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110화 (110/126)

알파벳과 이상형(2)

*

그날 오후.

나는 집에 오자마자 방금 전 문예창작 클럽룸에서 떠올려본 아이디어를 다시 한 번 정리하기 시작했다.

[동화작가가 쓰는 “영혼의 단짝을 찾아 나서는 알파벳 D”의 이야기]

[여기서 주인공은 어떤 사람일까]

즉, 기본이 되는 아이디어에서 일련의 시놉시스를 구성해나가는 과정.

‘주인공은··· 아까 생각했던 대로 동화작가.’

근데 이 작가는 어쩌다가 ‘알파벳’이라는 마이너한 소재로 동화를 쓰게 됐을까.

자의로? 아니면···.

흐음, 짧게 고민했다가 이내 떠오르는 생각을 화면에 적었다.

[한때는 엄청난 인기작을 발표했던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였지만]

[이후의 차기작들이 매번 기대에 미치지 못해 고민에 빠진 작가]

그러다 슬럼프에 빠졌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져서.

“···기획작을 쓰게 된 거지.”

기획작이란 출판사 측에서 먼저 컨셉과 주제를 확정한 뒤 작가에게 요청해서 만드는 작품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받은 기획이 바로-

“알파벳에 관련된 이야기.”

즉 어린이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알파벳 학습용 워크북에 함께 실리는 짤막한 동화를 의뢰한 것.

어찌 보면 작가로서는 내키지 않는 기획이겠지만.

[그럼에도 주인공은 뻔하디 뻔한 동화는 쓰고 싶지 않았던 것]

‘알파벳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참신하고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풀어낼지를 주인공은 꾸준히 고민한다.

그러다 그때-

“여기서 조언자 겸 조력자가 등장하는 거지.”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타이핑을 이어나갔다.

[조력자는 어떤 스타일일까]

[일단은··· 주인공의 책을 담당하는 편집자이고]

으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조력자 캐릭터의 대략적인 설정을 적어나갔다.

[평소에도 많은 대화를 나누는, 마음 속 고민까지도 털어놓는 사이]

···그런 고로, 주인공은 이 담당 편집자에게 이번 알파벳 동화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게 되는데.

“그때 편집자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거야.”

[‘알파벳이 여행을 떠나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알파벳 D는 왜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

그거야 당연히-

“영혼의 단짝, 즉 ‘쌍둥이 알파벳’을 찾으러, 가는 거지.”

그런 결론을 내림과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여과 없이 화면 위로 옮겨낸다.

[이렇게 수많은 알파벳이 주변에 있지만

그중 누구 하나 내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알파벳이 없으니까

그러니 나는 나와 똑같은

쌍둥이 알파벳을 찾으러 갈거야]

그렇게 알파벳 D의 여정이 시작된다.

이웃 마을에도 가보고 산도 넘고 바다도 건너고···.

[그러다 알파벳 D는

저 건너편 마을에, 또 다른 D가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일단은 거기까지 적어놓은 뒤.

워드 파일의 맨 첫 부분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읽어봤다.

[가제 - <알파벳 D의 이야기>

형식 - 액자식 소설

주인공 - 동화작가.

‘운명의 짝을 찾아나서는 알파벳 D의 이야기’라는 동화이자 작중작을 집필하는···]

아니, 역시 이걸로는 많이 아쉽다.

물론 이번 단편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마음으로 쓰는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기왕 공을 들여 쓰는 만큼···.’

미간을 좁힌 채 잠시 고민에 잠겼고, 그 뒤에 이어질 문장을 생각해냈다.

“···나를 좀 더 담아내는 글이 되면 좋겠는걸.”

그래. 그때 를 쓰며 느끼지 않았던가.

나의 경험, ‘나 자신’을 담아낼수록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글이 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번 <알파벳 D의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 작가인 만큼, 슬럼프에 빠져 있던 때의 나를 떠올려보면 어떨까.’

그런 결론에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던 그때.

지잉- 하며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가 왔다.

[미스터_케빈 : 작가님 주말에 연락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만 갑작스러운 제안이 들어와서···]

단편집을 출간해보지 않겠냐는, 출판사의 제안이 들어왔다는 것.

책을 출간하는 거야 한두 번 해본 일이 아니긴 하지만.

이번 제안은 조금 색다른 부분이 있었다.

‘에곤 K나 베니 르 레푸스의 이름이 아닌.’

···나의 본명 권유진으로 단편집을 출간하자는 것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

나는 워드 파일의 정리를 마친 뒤, 곧바로 미스터 케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스터 케빈, 보내주신 메시지 잘 받았습니다.”

-아 작가님, 바로 보셨군요. 어떻게, 생각이 좀 있으실까요?

“물론 를 표제작으로 하자는 제안이겠죠? 연극이 상당히 화제가 되고 있으니까.”

- 네 맞습니다.

하나의 연극이 흥행에 성공할 경우.

짧게는 몇 개월에서부터 길게는 1년 가까이 공연이 이어진다.

‘물론 이 경우, 젬마가 나가고 아예 다른 배우로 교체될 수도 있겠지만.’

어디 그뿐인가.

꾸준한 흥행이 담보되는 연극은 이후에도 재정비를 거쳐 수차례 재상연되고.

더 나아가서는 해외 판권이 팔려나가기도 하는 식이니까.

그리고 안 그래도 단편 는 <스콜라스틱 수상집 컬렉션>에 묶인 채 출간된 상태였는데, 이 수상집 컬렉션 또한 연극 의 여파로 판매수치가 확 올라간 모양이었다.

‘···그래서 표지갈이도 한다고 들었으니까.’

그러나 미스터 케빈의 설명에 따르면, 연극의 흥행으로 인한 부대효과만을 노리는 건 아닌 듯하단다.

-물론 그게 첫 번째이긴 하겠지만, 유진 작가님의 이전 작품들도 쭉 꿰고 있더군요.

한때 북튜버나 북톡커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단편 <6인의 고백>도 꼭 같이 실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음.’

솔직히 말하면, 지금껏 들어온 제안 중 제일 구미가 당기는 것이긴 했지만.

-하지만 이 작품들만으로는 한 권 분량이 안 나오니, 기존에 써두셨던 습작이 있다면 그것들을 함께 싣는 건 어떨까요.

이어지는 미스터 케빈의 의견에 곧바로 대꾸했다.

“그건 어렵겠는데요.”

-아··· 작가님 성격상, 역시 습작을 출간하는 건 어려우시겠군요. 잘 알겠습니다.

“네? 딱히 그런 건 아니고.”

나는 가볍게 헛기침하고는 덧붙였다.

“그, 책에 실을 만할 습작을 딱히 써놓질 않아서요.”

-···네?

한순간, 자기 귀를 믿지 못하는 눈치의 반응에 나는 말을 흐렸다.

“음, 그게. 물리적으로는··· 없다는 얘기인데.”

예전에 습작을 제법 쓰긴 했지만, 개중 괜찮은 것들은 원고를 잃어버렸다든가.

지금 수중에 남은 것들은 너무 어릴 때 쓴 거라 차마 남에게 보여줄 수 없다든가.

그런 핑계 아닌 핑계를 듣고 나서야 미스터 케빈은 -아주 조금- 납득한 눈치였다.

-아··· 너무 어릴 때 쓰신.

“네.”

-그러니까 뭐, 중학생 때나 초등학생 때라든가.

“아 뭐, 굳이 따지자면 그런데···.”

이럴 때는 여전히 좀 민망하고 찔리는 기분이 드는걸, 생각하던 그때.

[···운명을 찾아나서는 알파벳 D의···]

방금 전, 얼개만 잡아놓고 저장해둔 워드 파일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안 그래도 새로운 단편의 집필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던가.

지금 여기서 좀 더 제대로 살을 붙이고, 공을 들인다면···.

‘어쩌면 이 <알파벳 D의 이야기>까지 묶어서 단편집을 기획해보는 것도 괜찮겠는걸.’

하지만 그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생각해볼 문제였다.

지금 당장은 눈앞에 쌓인 일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으니까.

어쨌거나-

“뭐 지금은 무리이지만, 나중에 한두 편 정도 더 써서 그것과 같이 묶어서 출간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요.”

-오, 그것 좋겠군요. 그럼 일단 그쪽에도 그런 식으로 전달해두겠습니다.

“좋습니다.”

흔쾌히 그러자고 하니, 스마트폰 저편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났다.

*

그다음 주, 뉴욕에 위치한 리암홀트 빌딩.

‘에곤 작가님의 조언을 꾸준히 따라서 그런가.’

몇 주간 건강한 식단을 꾸준히 유지해온 덕분일까.

요즘 시드니는 거울을 볼 때마다 피부가 반짝반짝 빛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혈색이 좋아 보인다든가, 화장품 바꿨냐는 말도 들었지.’

하지만 제일 큰 차이라면 아무래도···.

“요즘은 커피를 안 마셔도 피곤하지가 않다니까.”

“커피?”

“응. 원래는 사무실 오자마자 머그컵 큰 걸로 잔뜩 내려서 마셨는데···.”

하루에 에스프레소 4샷을 마셔도 잠이 잘 안 깼다는 그녀의 말에 닉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카페인 중독이었던 거 아냐?”

“음, 중독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정해진 시간에 자고 일어나고 식사를 든든히 한 덕분인지.

“커피를 안 마셔도 괜찮더라고.”

“그것 참 다행이네. 에곤 작가님이 사람 한 명 살리셨어.”

“그 정도까지야.”

시드니 본인은 그저 흐뭇해하는 듯했지만, 옆에서 보기에는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예전의 시드니 캘러한은 남들의 두세 배는 일하는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정시퇴근을 준수하며- 동일한 양의 일을 하고자 2배의 밀도로 시간을 보내는 느낌이랄까?

남들이 100페이지 분량의 교정을 끝낼 시간에 그녀는 200페이지를 해내곤 했는데, 에곤 K 아니 유진이 그 광경을 봤다면.

‘5분마다 의식적으로 눈을 깜박이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쉬지 않고 화면을 보는 습관은 안구건조증의 원인이 되는 만큼···(후략)···’

-같은 유의 잔소리를 쉴 새 없이 늘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정시 퇴근을 하고, 30분마다 간단히 스트레칭이라도 하는 지금이 훨씬 나은지도 모르겠다- 닉은 그런 결론을 내렸다.

여하튼 그런 동료의 평가대로, 시드니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업무를 해나가고 있었다.

여러 작가의 작품을 동시에 착착 진행해나가는 와중에도, 리암홀트의 상반기 메인 타이틀인 <캐슬>의 사전 준비 또한 빈틈없이 해나가고 있었으니까.

···그중 가장 핵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디오북’이었다.

에곤 K의 전작들은 이제야 오디오북 계약을 따로 체결한 만큼 뒤늦게 제작이 진행되는 중이라면.

‘<캐슬>은 아예 저작권 계약을 할 때부터 종이책, 오디오북, 이북을 묶어서 계약했으니까.’

이미 꽤 많은 팬들이 그의 작품이 오디오북으로 출간되길 기다리고 있는 상황.

오늘날 60억 달러 선을 넘어선 미국 오디오북 시장은 더 빠르게 성장하는 중인데.

이는 운전하면서 오디오북을 듣는 독자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오디오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괜찮은 성우를 섭외하는 거지.”

시드니는 자신이 보내놓은 메일내용을 다시 한 번 훌어보았다.

미국에서는 유명 배우가 성우 일을 겸하는 경우가 제법 되는데.

그녀는 오늘날 이 오디오북 시장의 S급 성우라 할 수 있는 인물에게 제일 먼저 이 <캐슬>의 오디오북 녹음 제안을 넣어놓은 상태였다.

‘···솔직히 크게 기대는 하지 않지만.’

리암홀트뿐 아니라 수많은 회사들에서 이런 유의 제안을 수없이 받았을 테니 이미 일정이 꽉 차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웬만한 책은 대부분 거절하기로도 유명하니까.’

그래도, 만의 하나 가능할까 싶어서 그냥 보내본 것이었다.

소개서도 온힘을 다해 공들여 썼고 말이다.

‘정말 훌륭하군, 시드니. 이거라면 그 어떤 콧대 높은 성우라도 넘어갈 것 같은데.’

그녀가 작성한 <캐슬>의 소개서 및 시놉시스를 읽어본 제임스 편집장 또한 감탄을 금치 못한 바였다.

‘정말이십니까?’

‘그럼 그럼. 물론 <캐슬>이야 워낙 작품이 재미있는 것도 있지만.’

분량이 제법 되는 보고서를 툭 두드리며 편집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정말로 한눈에 쉽게 이해가 되면서도, 굉장히 혹하도록 재미나게 잘 써놨어.’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시놉시스를 형편없게 쓰면 상대를 매혹할 수 없듯.

시놉시스 자체의 매력에 따라 계약의 향방이 갈리기도 하는 법이었다.

그렇게, 시드니가 잠시 그때 일을 회상하고 있던 중.

“···어.”

띠링-

그녀가 보내놓은 메일에 답신이 도착했다.

“···!”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것은, 시드니 자신뿐이 아니었다.

회사 전체 계정을 참조로 달아둔 탓에-

“잠깐만 시드니, 이거 진짜야? 메일 보낸 사람이···.”

닉을 비롯한, 문학1팀 편집자들 대부분이 시드니를 돌아보았다.

[발신인: [email protected]]

[제목 : <캐슬> 오디오북 녹음 계약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닉의 말에 대답조차 못한 채.

“···!”

시드니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닉과 그녀가 이렇게 놀란 것은 바로 메일의 발신인이-

‘롤랜드 블랙우드.’

영화, 드라마, 연극, 오디오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에서 종횡무진 활약해온 40년 경력의 토니상 수상 배우이자.

‘본인부터가 문학적 재능이 풍부한, 에세이 작가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불후의 명작이라 불리는 프랭크 허버트의 SF 고전 <듄>의 20주년 기념판 오디오북의 총괄 성우를 비롯, 수많은 역작 오디오북의 성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덧붙이자면-

‘억만금을 줘도 데려오기 어려우며, 오로지 본인이 높이 평가하는 작품의 오디오북에만 출연을 결정하는 성우로 유명하지.’

시드니는 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메일을 열어보았다.

[안녕하십니까, 롤랜드 블랙우드입니다.

보내주신 메일은 잘 받아보았습니다.

<캐슬>의 소개서 및 시놉시스 또한 읽어보았는데··· (중략)··· 정말로 매력적인 작품이더군요.

일정만 잘 맞출 수 있다면, 이 작품의 오디오북 성우로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롤랜드 블랙우드]

정말로, 롤랜드 블랙우드가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그녀는 어질어질한 기분으로 메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오디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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