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홀릭(2)
비숍 작가님과는 한참을 더 대화하고 난 후에야 통화를 마쳤다.
“으어어어 진짜로, 비숍 작가님이··· 너희 집으로 오신다고? 미친—!”
“그래.”
“그럼 나도! 나도 올래!”
“···그래라.”
감탄사를 수없이 연발하던 네드 녀석까지 제 집으로 돌아간 후.
‘메일을 받았으니 시드니 담당자님에게 답을 드려야겠지.’
나는 몸을 일으켜 노트북 책상 앞에 앉았다.
*
곧 크리스마스인 만큼 대부분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지금 이 순간.
오후 9시가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퇴근을 못하고 남은 이들이 있었다.
불이 꺼지지 않는 야경으로 유명한 뉴욕의 대형 출판사 리암홀트 빌딩.
편집부가 쓰는 5층에도 아직 사람이 제법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마커스 스톤 작가의 담당이기도 한- 편집자 닉이었다.
“···하필이면 크리스마스를 앞에 두고 이런 일이.”
웬만해서는 야근하는 법이 없는 성격이지만, 담당하는 어느 작가가 원고를 펑크내는 바람에 야근까지 해가며 출간 일정을 맞춰야 했다.
내키지 않지만 별수없이 야근을 하던 그때, 언뜻 저 앞에 앉은 시드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 친구는 오늘도 퇴근을 안 하네.’
시드니 캘러한.
올초에 리암홀트로 옮겨온, 젊지만 경력이 상당한 편집자.
‘펭귄랜덤하우스에 최연소로 입사했다고 했지.’
주로 장르문학 담당으로 여러 개 히트작을 내며 승승장구한 능력자라고 들었다.
그런 그녀의 몇 안 되는 단점이라면-
‘워커홀릭, 아니 일 귀신이라는 점.’
책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것은 좋았지만, 가끔은 그것이 지나치다고 할까.
첫 회사인 펭귄의 분위기가 워낙 경쟁적이었다고도 하고, 미국의 기업이야 원래 출근 당일에도 사람을 불러서 해고하는 곳이기도 하니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리암홀트는 애초 그렇게 직원을 굴리는 곳도 아니고, 오히려 편안한 분위기에 가깝다.
그럼에도 시드니는 언제든 야근을 자처해가며 어마어마한 퀄리티의 책을 완성해냈고.
그런 성과 덕분에 이번엔 <캐슬>이라는, 내년 상반기의 메인타이틀일 뿐 아니라 출판계 전체의 뜨거운 관심을 받는 작품을 맡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나나 잘하자, 누가 누굴 걱정해.’
닉은 한숨을 쉬며 자기 원고로 다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 시각, 시드니 또한 저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좋아, 일단 <캐슬> 원고는 세 번이나 정독을 마쳤어.’
처음엔 그냥 가볍게, 두 번째는 전반적인 줄거리와 의미를 파악해가며, 마지막엔 편집자 입장에서 세심하게 교정교열을 들어갈 부분을 체크해가며.
그렇지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이 원고의 편집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저 한 명의 독자가 된 채 그냥 몰입해버리고 만다.
‘···어떻게 보면 그게 바로 이 원고가 지닌 마력이겠지만.’
읽을 때마다 받는 느낌이 다를 뿐 아니라.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인데도 어째서 매번 새로운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지 모르겠다.
‘아니지 그거야말로 정말로 잘 쓴, 재미있는 이야기의 핵심이니까.’
그렇게 원고를 책상 한켠으로 밀어둔 뒤.
방금 전 자신이 보낸 메일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훑었다.
[···작가님의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을 <사이언스앤드판타지>에서 발견했을 때 제 심정은, 마치 프라이데이를 발견한 로빈슨크루소처럼···]
음, 너무 주접을 떨었나.
평소의 시드니는 말수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필요한 말만 하는 사무적인 성격에 가깝지만.
이번처럼 원래도 좋아하던 작가를 담당으로 만나게 되면.
‘팬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렇게 유난을 떨어버리게 되니···.’
작가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만큼 자제해야 했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어쨌든.
원고 정독도 마쳤고, 편집계획서도 완성했으며, 세부적인 출간 일정 프로세스도 이미 전 부서에 공유를 마쳤다.
그럼에도 그녀가 아직 퇴근하지 않은 것은-
‘에곤 작가님에게서 답장이나, 메시지가 올 수도 있잖아?’
그러면 자신이 미리 정리해둔 자료를 살펴보며 얘기해야 될 상황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사무실을 떠나지 않은 참이었다.
물론 그녀의 동료나 상급자들은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애원했지만 말이다.
심지어는 편집장마저도 그런 말을 했었다.
‘제발 자네는 집에 좀 들어가보는 게 어떻겠나···.’
하지만 시드니 자신은 전혀 무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원고를 읽는 것부터 작가와 소통하고, 책을 만드는 것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너무 즐거울 뿐더러.
그녀에겐 일이 생활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그런 고로 저녁도 과자와 음료로 대충 때우며 시간을 보내던 와중.
부르르-
에곤 작가님의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과 함께 폰이 진동했다.
‘···드디어!’
시드니는 후우, 심호흡을 하고는 채팅창을 켰다.
그러자 이내 나타나는 에곤 K의 메시지.
[에곤_K : 안녕하세요 시드니 담당자님]
[에곤_K : 저도 이렇게 담당자님을 만나게 되어 정말로 반갑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라니.
자신이 보낸 메일에서 뭔가 실수라도 한 걸까?
얼른 메일을 다시 훑어봤지만, 그런 게 딱히 없는데- 라고 생각하는데.
메시지가 또 왔다.
[에곤_K : 지금 혹시 사무실에 계신 건 아니시겠죠]
···역시, 아직 퇴근하지 않길 잘했지 않은가.
시드니는 씩 웃으며 메시지를 작성했다.
[리암홀트편집부_시드니 : 아닙니다 아직 퇴근 안 했으니 편히 말씀주십시오]
그러자 곧바로 날아오는 에곤 K의 메시지.
[에곤_K : 저녁은, 제대로 챙겨 드셨습니까?]
[에곤_K : 설마 과자나 음료수 같은 걸로 대충 때우신 건 아니시겠죠]
음, 이 타이밍에 왜 이런 질문이 나오는 걸까.
시드니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성실하게 답했다.
[리암홀트편집부_시드니 : 그게··· 말씀하신 대로 간단히 때우긴 했습니다만]
에곤 K는 그녀의 식단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에곤_K : 그럼 점심에는 제대로 식사하셨는지요]
[에곤_K : 설마 점심도 샌드위치, 아니면 스무디 한 잔으로 대충 퉁치신 건 아니시겠죠]
CCTV로 지켜본 듯한 대답에 흠칫했다.
[리암홀트편집부_시드니 : 음 스무디를 식사 대신 마시긴 했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에곤_K : 세상에 이럴 수가]
단 한 줄의 문장이었지만.
메시지에서는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한 듯, 깊은 탄식이 느껴졌다.
음성 지원이 되는 듯한 느낌에 시드니가 두 눈을 껌벅거리는데.
[에곤_K : 그렇다면]
[에곤_K : <캐슬>의 작가로서, 시드니 담당자님께 특별히 요청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잠시 얼이 빠져 있던 그녀가 그 내용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역시, 에곤 K도 자신만의 기벽이 있나 보네.’
그녀가 여태 담당해온 유명 작가들은 저마다 다 독특한 구석이 있었다.
PC 화면상의 교정은 거부하고 무조건 종이로 출력해 손으로 교정해서 보내달라든가.
자신은 야행성이니 낮 시간에는 절대 연락하지 말라는 건 양반이다.
‘전에 누구였더라, 에바 스털링 작가는···.’
랜든 비숍과 나란히, 과학소설계의 거장으로 유명한 에바 스털링.
그녀는 시드니에게 이상한 행운의 부적 같은 걸 억지로 안겨줬는데.
‘부투티 족의 주술사가 직접 만든 부적이에요.’
‘···네?’
‘내 원고를 교정할 땐, 꼭 그걸 옆에 둔 채로 하는 걸 잊지 말아요.’
‘···?’
여하튼, 에곤 K는 뭘 요구할지 조금 궁금해졌다.
웬만한 건 다 맞춰줄 수 있지만, 혹시나 회사 차원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만 아니면 되는데···.
[리암홀트편집부_시드니 : 편히 말씀해주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그러자 이내 돌아오는, 의외의 메시지.
[에곤_K : 건강입니다]
‘···?’
이게, 무슨 의미일까.
시드니는 잠시 눈을 껌벅이다가 답했다.
[리암홀트편집부_시드니 : 네?]
[에곤_K : 제가 바라는 건, 시드니 담당자님이 건강을 챙기면서 일하시는 겁니다]
어···.
이내 와다다다, 이어지는 메시지들을 그녀는 홀린 듯 읽어내렸다.
[에곤_K : 초면의 담당자님께는 오지랖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에곤_K : 앞으로 <캐슬>의 책임편집자로서 본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시기 위해서는]
[에곤_K : 담당자님의 건강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건강이라.
···그 부분은 생각도 안 해봤는데.
[에곤_K : 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정시 퇴근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에곤_K : 아직 담당자님이 젊으셔서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에곤_K : 어 이래도 멀쩡한데? 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에곤_K : 사람의 몸은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반드시 축나게 돼 있어요]
그것을 시작으로, -에곤 K의 주변인들에게는 제법 익숙한- 레퍼토리가 이어졌다.
우리의 건강은 은행 금고 속에 잠든 예금과 같다든가.
젊을 적에 비축된 것을 평생토록 갉아먹으며 사는 셈이라든가.
미리 건강을 저축하지 않으면 노년에 정말로 고생하기 십상이라든가···.
[에곤_K : 세상에 공짜란 없습니다. 물론 저도 한때는 일에 열중하는 삶이 너무 좋고, 실제로 그렇게 지냈던 적도 있습니다만]
[에곤_K : 일은 일이고, 내 몸과 건강은 따로 챙겨야 하는 법이니까요]
그렇게 한 차례 잔소리가 이어진 뒤.
에곤은 지금까지 자신이 한 얘기를 따로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하기까지 했다.
···가능하다면 그것을 프린트해서 사무실 책상 앞에 붙여놓으라고.
[에곤_K : 그리고 이거는 제가 여태 같이 일해온 모든 분께 말씀드리는 거지만, 최소 30분마다 한 번씩은 꼭 스트레칭을···]
허리디스크와 거북목 예방에 관한 설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시드니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고 말았다.
‘정말, 인터뷰에서 받았던 인상 그대로이시잖아!’
그 사실이 왠지 기뻐서 기분이 좋아지면서도.
더는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리암홀트편집부_시드니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작가님]
[리암홀트편집부_시드니 : 그럼 저는 말씀주신 대로 바로 퇴근하겠습니다]
그러자-
[에곤_K : 정말로 잘 생각하셨습니다 :D]
[에곤_K : 앞으로는 가급적 근무시간, 9~5시 사이에 연락하도록 하죠]
웃는 이모티콘을 보니 칭찬을 받은 느낌이라고 할까.
[리암홀트편집부_시드니 : 좋습니다 작가님 기분 좋은 밤 되십시오]
시드니는 기분 좋게 컴퓨터 전원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저 뒤편, 동료 편집자 닉이 그녀를 돌아봤다.
“오, 웬일로 먼저 퇴근하네.”
“그게, 에곤 작가님이 얼른 퇴근하라고 하셔서.”
“으어 부럽다··· 나도 퇴근하고 싶다···.”
닉과 인사하고 나서는 시드니의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
그다음 주,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토요일 점심.
우리 집에는 생각지도 않은 대인원이 모이게 됐다.
일단은-
“으어, 긴장돼 미치겠다.”
“숨을 쉬어, 네드. 천천히 심호흡을···.”
첫 데이트에 나가는 것마냥 얼굴이 벌게진 네드와, 그런 녀석을 달래주는 아델.
“유진아, 이거 어때. 너무 오래돼 보이나?”
“음, 나도 전부터 갖고 있는 판본 전부 갖고 왔는데···. 여기에 사인해달라고 부탁드리면 너무 실례일까?”
그런 네드의 태도에 전염된 것인지, 아버지와 케이트마저 전전긍긍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뭐 근데, 나도 그런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
···오늘의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니 말이다.
지금 우리는 과학소설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랜든 비숍 작가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중.
이 모든 것은 얼마 전 비숍 작가님과의 통화에서 비롯되었는데-
‘클로이를 위해··· 선물을 준비해오시겠다고요?’
‘허허허, 그럼 그럼. 크리스마스의 아이들이 무얼 제일 기대하겠나?’
절대 빈손으로는 올 수 없으시다는 것.
그렇게 기분 좋게 통화를 마친 뒤 우리 가족에게 그 소식을 전했더니.
‘···!’
‘뭐, 뭐라고? 방금 지금-’
‘누구? 랜든··· 비숍?’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마시던 음료를 뿜을 것 같은 표정을 했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누가 봐도 완벽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네.’
벽과 천장 여기저기에 달아놓은 크리스마스 장식.
화려하게 치장한 트리와 크리스마스 리스까지.
우리 집이 이렇게 완벽한 홈파티 분위기를 내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게 기다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띠링-
도어벨이 울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우와—!”
“오셨다!”
우리 모두는 황급히 현관으로 달려나갔지만.
“잠깐만.”
나는 비숍 작가님을 맞이하는 영광을 우리 클로이에게 돌렸다.
“자, 클로이가 열어봐.”
“헤헤.”
클로이가 웃으며 문을 연 순간.
“메에↗︎리→ 크뤼↗︎스마↘︎스!”
백화점의 산타가 아이들을 볼 때마다 외치는 바로 그 억양 그대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는 빨간 옷의 산타클로스.
“우와아~~~”
클로이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탄성을 질렀다.
“산타! 산타 하부지야~”
···그것은 다름 아닌, 클로이를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산타로 변신한 랜든 비숍 작가님이었다.
자네집 귀염둥이
비숍 작가님은 등에는 커다란 자루까지 맨 채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좋아하셨다.
“어허허허, 그래 그래, 산타 할아버지예요~”
···참고로 말하자면, 저기 저 수염은 붙인 게 아니라 작가님 본인의 수염인 듯했다.
“우와! 산타, 할아버지가, 우리집에, 오셨구나.”
“와 그렇구나, 산타 할아버지, 어서 오세요.”
이런 광경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나와 작가님, 그리고 클로이의 반응을 보고 상황 판단을 마친 아버지와 케이트가 몹시 어색하게 인사했다.
“내,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아델, 지금 나 꿈꾸는 거 아니지?”
“네드, 숨을 쉬라니까? 너 얼굴이 보라색이 됐어···.”
나만큼이나 랜든 비숍의 팬인 네드는 작가님의 실물을 마주하고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팬미팅의 현장에서 작가님이 산타클로스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게 조금은 아이러니하기도 했지만.
“으하하, 크리스마스에는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법이지.”
잠시 후.
응접실로 안내받은 비숍 작가님의 말에 클로이가 눈을 빛냈다.
“클로이는 아주 착한 아이라고 들었는데.”
“마자요! 근데, 쪼금은···.”
신나서 대답하다가 이내 머뭇거리며 말을 잇는 나의 동생.
“아주 쪼끔, 잘못하기도 해쩌요···.”
“언제?”
“웅, 마리사랑 싸웠을 때.”
“앞으로는 사이 좋게 지낼 거지요?”
“네!”
“허허, 아주 좋아요. 그거 말고는?”
산타할아버지를 올려다보던 클로이가 나를 슥 돌아보며 가만히 눈치를 살핀다.
“샤실은··· 엄마가 오빠 꺼라고 만들어둔 팬케이크, 내가 먹었쪄요···.”
그 말에 아델이 풋 웃음을 터뜨리자, 그것을 시작으로 모두에게 웃음이 전염됐고.
“으하하하!”
내내 캐릭터를 유지하던 산타클로스, 아니 비숍 작가님까지 참지 못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저런 저런, 오빠 걸 몰래 먹으면 안 되지. 하지만 앞으로 안 그러면 괜찮아요.”
“네, 안 그럴게요~”
“그래 그래. 클로이는 착한 어린이가 맞으니··· 자, 선물.”
그리고 이내.
등에 지고 온 자루 안에서 꺼내 보인 커다란 선물에 클로이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조그마한 손으로 신나게 포장지를 뜯어보더니.
“우와아아~~~ 대왕 베니다아~~”
자기 몸만큼 커다란 베니 인형을 보고 신나서 방방 뛰는 것이 아닌가.
“어, 작가님 저건···.”
“흐흐, 특별주문했지.”
클로이의 두 눈이 반짝반짝거린다.
동생은 이내 모자에 망토, 당근 검까지 갖춘 ‘베니 남작’을 꼭 껴안아주었다.
“허허, 참으로 귀엽구만.”
“으어 귀여워···.”
“클로이이이···.”
비숍 작가님, 네드, 아델 셋이서 클로이의 모습에 홀딱 빠진 듯 바라보는 것을.
나와 아버지, 케이트는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음, 그건 그렇고.”
작가님이 어느새 송골송골 맺힌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내게 SOS를 요청했다.
“이거 아무래도, 이 의상은 빨리 벗어야겠네.”
“하하, 고생 많으셨어요.”
그리고 잠시 후.
비숍 작가님이 내 방에서 환복하고 돌아오신 것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팬미팅이 시작되었다.
팬미팅이란 다름 아닌-
“저, 작가님 혹시 괜찮으시면 여기에 사인을 좀···.”
“아니 이건 80년대 초판인데, 대체 이걸 어디서.”
“하하, 저희 와이프가 고서점을 운영하거든요.”
“허허 이 판본을 보니 내가 다 그립군요.”
“저는 이것!”
“오오 이건 잡지 버전인데 이걸 대체 어떻게···.”
다들 보물처럼 소장하고 있던 비숍 작가님의 책을 들고 와 사인을 받는 모습에 작가님은 조금 당황하신 모양이었고.
“옹? 작가님이 누구야 오빠아~ 산타하부지는?”
“음, 그게···.”
클로이 또한 다른 의미로 당황한 모습에 풋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 그리고, 여러분에게 드릴 선물도 준비해왔지요.”
비숍 작가님은 이내 이번 신작 <그림자와의 조우>, 그것도 친필 사인까지 한 특별소장판을 모두에게 한 부씩 나눠주셨다.
‘이런 것까지 준비해주시다니.’
그 마음씀씀이에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가운데.
“크윽, 크으으···.”
네드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팬 특유의 리액션으로 비숍 작가님을 즐겁게 했다.
그렇게 선물 증정 시간이 끝난 뒤.
“그럼 다같이 식사하실까요?”
케이트와 아버지가 함께 준비했다는, 전통적인 미국식에 한국식 요리 몇 가지를 곁들인 크리스마스 만찬.
“허어, 이것 정말 훌륭하군요.”
“입맛에 맞으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SJ 아저씨, 이 갈비 엄청 연한데요?”
“넘 맛있어요!”
또한.
내가 차를 끌고 나가 이 동네 제일의 베이커리에서 사온 케이크.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판매하는 뷔슈드노엘은 입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맛있었다.
“아! 이게 바로 설탕의 매력이지!”
초콜릿 케이크가 소름끼칠 정도로 맛있다며 탄성을 연발하는 작가님을 가만히 보다가.
“작가님, 기왕 여기까지 오신 김에 이따가 소화나 시킬 겸···.”
“설마, 또 산책하러 가자는 건 아니겠지?”
“아뇨 아뇨. 제가 자주 가는 체육관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에이 이 사람! 말도 꺼내지 말게! 크리스마스에 육체를 혹사시키는 것은 죄악이야 죄악.”
“···그게 무슨.”
“맞습니다 작가님! 여기 이 유진은 늘 지나친 구석이 있다니까요···.”
필사적으로 궤변을 늘어놓는 작가님, 그런 작가님 옆에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네드.
그 둘을 보니 절로 웃음이 지어졋다.
‘근데 좀 아쉽긴 하네.’
짐 관장님이라면 작가님에게 꼭 맞는, 적당한 운동 루틴을 짜주실 텐데 말이다.
쩝, 아쉽게 입맛을 다시고는 옆에 앉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내일 아침에 같이 가요.”
“어? 어디를.”
“어디긴요, 짐 관장님 체육관이죠.”
“아, 어, 그래, 그래···야지.”
아버지의 눈동자가 한순간 흔들리는 듯했지만 나는 무시했다.
*
크리스마스 직전의 홈파티는 즐겁게 마무리되었다.
“허허, 내가 유진 군과 가족분들 덕분에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가는구만. ···돌아가고 나서도 한동안은 이 시간을 즐겁게 추억할 것 같네.”
클로이가 직접 그린, ‘산타하부지’ 그림을 선물로 받고서 비숍 작가님이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저희야말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쌓은걸요.”
내 말에 아버지와 케이트 또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여전히 흥분으로 얼굴이 벌게진 채인 네드가 두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맞습니다 작가님! 저 진짜, 나중에 아들과 손자한테도 이 얘기 해줄 거예요···.”
“으하하, 네드 군의 아들과 손자는 나를 모를 텐데.”
“그럴 리가요, 제가 어릴 때부터 귀가 따가울 정도로 얘기해줄 건데···.”
다같이 왁자지껄하게 웃은 뒤 마지막으로 클로이가-
“산타 하부지, 잘 가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비숍 작가님을 가볍게 포옹해주는 것을 끝으로, 작가님은 허허 웃으며 이곳을 떠나셨다.
파티의 열기가 천천히 가라앉은 이후 그날 밤.
내 방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는데 언젠가 비숍 작가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음, 뭐··· 나야 명절 때는 오히려 한가한 편이니 말일세.’
이곳의 크리스마스는 한국의 설처럼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명절.
‘가족이래 봤자 가끔 가다 조카 녀석들이랑 연락하는 정도? 돌아가신 형님의 자식들인데, 다들 외국에 나가 있어서.’
랜든 비숍.
작품 이력만큼이나 연애 경력도 화려하기로 유명한 그는, 짧은 결혼 생활과 이혼을 여러 번 반복한 것으로 알고 있다.
슬하에 자식은 없고, 전 아내나 애인과는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 정도라고.
‘오히려 나 같은 사람에겐 이 정도가 딱 좋다네. 작품에만 빠져 있다고 구박받을 일도 없고 말이지, 흐흐.’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은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잠이 든 나는, 초록색 옷을 입은 꼬마 요정 클로이와 산타클로스가 된 비숍 작가님이 썰매를 타고 독자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다니는 꿈을 꿨다···.
*
어느새 1년의 마지막이 눈앞으로 다가온 시점.
‘시간 참 빠르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나눈 대화 이후로, 시드니 담당자는 확실히 덜 무리하는 듯했다.
-에곤 작가님! 오늘은 정시퇴근에 성공했습니다!
-작가님, 오늘 점심엔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직접 싼 치킨 샌드위치에 바나나, 사과, 요거트를 곁들여서···.
-작가님, 저녁은 퇴근 후 집에서 먹었습니다. 구운 야채를 곁들인 연어스테이크인데, 맛이 좋더군요.
-그건 그렇고, 오늘도 <캐슬> 퇴고 힘내시길 바랍니다.
···
매일 점심과 저녁 메뉴를 보고하는 것에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뭐,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본인에게도 건강한 습관이 들겠지.’
방금 전에도 그녀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보며 흐뭇하게 웃던 그때.
지잉-
이번엔 네드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네드_밀러 : 이것 봐봐 https://www.google.com/search?q=ai+daisy+play&rlz=1C5CH-···]
그것은 바로 연극 에 관한 검색 결과였는데.
[‘천재 극작가’ 로렌 루먼의 새로운 선택··· 천재 고등학생이 쓴 단편소설?]
[일인극 , ‘헐리우드의 보석’ 젬마 도노반이 주연 맡는다]
[로렌 루먼의 모노드라마 , 젬마 도노반의 1인 다역에 관한 기대감과 불안감···]
[오프브로드웨이에 불어오는 흥행돌풍 예감··· , 올 상반기 최대 기대작]
[로렌 루먼, 릭 그로브, 젬마 도노반이 선택한 의 원작자, 권유진은 누구?]
···
안 그래도 초연 일정이 확정되자마자 대대적인 홍보를 시작한다더니.
“···본격적으로 기사가 쏟아지네.”
그중에는 이 연극의 원작자인 내게도 관심을 갖는 기사가 꽤 있었다.
늘 그랬듯 시간이 지나면 열기도 금세 식으리라 생각했지만.
이미 내 이름이 <토끼 남작>의 글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어서인지 그 여파가 생각보다 대단했다.
게다가 그로부터 정확히 이틀 뒤.
[단독| 젬마 도노반과의 인터뷰 - “껍질을 깨고 나와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무려 <뉴욕타임스>에서 진행한, 배우 젬마 도노반의 인터뷰 기사가 발표되었는데.
‘···어라?’
그녀가 거기서 설마 내 이름을 언급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인터뷰 기사는 뉴욕타임스 기자와 젬마 도노반이 나눈 여러 QNA로 이뤄져 있었다.
연극 에 일인극으로 도전하게 된 계기, 극작가 로렌 루먼과의 인연, 원작소설 에 관한 얘기가 한창 이어지던 와중.
[젬마 도노반 : ···(전략)···또한, 원작자인 유진 권에게도 개인적으로 감사한다.]
[뉴욕타임스 : 원작자와 만날 기회가 있었나?]
[젬마 도노반 : 그렇다. 그와는 리허설 때 만났는데, 유진 권의 조언 덕분에 의 연기를 위한 큰 깨달음을 얻었다. 고등학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리한 식견을 지닌 것에 깜짝 놀랐다.]
내 이름을 이 정도 언급한 것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치는 수준이었지만.
[뉴욕타임스 : 어떤 종류의 조언이었는지 궁금하다. 살짝 설명해줄 수 있나?]
[젬마 도노반 : 지면상 전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나 자신도 캐치하지 못했던, 내 연기에 빠져 있던 작은 퍼즐조각 하나를 발견해주는 조언이었다.]
[뉴욕타임스 : 빠진 퍼즐조각을 찾아준 조언이라. 듣기만 해도···.]
‘빠져 있던 퍼즐조각이라.’
그 표현 자체도 너무 의미심장했지만.
기자가 쓸데없이 ‘원작자 권유진은 올 하반기의 대형 베스트셀러였던 <토끼 남작의 모험> 시리즈의 작가다’라고 주석까지 달아놓은 덕분에-
“···라이터스홈 에이전시 업무가 한동안 마비됐다는데?”
네드와 함께 시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녀석의 말에 나는 운전대를 잡은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전 직원이 눈 코 뜰 새 없이 밀려드는 연락에 응대하는 것은 물론.
사전 연락 없이 나에 관한 추측성 기사를 작성하는 온갖 중소 매체들을 컨트롤하느라 정신없었다고 말이다.
“후우, 우리의 유진 디어웨이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뭐가.”
“대체 이 어마어마한 셀럽에게 어떠한 깨달음을 줬길래···.”
“···.”
“너 땜에 미스터 케빈이 너무 고생하시잖냐, 크크.”
그나마 아동팀에서 백업해줬다는 얘기에 다행이다 싶기는 했지만.
배우 젬마 도노반의 인터뷰가 남긴 여파는 지금 이 순간, 내게도 계속 나타나는 중이긴 했다.
지잉, 지이잉, 지잉-
쉴 새 없이 울리는 폰을 보며 네드가 눈썹을 들어올리더니.
“저거, 인터뷰 기사 땜에 괜히 찔러보는 메일들이지?”
“···눈치가 아주 귀신 같다?”
“흐흐, 척하면 척이지.”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이라면.
미스터 케빈을 비롯, 라이터스홈 에이전시에서 잘 방어해주는 덕분에 내 사생활을 귀찮게 하는 수준으로 접근해오는 이들은 없다는 것이다.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나네.’
<잊혀진 성자들>의 원고가 퍼블리셔스마켓에서 일곱자릿수로 계약되었을 직후.
여기저기서 연락이 쏟아지던 때가 떠올라 고개를 휘휘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