 듯했다.

···그리고 이 같은 추측은 업계의 다른 곳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는데.

영화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이후로 팔로워 수가 급증한 감독 막성스 라미.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이런 게시물이 올라왔다.

[@_Maxence_La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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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K를 SD 캐릭터로 만든 굿즈 인형을 영화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포스터에 올려놓은 사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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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ence_lamy

[에곤 작가님이 고등학생이라니 ㅋㅋㅋ

여기저기서 기상천외한 추측이 쏟아져 나오는데 너무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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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자면.

에곤 K를 ‘우리 작가님’이라고 부르는 몇 안 되는 곳인 출판사 SFF프레스에서도 한창 이 얘기로 난리였다.

“하,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다같이 모인 자리에서 그 화제가 나오자, 딱 잘라 말하는 해리슨 편집장.

“아무리 그래도 우리 에곤 작가님이 고등학생이라는 게 말이 돼? 무리수도 적당히 던져야지.”

그러자.

그때껏 조용히 있던 빅토리아 첸 팀장이 입을 열었다.

“글쎄, 고등학생이라. 그래도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지 않나?”

“빅토리아,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렇잖아. 언제 에곤 작가님이 우리의 예상대로였던 적이 있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는 해리슨을 보며 진지하게 말을 잇는 빅토리아 첸.

“일반인들의 예상 범위를 벗어나는 천재라는 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는 법이라는 거지.”

물론, 지금껏 이 출판계에 그런 유의 천재가 드물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말에 일견 수긍하면서도 해리슨은 입을 비죽였다.

‘그래도, 에곤 작가님은 다르다고.’

무게감 있는 문체며 오랫동안 다듬어온 문장도 그렇지만.

어떻게 고등학생이 그 정도의 사유를 작품 속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왜, 아예 열 살짜리 여자애라고 하지 그래.”

“뭐 그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책상에 산처럼 쌓아 올려진, <캐슬>의 프린트 원고를 보며 말을 잇는 빅토리아.

“그보다는 고등학생이라는 쪽이 훨씬 더 가능성이 높겠지.”

“하, 말도 안 된다니까. 진짜 내가, 어? 우리 에곤 작가님이 고등학생이면-”

해리슨 편집장은 자신의 보물들을 모두 내놓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기까지 했다.

언젠가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하다 했던 영화 <백투더퓨처>의 초기 한정판 드로리안 피규어.

<스타트렉>의 USS 엔터프라이즈 레어에디션 등등···.

“···뭐, 그러든가.”

딱히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빅토리아 첸이었다.

*

몇 시간 뒤.

유진 일행은 뉴욕 공항에 도착해 숙소로 이동해 짐을 풀었고.

곧바로 진짜 목적지, 즉 맨해튼 웨스트 55번가에 자리한 뉴욕 시티센터로 향했다.

[맨해튼 시어터 클럽]

오랜 역사가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 앞에서 감탄하는 것도 잠시.

“으, 으어어··· 진짜 로렌 루먼이잖아!”

“진짜로, 저 로렌 루먼이 를 각색했다고?”

“잠깐만, 저기 유진이···.”

“둘이 되게 친해 보이는데?”

문예창작클럽 학생들은 유진이 로렌 루먼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에 1차로 충격을 받았고.

또 한편으로는-

“으어어어, 루, 루먼 교수님. 이렇게 또다시 뵙게 돼서, 진심으로···.”

클럽활동 내내, 매사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모습을 보이던 담당고문 레너드.

“아,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미스터 레너드.”

“저, 저도, 마찬가지입···.”

그가 로렌 루먼 앞에서 성공한 팬, 아니 덜 떨어진 팬처럼 구는 모습에 2차로 충격을 받았다.

여하튼.

로렌 루먼은 이번 연극의 감독을 맡을 연출가를 소개했다.

겉늙어 보이는 외모에 미간의 주름, 안경 따위가 조금 깐깐한 인상을 준다.

“제 전작들, <루나 그래피티>와 <칼레이도스코프>를 감독하신 릭 그로브 연출가입니다. 대중에는 영화 <12인의 비밀>의 각본가로 더 유명하지만요.”

“···!”

그 말에 학생들과 레너드 하인스의 눈이 또 한 번 빛나는 가운데.

릭 그로브가 자연스레 배턴을 이어받았다.

“하하, 반갑군요 여러분. 다들 멀리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리허설에 들어가기 앞서 간단한 미팅을 하기 위한 건데···.”

리허설은 내일 오전.

오늘은 전반적인 무대 연출과 극본, 배우 캐스팅에 대한 설명이 있을 예정이라는 것.

사실 여기에는 유진만 와도 충분했지만.

미스터 레너드를 비롯, 나머지 학생들 모두 동행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주시면 감사한 마음으로 경청하겠습니다.”

편히 의견을 달라는 연출가의 말에 다들 잔뜩 들떠 있는데.

“후우, 저, 늦은 건 아니죠?”

“···!”

매니저로 보이는 인물을 대동하고 온 어느 여성의 등장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깐만, 저 사람은 설마?’

화려한 금발에 고전적 이미지의 이목구비, 훤칠한 키와 모델처럼 완벽한 체형.

일부러 수수한 차림을 고집했지만 타고난 카리스마를 감출 수 없는-

“소개할게요, 여러분. 일인극 의 주연을 맡은 젬마 도노반입니다.”

“···!”

긴가민가하던 사람들이 로렌 루먼의 말에 경악하고 말았다.

젬마 도노반이 누구인가.

영화 거장이라 불리는 데이빗 도노반과, 한 시대를 풍미한 대배우 마거릿 도노반의 딸로 유명한 헐리우드 2세.

본인 또한 엄청난 수의 팔로워를 자랑하는 셀러브리티이자, 유명 배우 겸 모델 겸 영화제작자.

문학과 예술에도 관심이 많은 것으로 유명해, 얼마 전 스콜라스틱 시상식에서는 직접 진행을 맡았을 뿐더러.

“젬마 도노반이면··· 그때 그, 인스타에 에곤 K 팬이라고 올렸던-”

“야, 젬마 도노반을 그런 식으로 기억하는 인간이 어딨냐.”

제이든의 말마따나, 얼마 전 에곤 K의 팬임을 자신의 SNS에 대대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미쳤다··· 젬마 도노반을 직접 보다니.”

“눈부시네 눈부셔.”

이처럼 모두가 그녀처럼 어마어마한 유명인사가 이 자리에 왔다는 사실 그 자체.

더 나아가서는 의 주연을 맡는다는 것에 말도 못할 정도로 놀랐지만-

‘···일인극이라고?’

이 연극의 원작자인 권유진만이 다른 부분에 주목했다.

일인극이란 배우 한 명의 모놀로그로 모든 진행이 이루어지는 연극의 한 장르.

장르 특성상, 배우와 관객 사이에 강렬한 유대감이 생기기 쉽고 덕분에 관객들이 더 깊이 몰입하게 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배우 한 명의 기량에 모든 것을 걸고 가는, 도박에 가까운 시도이기도 해.’

그런 만큼 난이도와 리스크가 높지만, 성공했을 때의 그 효과 또한-

‘일반적인 연극에 비해 배가되기 마련.’

를 젬마 도노반의 일인극으로 끌고 간다니.

···생각지도 못한 발상에 유진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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