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벳과 이상형(1)
*
그때만 해도 유진은 젬마 도노반의 인터뷰가 남긴 진정한 파급력을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 정도도 이미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지만, 진짜 열풍은 아직 시작도 안 한 상태였으니까.
[12.4k 젬마 도노반, 일인극 에 출연···]
이에 관해 제일 먼저 반응이 온 곳은 당연히도 배우나 뮤지션 등 각종 유명인에 관한 얘기가 오가는 ‘셀럽’ 서브레딧 커뮤니티였다.
-젬마 도노반이 연극이라고?
└그것도 일인극이라고 함
└괜히 무리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엄마가 마거릿 도노반이잖아
└엄마는 대배우 + 아빠는 거장감독
└하긴 부모의 업적이 너무 대단하면 자식이 힘든 법이지
└난 힘들어도 좋으니 마거릿 도노반 2세로 태어나고 싶다···
└나도 ㅋㅋㅋ
대부분은 젬마 도노반의 연극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걱정이 더 큰 상황.
-젬마 가끔 보면 안타깝더라···
└본인을 어떻게든 증명하려는 데 필사적인 듯 ;(
-아니 근데 젬마 정도면 연기력 괜찮지 않나?
└히어로물 히로인 정도야 할 수 있지
└근데 연극을, 것도 혼자서 무대를 끌고 갈 정도는 아니지
└로렌 루먼 정도면 연극계 네임드로 알고 있는데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음
└그쪽도 인맥이 중요하겠지 뭐
···
물론 젬마 도노반들의 팬들이 실드를 쳐보려고 했지만.
그들조차도 젬마의 ‘연기력’은 확신하기 어려웠으니 말이다.
-젬마 도노반의 최고 업적 : 피터 파커의 애인 그웬 스테이시
└금발의 재벌 상속녀 ㅋㅋㅋ
└ㅇㅇ 그런 이미지는 확실히 잘하지 그것 외엔 모르겠지만
└그건 연기가 아니지 않나? 이미 본인의 삶인데 ㅋㅋㅋ
└오 그렇네
···
그간 젬마가 시달려온, 조롱과 비방이 뒤섞인 리플들이 반복되는 가운데.
누군가가 그녀의 뉴욕타임스 인터뷰 기사 링크를 가져왔다.
- Ai 데이지 관련 인터뷰라고 함 https://www.nytimes.com/movies/···
└로렌 루먼이 쓴 거 아니었어?
└원작이 따로 있다나 봐
└원작자 권유진
└그게 누군데?
└전국 문학상 공모전에서 금메달 탄 고등학생이라는 듯
└와 고등학생의 작품을 로렌 루먼이 각색했다고?ㄷㄷㄷ
자연스럽게, 권유진의 스콜라스틱 수상 소식이 담긴 기사는 물론이고.
그 권유진이 바로 작년 서점가를 강타한 <토끼 남작의 모험> 시리즈의 저자라는 내용의 기사 또한 누군가가 링크를 올려놓았으며.
└와 미친
└진짜 엄청나네
└이 정도면 그냥 천재 고등학생 아닌가?ㄷㄷㄷ
└부럽다···
···
그리고 그 사실은 어느새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그 외의 수많은 서브레딧 커뮤니티로 퍼져나갔다.
영화, 드라마, 배우, 연극 관련은 물론이고.
원작 소설이 있는 작품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출판 관련 서브레딧 게시판으로도 퍼졌다.
그중에서도 거의 마지막으로 이 소식을 접한 sf 서브레딧은-
[1.5k 비숍 팬보이가··· 또 뭔가를 저지른 듯?]
···조금 다른 의미에서 난리가 나 있었다.
게시물에 설명된 내용과, 첨부된 각종 기사 링크에도 불구하고 다들 곧바로 감을 못 잡는 분위기.
└지금 이게 뭐임?
└잠깐만 우리 힐크레스트 고교의 천재 소년··· 그러니까 비숍팬보이는 토끼 남작 저자 아니었나?
└그거 맞는데
└그럼 이 스콜라스틱이라는 건 뭔데?
└미국 전역 문학 천재 고등학생들이 겨루는 대회
└아 문학 배틀 우승자
└ㅋㅋㅋㅋㅋㅋㅋ
└ㄷㄷㄷ 팬보이 이 정도였어?
└인싸에 얼굴에 거기에 재능까지··· 못 가진 게 뭐냐
└아니 잠깐만 이걸 로렌 루먼이 연극으로 각색했다고?
└로렌 루먼이 누군데
└천재 극작가라고 연극계에서 유명함
└거기에 젬마 도노반이라니 미쳤네 진짜
└비숍 팬보이··· 당신은 대체
└이젠 권유진이라고 해야 함
└ㅇㅇ 비숍 팬보이는 우리 사이의 호칭일 뿐
└흐 우리의 팬보이 너무 유명해졌어
누가 언제 찾아놨는지, 과거 에이든의 브이로그에 출연했던 영상 링크까지 서브레딧에 돌고 있는 그 상황을.
-어? 이 조회수··· 갑자기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다 보니 에이든의 채널 구독자수까지 덩달아 폭증해버린 그 상황을-
“···맙소사.”
유진은 며칠 뒤, 에이전트 케빈 클레그의 연락을 받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
그 후로 시간은 쏜살 같이 지나갔다.
크리스마스에 유진은 케이트의 친어머니, 그러니까 브리짓 할머니의 집에 다녀왔고.
<캐슬>의 퇴고를 진행하다 보니 어느덧 1월 초.
“잘 지냈어?”
“유진—! 어서와.”
“안 그래도 다들 도착해 있었지.”
짧은 겨울 방학이 끝나고 11학년 2학기가 시작되었다.
문예창작 클럽원들은 여느 때처럼 장난스레 안부를 주고받았다.
“오, 샬롯 머리 자른 거 잘 어울린다.”
“고, 고마워.”
“제이든, 너는 왜 더 거대해졌어···?”
“크흐흐, 이게 말이지, 새로 산 프로틴 파우더가-”
“아 됐고. 얼른 시작이나 하자.”
오늘은 교사 레너드 하인스가 참석하지 않는, 학생 자치로 진행되는 클럽활동일.
“그럼 아까 얘기했던 대로, 오늘은 단편 집필을 목표로 하는 거 맞지?”
학생들은 이전의 ‘주제 글쓰기’ 활동에서 했던 것처럼, 새로운 단편을 쓰자는 것에 동의했다.
그때 유진의 같은 훌륭한 작품을 비롯해, 다른 학생들이 쓴 작품들도 제법 퀄리티가 괜찮았던 것이다.
이들 대부분이 문예창작이나 문학 전공을 지향하는 만큼, 단편 습작은 대학 진학을 위한 포트폴리오로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난 완전 대찬성! 니들도 알잖아, 내가 뭔가 이렇게 강제하는 게 없으면 각 잡고 못 쓴다는 거···”
특히나 다른 학생들보다 포트폴리오가 확연히 부족한 미아는 훨씬 더 필사적이었다.
“나도 좋음.”
“그래 그래, 근데 방식은 어떻게 해볼까?”
“음, 모두 똑같은 주제로 쓰기보다는···.”
그때.
평소에도 기발한 아이디어를 잘 내는 제이든이 이런 의견을 던졌다.
“각자 키워드를 몇 개씩 적어서 내는 건 어때?”
제비뽑기용 종이를 만들고, 각자 거기에 키워드 하나씩을 적어서 내자고.
“···그래서 한 명당 네 개씩 제비를 뽑은 뒤, 거기에 나온 키워드를 써서 단편을 쓰자고?”
그것이 주제가 되든 혹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의미 없는 소품이 되든.
어떻게든 키워드를 극중에 등장시켜서 하나의 단편을 쓰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자는 것.
“오, 재밌겠는데?”
“해보자!”
“이런 건 생각도 못 해봤는데, 하하.”
어쩌면 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런 만큼 더 도전 욕구를 자극하며.
새로운 방식에서 브레인스토밍을 해볼 수 있다는 것에 다들 신이 난 가운데.
‘음, 운명이나 관계··· 이런 건 좀 진부하려나?’
유진 또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괜찮은 키워드를 고민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진부한 것들이 글 쓰는 연습에는 가장 큰 도움이 되겠지.’
그런 면에서 적당히 참신하고, 또 적당히 진부한 키워드 4개를 골라 제비를 만들었다.
“자자, 얼른 넣으세요.”
제이든이 즉석에서 만든 통 속에 모두가 각자 만든 제비뽑기 종이를 집어넣은 뒤, 돌아가며 제비를 뽑았다.
“오, 신기술? 이건 내가 좀 자신 있지.”
“영혼과··· 운명이라. 이런 건 로맨스를 써야 하는 거 아닌가?”
각각 제이든, 로완이 꺼낸 말에 유진이 본인 몫의 제비를 뽑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그런 키워드를 꼭 로맨스라는 장르에 한정해서만 풀어낼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생각하기에 따라 얼마든 다양한 이야기를 펼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긴.”
로완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에 잠겼고, 본인의 제비를 펼쳐본 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와중.
‘어디 보자.’
유진은 자신이 뽑은 종이를 하나씩 펼쳐보기 시작했다.
[이상형]
[쌍둥이]
“···흠.”
여기까지는 뭐 그렇다 쳤지만.
[동화]
이건 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생각하며 펼쳐본 마지막 제비는 다름 아닌-
“···알파벳? 이건 대체 누가 적어 넣은 거야?”
옆에 앉은 미아가 유진이 펼친 제비를 보고 놀란 채 말을 이었다.
“알파벳을 가지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라고?”
“으어, 잠깐만.”
그러자 여태 신나게 수다를 떨던 제이든이 유진을 돌아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거, 내가 쓴 건데···.”
“야! 제이든, 이거 니가 직접 써봐.”
“음, 유진이 걸린 키워드 되게 까다롭네.”
“알파벳. 거기다 쌍둥이에, 이상형, 동화···?”
하필이면 이런 키워드들이 걸렸냐며 다들 혀를 차는데.
“아니, 나는 이렇게 다들 평범한 키워드를 쓸 줄 몰랐지···.”
모두들 자기처럼 신기한 키워드를 넣을 줄 알았다며 제이든이 어쩔 줄 몰라하던 그때.
“음, 해볼만 할 것 같은데?”
유진의 목소리에 다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 진짜로?”
“잠깐만, 이 키워드들로 어떻게 하려고-”
“뭐, 우리가 지금 어디 대회에 나가는 건 아니잖아? 즐겁게 써보자는 건데. ···그리고.”
유진은 씩 웃으며 제이든을 돌아보았다.
“오히려 이렇게 참신한 키워드에서 더 재밌는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고 말이야.”
사실 그는 굉장히 편한 마음으로 이번 활동에 임하고 있었다.
대학 진학을 위한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야 하는 다른 학생들과는 상황 자체가 다른 데다가.
‘지금은 한창 <캐슬>의 퇴고를 진행하는 중이긴 하지만.’
가끔은 이 무겁고 진중한, 그것도 몹시 방대한 분량의 원고에 파묻혀 있는 것보단.
이런 식으로 한숨을 돌리는 것이 괜찮은 기분 전환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크으, 멋지다···.”
“역시 유진, 대인배야 대인배!”
“음,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덕분에 한층 안심한 얼굴의 제이든은 갑자기 두 눈을 반짝거리더니.
유진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꺼냈다.
“그, 유진. 혹시 말이야, 괜찮으면··· 니가 브레인스토밍하는 과정을 좀 지켜봐도 될까?”
“응?”
“아니 전에 샬롯이 그랬는데, 니가 아이디어 정리하는 게 엄청났다고 하더라고.”
음, 엄청날 게··· 딱히 있었나?
유진은 평소처럼 늘 하듯이 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조차도 친구들에겐 신기해 보인 모양이었다.
“상관없어, 옆에서 편하게 봐.”
“이얏호—!”
제이든은 그 길로 본인의 책상과 의자를 아예 유진 옆으로 질질 끌고 왔다.
“어우, 아주 가지가지 한다.”
미아가 한마디했지만 제이든은 그저 유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실실 웃는 중.
그 모양새가 꼭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아니지, 강아지라기보단··· 거대한 그리즐리베어?’
아무튼.
유진은 픽 웃고는 본인의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돌렸다.
텅 빈 워드 화면창에 방금 나온 키워드 네 가지를 적어놓았다.
[알파벳]
[쌍둥이]
[이상형]
[동화]
확실히 쌍둥이나 이상형까지는 뭔가 연관 지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동화에, 알파벳이라.’
알파벳은 대체 어떻게 활용해야 될까?
물론 다 같이 합의한 대로 작중에 스쳐 지나가는, 의미 없는 단어로 처리하고 지나가도 상관없지만.
‘왠지 그런 건 내가 용납할 수가 없달까.’
유진은 이런 부분엔 전력을 다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기도 했다.
딱히 자신이 그런 성격이라고는 의식한 적 없었지만, 어쨌거나.
[쌍둥이···]
[알파벳···]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힌 채 단어를 썼다가 지웠다 하길 반복하는 중.
머릿속 생각이 자연스럽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때와는 확실히 다르긴 했다.
“···.”
그 모습을 옆에서 슬쩍 지켜보던 제이든도 내심 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일부러 골탕 먹으라고 넣은 것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저렇게 어려운 키워드들과 같이 걸려서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
그때,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듯.
타다다닥—
유진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임과 동시에 화면에 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쌍둥이와 알파벳]
[알파벳 중 쌍둥이의 형태인 게 뭐가 있지 음]
[D 두 개가 위아래로 붙으면 B가 되네]
[ㅋㅋㅋㅋ]
혼자 장난처럼 그런 메모를 마구 적어내려가는 유진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영혼의 쌍둥이]
[소울메이트]
[쌍둥이 = 이상형?]
[동화작가]
[주인공이 동화작가라면?]
[음]
[지금 나처럼 이 작가도]
[이것저것 고민을 하겠지]
···
머릿속 생각을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유진이 적는 가운데.
‘천하의 유진한테도 이건 쉽지 않은가 보네.’
그 적어놓은 내용에 제이든은 또 한 번 미안해졌다.
[동화 작가]
[나처럼]
[지금 나처럼]
[여러 아이디어를 고민하는···]
유진은 ‘나처럼’이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여러 번 쓰다가.
손이 잠시 느려졌고, 화면 속 텍스트에 가만히 시선을 가져가는가 싶더니.
“···.”
이내 다음 순간.
타다다닥—
빠르게 다음 문장을 적었다.
[‘액자식 구성’의 소설은 어떨까]
···액자식 구성이라고?
제이든이 그것을 보고 눈을 깜빡이는데.
[매번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느라 고민이 많은 동화 작가]
[그 작가가 쓰는]
[알파벳의 이상형 찾기 이야기 곧···]
메모를 적어나가는 유진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깃들었다.
[“영혼의 단짝을 찾아 나서는 알파벳 D”의 이야기]
탁!
거기까지 쓰고 엔터를 친 권유진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기색이 가득했고.
“···.”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던 제이든은 순전한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대체 이번엔 어떤 색다른 이야기를 보여줄까,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