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107화 (107/126)

워커홀릭(1)

*

유쾌하게 시작해 광란의 분위기로 마무리된 홈파티 이후.

나는 연극 의 정식 개막을 향한 기대감을 가득 품은 채 귀갓길에 올랐다.

시더래피즈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 아버지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유진_권 : 아버지 저 이제 공항에서 출발해요]

잠시 주저하다가 그다음 메시지도 작성했다.

[유진_권 : 그리고 언제 한 번 한국 가게 되면]

[유진_권 : 같이 엄마 보러 가요]

···꽤 오랫동안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만.

이제는 엄마의 무덤에 들러 제대로 인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로부터 한 30초쯤 지났을까.

아버지의 답은 생각보다 빠르게 왔다.

[아버지 :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구나. 엄마도 아주 좋아할 거야.]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엄마를 입에 올리는 것을 덜 힘들어하는 듯했다.

‘이건 내가 를 쓴 덕분이라고 봐도 무방하려나.’

그래, 이렇게 조금씩.

어떤 형태로든 우리 곁에 함께하는 어머니의 존재를···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

그런 결론을 내리며 택시 시트에 기댄 채 눈을 감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깃들었다.

*

연극 의 리허설을 보러 뉴욕에 다녀오고 나자.

어느새 회귀 이후 두 번째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학교는 늘 이때쯤 겨울방학을 하곤 했는데,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맙소사, 11학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겨울방학이라니, 이게 말이 돼?”

“그러게··· 그동안, 딱히,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에···.”

“너희 둘, 이번 학기 시작될 때도 똑같이 말하지 않았어?”

이번 방학 때는 기필코 뭔가 하나를 해내겠다는 미아와.

늘 열심히 하면서 이번에는 더더욱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는 샬롯.

“난 이번 방학 때 제대로 진학 준비 좀 해보려고.”

“유진, 잠깐 이것 볼래? 혹시 니가 아는 에이전시인가 해서···.”

문예창작과 진학을 위해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해보겠다는 제이든.

자가출판한 소설 <다중세계에서 들려온 멜로디>에 관한 출판 에이전트들의 답신이 오고 있다는 것에 신이 난 로완까지.

다들 각자의 할 일을 찾아 나가는 가운데-

나는 나대로 정신없는 일정이 준비돼 있었다.

‘일단은 <캐슬>의 퇴고가 최우선.’

초고를 덮어놓은 지도 시간이 제법 지난 만큼, 이제는 퇴고를 시작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얼른 퇴고하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했지.’

미국의 청소년 문학 대가라고 불리는 작가 로버트 코마이어.

그는 퇴고에 관해 이런 말을 남긴 바 있다.

[글쓰기가 멋진 것은, 뇌 수술과는 달리 반드시 처음부터 완벽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

···사람의 뇌를 다루는 것과 달리 글이라는 것은 얼마든 해체하고 갈아끼워도 되는, 실로 편리하기 그지없는 도구인지도 모르겠다.

방학이 시작된 바로 그날.

나는 오전부터 노트북 앞에 앉아 <캐슬>의 원고 파일을 열어보았다.

‘뭐랄까,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그동안 보지 못한 애인을 드디어 만나기 직전처럼 잔뜩 고대되던 기분은-

“···.”

첫 챕터를 열어본 순간 조금 가라앉았다.

‘음, 내가 이렇게··· 거칠게 써뒀구나.’

중간중간 문법이나 구문상의 오류, 오탈자 실수는 말할 것도 없고.

문장 전반이 확실히 러프한 느낌이 많이 든다.

“···그래도 뭐.”

달칵, 주르르륵-

마우스 스크롤을 내려가며 빠르게 살펴보고 있자니.

벌써부터 이 날것의 원고를 어떻게 수정하면 좋을지 머릿속에 그림이 차르륵 그려진다.

‘이 정도면 충분히 다듬을 수 있어.’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는 명문을 남긴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를 40번 가까이 고쳐 썼고.

<앵무새 죽이기>의 하퍼 리는 이 작품의 수정에 무려 2년을 매달렸다고 했다.

그것에 비하면-

“내가 하는 퇴고 정도야 뭐, 아무것도 아니지.”

퇴고가 소설의 완성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에는 그 어떤 작가라도 동의할 것이다.

다만, 어느 정도의 퇴고를 진행할지에 관해서는 각자의 의견이 다를 텐데.

누군가는 아예 뿌리부터 들어내서 ‘다시 쓰기’에 가까운 방법을 선호한다면.

누군가는 에피소드 순서까지 바꾸는 식의 적극적인 수정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문법적 오류와 철자, 구문 같은 부분만 건들고 이야기의 얼개 자체는 건드리지 않는 소극적인 개입을 선호할 터다.

이는 작가의 스타일에 따라서 굉장히 달라지는데, 내가 선호하는 퇴고 방법은-

‘바로 내가, 이 <캐슬>의 담당 편집자라고 생각하는 식이지.’

편집자 입장에서의 1교와 2교, 3교를 나눠서 진행하는 것.

물론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아무리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직접 쓴 글을 ‘거리를 두고 읽기’란 쉽지 않으니까.

그런 면에서 초고를 마무리한 뒤 어느 정도 시간을 두라는 비숍 작가님의 조언은 주효했다.

“···확실히, 오랜만에 보니까 수정할 부분들이 제법 보이네.”

아직 배우는 단계에 있는 나 자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무리 원숙한 작가라 해도 반드시 놓치는 게 있기 마련.

그건 자잘한 설정일 수도 있고 미묘한 핍진성일 수 있으며.

‘이전의 내가, <잊혀진 성자들>에서 종종 그랬던 것처럼.’

앞에서 중요한 듯 언급했던 복선을 작가 자신이 뒤에 가서 놓쳐버리는, 이른바 체호프의 총이 될 수도 있다.

“···.”

달칵, 달칵, 주르르륵.

방 안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마우스 클릭과 휠 굴리는 소리만이 전부인 가운데.

[라이언의 과거는 흐릿한 신기루와 같았다.

어떻게 이 성에서 지내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이런 삶을 시작해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소년은 그를 가엾게 여기는 극소수 주민들의 동정심, 그리고 구걸에 의존해 지냈다.]

내 시선은 화면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열 살 무렵부터는 자잘한 잡일을 해가며 식사를 배급받게 되었지만.

말이 좋아 식사이지, 돌처럼 단단한 빵과 약간의 물이 하루 식사의 전부였다.

침을 묻혀 살살 녹인 뒤 앞니로 조금씩 갉아서 전부 다 먹은 후에도 약간의 포만감이 드는 게 전부.

그럼에도 이곳 주민들은 그 한 덩어리만 먹고도 온종일 쉴 틈 없이 일하고는 했다···]

한참을 정독하고 나니 어느새 제법 시간이 흐른 가운데.

이제는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 본격적인 문장 다듬기를 시작했다.

‘불필요한, 이른바 의미가 중복되는 문구를 잘라내고.’

감각적 묘사를 다듬고, 캐릭터들의 성격을 고려해 각자의 대사를 수정하고.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주인공 라이언의 심리 묘사를 강화하는 것.

“···.”

타다닥, 다다닥—

그렇게 나는 몇 시간을 연이어 <캐슬>의 퇴고에 할애했다···.

*

그날 저녁.

네드는 우리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는 내 방에서 자연스럽게 뒹굴거리는 중이었다.

“유진, 너 이번 방학 계획은 어떻게 되냐.”

시간이 없어 미뤄뒀던 신작 게임을 이번 기회에야말로 올클리어하겠다든가.

새로 나온 코믹스 회지들을 몽땅 사서 밤새도록 읽겠다든가···.

신이 나서 계획을 늘어놓는 네드를 돌아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캐슬> 퇴고해야지.”

“뭐? 아니 아니, 당연한 얘기이긴 한데. 방학의 낭만이란 게-”

“560페이지.”

“···.”

물론, 집필하는 게 아니고 퇴고하는 것뿐이니 그나마 마음의 부담이 적긴 하지만.

‘분량이 좀 많아야 말이지.’

오늘 본격적인 퇴고를 진행한 뒤 시간을 계산해본 바.

짧으면 한 달 반, 길게는 두 달 넘게도 걸릴 듯했다.

“그으래··· 미리 명복을 비마···.”

네드 녀석은 그런 내가 안타깝다는 듯 흐으, 소리를 냈다.

하지만 나는 전부터 이번 겨울방학을 나름 고대해왔던 터다.

‘원고와 함께하는 한 달, 생각만 해도 너무 좋은데 왜?’

이해가 안 되네,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

지잉- 핸드폰이 진동하며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어, 유진 너 뭐 왔다.”

[리암홀트편집부_시드니 : 에곤 K 작가님 안녕하세요. <캐슬>을 담당하게 된 시드니 캘러한이라고 합니다]

[리암홀트편집부_시드니 : 방금 메일을 한 통 보냈으니 여유되실 때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그리고 거의 동시에, 메일함에 새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그것을 확인해보자-

[발신인 : [email protected]]

[제목 : <캐슬>의 담당 편집자로서 인사드립니다]

<캐슬>의 출간 계약을 맺은 출판사 리암홀트.

안 그래도 담당자 배정이 완료됐다는 소식에,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그리고 나의 새로운 담당자인 시드니 캘러한은-

‘나이는 젊지만 경력도, 열정도 상당한 여성 편집자라고 들었지.’

원고의 교정교열은 물론, 책의 전반적인 만듦새나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다재다능한 스타일이라고 들었다.

문학, 특히 장르문학 쪽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도 유명하고 말이다.

실력과 열정을 겸비한 흔치 않은 담당자가 붙은 건 분명 좋은 일인데···.

‘뭐랄까, 열정이 조금 넘치는 느낌?’

나는 그녀가 내게 보낸 첫 번째 메일을 다시 읽어보았다.

척 봐도 몹시 긴 장문의 메일.

[에곤 작가님, 안녕하세요.

작가님의 담당편집자가 된 시드니 캘러한이라고 합니다.

작가님의 <사이언스앤드판타지> 공모전 당선작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을 읽은 것이 어제 일 같은데, 벌써 이렇게···

···(중략)···

판타지와 SF 장르에 평생 열정을 쏟아온 제게, 에곤 K 작가님의 신작을 담당하게 된 것은 비할 바 없는 영광이자 기쁨이고···

···(중략)···

한동안 정체기로 여겨졌던 SF씬에, ‘에곤 K’라는 작가의 등장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중략)···

사설이 너무 길었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캐슬>은 현재 초고 상태라고 들었는데요.

혹시 언제까지 퇴고하실 수 있을까요?

대략적인 일정을 알려주시면, 저희 또한 그에 맞춰 상세한 출간 계획을 세울 예정입니다···]

한눈에 봐도 팬심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지금 이 메일이 금요일 저녁, 그것도 밤 9시가 다 되어서 왔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자 아주 자연스럽게, 언젠가 미스터 케빈과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그, <캐슬>의 담당자분이 엄청난 워커홀릭이시더라고요.’

시드니 담당자는 앞서 라이터스홈과 수차례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가만 보면 밤 10시~11시에 메일을 보낼 때가 많아서 놀랐다는 것이다.

‘리암홀트가··· 그렇게 야근이 많은 곳인가요?’

‘아닙니다. 다른 편집자들 보면 오히려 더 자유롭게 일하는 편인데.’

시드니 본인이 소문난 워커홀릭인 만큼, 아마도 그녀 개인의 업무 스타일인 것 같다고.

“···하긴, 나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

회귀 전의 나, 그러니까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이전의 내가 꼭 그랬다.

워커홀릭에, 완벽주의적인 경향이 있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밤늦게까지 일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나중에 건강이 다 망가져버린 후로는···.

‘정말로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걸 너무도 뼈아프게 깨달았지.’

그렇다면 역시.

“앞으로 우리 담당자님의 건강도 중간 중간 챙겨줘야겠는걸.”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어떻게 답신을 보낼지 잠시 고민했다.

메일을 보낼까, 아니면···.

“···.”

폰을 들고 잠시 고민하던 그때.

지잉- 반가운 인물에게서 전화가 왔다.

“비숍 작가님!”

-으하하, 유진 군 잘 지내고 있나. 다름이 아니고 말이지.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정을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크리스마스요.”

-그래 그래!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 언젠가 크리스마스 쯤에 자네집 귀염둥이를 보러 가겠다고.

신이 난 비숍 작가님의 말에, 나는 한순간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아 물론 크리스마스 당일에야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겠지만, 그 이전이나 다음 주의 주말 정도에는 괜찮지 않겠나?

“그럼요, 당연히 괜찮죠! 대환영입니다 작가님!”

마침 이번 크리스마스는 수요일인지라, 주말은 상당히 널널하게 보낼 수 있는 상황.

“오오, 뭐야 뭐야. 설마, 비숍 작가님이 크리스마스 때 여기로 오신다고···?”

옆에서 자기가 더 흥분하는 네드에게 이따 설명해주겠다고 손짓하는 와중, 비숍 작가님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허허, 사실은 내가 이번에 중서부 SF 작가들 모임의 공식 초청을 받았거든.

원래는 그런 자리에 굳이 잘 가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나를 보러 올 겸 겸사겸사 초청을 수락해볼까 하신다는 것.

이미 옆에서는 네드가 ‘으으, 미친! 비숍 작가님을 실물로 보다니—!’ 하며 흥분해 외치는 가운데.

우리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와, 작가님 이거 엄청난 영광인데요. 절 보러 여기까지 오시다니-”

-엄밀히 말하면 자네보다도 자네집 귀염둥이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도 있지, 허허허.

“흐흐, 클로이가 작가님 보면 엄청 신나하겠는데요.”

-아 그래, 그래서 말인데···.

이어지는 비숍 작가님의 속삭임.

그것은 다름 아닌, ‘클로이를 위한 만반의 준비’에 관한 얘기였다.

“완전 좋습니다, 작가님.”

그 정성스러운 계획에 내 입꼬리 또한 저절로 스스륵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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