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다시 한 시간 전.
맨해튼의 어퍼웨스트사이드에 위치한 고급 맨션.
“···다시 읽어봐도, 정말로 대단하군.”
어느새 60대 후반을 바라보는 원로 배우 롤랜드는 <캐슬> 원고를 읽으며 다시금 감탄하는 중이었다.
반백의 머리에 작은 키, 주름이 깊은 얼굴과는 달리 두 눈동자만큼은 젊을 때처럼 예리하게 빛난다.
사라락-
힘줄이 불거진 손 아래서 원고 종이가 빠르게 넘어갔다.
“···하, 재밌어. 아주 재밌구만.”
롤랜드는 본인부터가 문학적 소양이 상당한 작가인 만큼, 그 어떤 성우보다 소설 본연의 맛을 살려서 낭독하는 성우로 유명하기도 했는데.
‘젊을 적엔 힘이 넘치다 보니 가리지 않고 이 작품 저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며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히고, 작품 보는 눈 또한 높아졌으며, 더는 생업을 위해 오디오북 녹음을 할 필요가 없어진 만큼.
10년 전부터는 본인의 마음에 꼭 드는 작품만 녹음해왔다.
그런데 이번에 -평소에도 제법 괜찮은 책을 낸다고 생각했던- 출판사 리암홀트에서 보내온 <캐슬>의 소개서를 읽었을 때.
‘···이렇게 구미가 확 당기는 느낌은 오랜만인걸.’
하지만 어쩌면, 이는 담당자가 소개서를 읽기 쉽고 흥미롭게 작성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그는 소개서만 봤을 땐 재밌어 보였지만, 작품을 펼쳐보니 영 아니었던 경우를 제법 접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전체 원고를 다운받아서 읽은 지 한 30분쯤 지났을까.
‘···이건 물건이로군.’
어느샌가 자신이 이 책의 오디오북 녹음 요청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저 한 명의 독자가 되어 이 <캐슬>의 세계 속을 탐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한참을 읽다가 드디어 밝혀진 반전에-
“맙소사···!”
소리 내어 경악의 신음을 뱉은 것은 물론.
그 후로 주인공 라이언이 느끼는-
‘보잘 것 없는 자신을 향한 자괴감과,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자아로 태어나는 모습들.’
그 다채로운 감정들이 주인공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지켜보며 수없이 감탄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이르자-
“아, 이 부분을 이렇게 녹음하면··· 아주 재밌을 것 같은데?”
벌써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눈앞의 문장들 하나 하나를 자신의 목소리로 세세한 호흡과 리듬을 조절해가며.
여러 캐릭터들의 다채로운 음색을 맛깔나게 변주해가며-
‘거기에 한 방울의 영혼까지 실어서.’
듣는 이의 심장을 절절하게 울리는 녹음을 해보고 싶다는 열정이 끓어올랐다.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겠군.”
아직 끝까지 읽지도 않았는데도, 원로 배우는 젊은 시절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저도 모르게 곧바로 책상 앞으로 가서-
[제목 : <캐슬> 오디오북 녹음 계약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답장 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롤랜드 블랙우드입니다.
보내주신 메일은 잘 받아보았습니다···]
혹시나 그 사이에 다른 누군가가 이 작품을 채가면 어떡하나- 그런 조바심이 아주 오랜만에 든 탓이었다.
*
벌써 1월 3주차가 되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 정신없이 바빠진 탓에 <알파벳 D의 이야기>는 지난 2주간 손도 대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을 꼽아보라면.
“드디어, 드디어 끝났드아아아!”
···바로 <캐슬>의 퇴고를 마무리했다는 것.
‘초중반부는 좀 힘들었지만.’
퇴고 자체에 속도가 붙어서이기도 하고, 뒤로 갈수록 초고의 수준도 나아진 덕분에 한결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빠르게 했다고는 해도, 돌이켜보면 지난 겨울방학을 통째로 이 <캐슬>에 쏟아부은 느낌이긴 하지만.
‘···이젠 이걸 정리만 해서 담당자님께 보내야겠네.’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지잉-
핸드폰 진동음과 함께 메시지가 왔다.
[리암홀트편집부_시드니 : 음, 저, 에곤 작가님]
[리암홀트편집부_시드니 :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만 급하게 전해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시드니 담당자에게서 온 메시지에 나도 모르게 시계를 확인해보았다.
“잠깐만, 지금 7시가 다 됐는데.”
매일 5시에 정시퇴근하겠다더니 다시 야근을 시작하신 건가.
하긴 잔소리를 한 지 시간이 좀 지났으니 약발이 떨어질 때가 되긴 했다.
‘물론 담당자님이 성실한 건 감사할 일이지만.’
야근과 과로의 위험성에 관해 얘기드려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채팅에 임하려던 순간.
이내 이어진 메시지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리암홀트편집부_시드니 : 혹시 배우 롤랜드 블랙우드라고 아시는지요]
[리암홀트편집부_시드니 : <듄>의 20주년 기념판 오디오북 성우를 담당하신 분인데···]
그 이름을 모를 리가 있나.
“···롤랜드 블랙우드라고?”
나 또한 몇 번은 반복해 들었던, <듄> 오디오북 속의 목소리.
기본적으로 중저음의 듣기 좋은 음성이지만,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음색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이른바, 천의 목소리를 지닌 배우로 유명하지.’
그뿐 아니라 대화가 아닌 지문에서도, 그 긴장감과 압박감을 십분 살려내는 그야말로 타고난 명성우가 아닌가.
그런 만큼 굉장히 까다로운 안목으로도 유명한 이 롤랜드 블랙우드가-
“진짜로··· <캐슬>의 녹음을 맡게 됐다고?”
너무 놀란 나머지, 시드니 담당자의 메시지가 쏟아지는 가운데에도 곧바로 답을 하질 못했다.
*
유진의 작품 가운데,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 것은 비단 <캐슬>뿐이 아니었다.
이미 옥션을 오픈한 지 꽤 시일이 지난, <토끼 남작의 모험> 시리즈의 해외 판권도 세계 각국에서 속속들이 선인세 딜이 진행되는 중이었는데.
“팀장님! 정 팀장님—! 저희, <토끼 남작> 따냈어요—!”
···그 가운데는 한국어 번역 출판권을 획득한 출판사 ‘문학마을’도 끼어 있었다.
“소희 대리, 진심 축하해.”
“으흐흐흐, 감사해요! 와 진짜, 저희 다들 엄청 조마조마해한 거 아세요?”
엄청난 액수를 질렀다고 덧붙인 김소희 대리가 웃으며 정연희 팀장을 돌아보았다.
“근데, 어떻게 보면 저희 아동팀이 정 팀장님한테 감사해야 되는 거 있죠?”
“나? 나한테 왜?”
점심을 먹고 회사 근처 카페에 잠깐 들른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아니 아니, 솔직히 에곤 K 타이틀 말이에요. 그게 이렇게까지 대박 나지 않았으면, 어디 우리 문학마을이 그렇게 큰 돈을 내놓을 수 있었겠어요?”
···선인세로 1억을 질렀다는 말에, 정연희 팀장의 눈이 커졌다.
“진짜? 1억이라고?”
“네, 1억. 부르는 김에 팍 질렀어요. 다른 곳에서 자꾸 선인세를 높여 불러서 이 이상으로 넘어갈까 봐 엄청 불안해했는데, 다행히 거기까진 안 올라가더라고요.”
하긴, 요즘 출판업계의 불황이 역대급이 아닌가.
물론 단군 이래로 책 시장은 불황이 아닌 적이 없다고 하지만···.
점점 지갑을 닫는 마당에 아무리 대형 베스트셀러라고는 해도 1억 넘는 금액을, 그것도 신규 아동서 시리즈에 내기는 쉽지 않았을 터.
그런 가운데서 이 문학마을 출판사가 이렇게 과감하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사실, 김 대리가 한 말이 맞긴 하지.’
에곤 K의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가 예상 외로 커다란 성공을 거둔 덕분이 맞았다.
덕분에 출판사에 여유 자금이 두둑하게 생긴 셈이기도 했으니까.
“후우, 그러니 그런 의미에서라도 작가님이 한국에 오실 수 있음 좋을 텐데.”
“으흐흐, 그건 지금 어려우니 대신 <토끼 남작> 저자들이라도?”
아예 올해 도서전에서 아동팀이 이 고등학생 저자들을 초청하면 어떻겠냐, 라는 김소희 대리의 말.
“그것도 좋겠네.”
···정연희 자신과는 구면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때 북콘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김 대리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때 직접 만나보셨다고 했잖아요. 어땠어요?”
“권 대표님이랑 똑 닮았는데 좀 더 곱상한 외모? 약간 남자 아이돌 느낌 나더라.”
“오, 정말요? 그럼 현장에서 독자들한테 엄청 인기 많겠는데요?”
김소희 대리가 벌써부터 눈을 반짝이는 가운데.
정 팀장은 얼마 전 권상준 대표와 주고받았던 메일 내용을 떠올렸다.
[···하하, 그렇게 축하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저도 좀 더 자랑하고 싶은데 유진이 녀석이 자꾸 말리는 통에···.
그리고 사실, 이번에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긴 한데.]
권 대표는 신이 나 아들 자랑을 덧붙였다.
그것은 바로-
“스콜라스틱 공모전? 이라는 전국 공모전에서 금메달 수상해서, 장학금 받고 대학 조기입학할 예정이라고 하더라고.”
“우와, 부모님이 자랑할 만한걸요.”
“그러게. 아들을 참 잘 키우셨어.”
···스콜라스틱 수상작으로 뽑힌 그 소설이, 심지어 뉴욕의 브로드웨이 연극으로 각색되어 상연 중이라는 사실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고 정연희는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유진의 가 실렸다는 <스콜라스틱 공모전 수상집>을 주문해놓은 터였는데.
“정 팀장님, 택배 왔어요.”
커피 타임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자.
그녀의 책상 옆에 기다리던 택배가 도착해 있었다.
‘···와.’
상자에서 나온 것은 기다렸던 대로 공모전 수상집이었는데.
라는 제목이 큼지막하니 박힌 연극 포스터 이미지를 사용해 리커버한 표지가 인상적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그냥 이 AI 데이지 단독 작품집인 줄 알겠네.’
아마 출판사에서도 그 점을 노리고 리커버를 했겠지만 말이다.
“이게 뭐예요? ?”
“아, 그러니까 말이지···.”
그녀가 직접 사비로 주문한 해외 원서를 궁금해하는 주변 편집자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권상준 대표님··· 아드님이요?”
편집자들의 눈이 모두 휘둥그레졌다.
“와, 엄청나다.”
“완전 천재 아냐 천재?”
“그러게. 아니 난 사실 그 <토끼 남작> 말예요. 아동팀에서 낙찰받은 책. 그게 대표님 아드님 쓴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세상 참 좁다니까요?”
다들 신이 나서 얘기하는 가운데.
정연희 팀장은 가만히 수상집을 펼쳐서 를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훌쩍- 하는 소리에 그녀를 돌아본 다른 편집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 팀장님, 울어요?”
“···내가 뭐 운다고.”
자기도 모르게 코를 훌쩍인 바람에 빨개진 눈가를 들키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후우, 정연희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제 감정을 달랬다.
사실 그녀는 권상준 대표의 개인적인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출판계에서 10년도 더 전부터 거래해온 관계이기도 하고.
업계가 좁은 만큼 건너 건너 소식을 다 듣게 마련.
‘어쩌면 그런 어린 나이에 그런 상실의 경험을 한 까닭에··· 이렇게 나이답지 않은 글을 쓰게 된 것이 아닐까.’
그녀는 아주 오래전 권상준 대표 아내의 장례식에 갔을 때를 떠올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데이지.
D-A-I-S-Y.
매일 같이 불러보지만, 공기 중에서 공허하게 흩어지는 소리···]
마치 머릿속으로 소리내 읽듯이 소리와 운율에 집중해 문장 하나 하나씩을 음미해보는데.
‘뭐랄까, 이 문장들의 리듬이며 색깔이···.’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잠시 두 눈을 깜박이던 그녀의 시야에, 책상 저편에 올려둔 에곤 K의 신작 <캐슬> 원고가 들어왔다.
그의 신작 소식이 한창 미국 출판계에 돌 때, 라이터스홈의 동아시아권 협력사인 켈리장 에이전시에 요청해 받아본 영문판 초고였다.
[성은 살아 있었다.
그것은 주민 모두가 공유하는, 돌처럼 단단하고도 강력한 믿음이었다···]
‘어, 그러니까···.’
그래, 바로 이런 느낌이다.
외국인이 읽기에도, 그러니까 모국어 화자가 아닌 사람이 읽기에도 무리가 없는-
‘굉장히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 구조를 사용하는 영어.’
그리고 그것을 정연희는 에곤 K 특유의 문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 도 굉장히 읽기 쉽고 간결명료했어.’
잠깐만, 그럼 설마 에곤 K가···.
“에이, 아니지. 말도 안 되는 얘기야.”
멍하니 있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옆자리의 편집자가 돌아보았다.
“말도 안 된다뇨, 뭐가요?”
“아 그게, 에곤 K가 만약에라도 진짜 고등학생이라면-”
“푸하하, 팀장님까지 왜 그러세요. 안 그래도 저도 그 에곤 K 얘기로 미국 SF 커뮤니티에서 난리난 거 봤어요.”
그래, 진짜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맞긴 하다.
‘하긴 그럴 리가 없지.’
아무리 정연희 자신이 영어를 좀 한다고 자부하는 편이라고 해도, 자신은 어디까지나 외국인 화자가 아닌가.
아마 진짜로 문체가 비슷하다기보다는, 자신의 눈에 쉽게 잘 읽혔다는 그 공통점 하나만으로 거대한 착각을 해버리고 만 것일 터.
‘···다른 사람들한테 에곤 K와 권유진의 문체가 비슷하단 얘기를 안 꺼내길 잘했네.’
앞으로도 계속 입 밖에 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음, 다른 수상작들도 시간 날 때 읽어볼까.”
정연희는 가 실린 수상 모음집 쪽으로 시선을 다시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