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자식 소설(1)
*
한편 그 시각,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명문사립 고등학교 아이딜와일드아카데미.
문화예술에 특화된, 미국의 3대 예술 고등학교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 이곳에서-
“와, 표지 죽여준다.”
‘문예창작 전문 진학준비반’ 학생들은 한 권의 책을 두고 열렬하게 대화하는 중이었다.
“젬마 도노반 말야, 이렇게 연극 포스터 찍어놓은 거 보니 되게 느낌이 다르지 않아?”
“그러게, 둘 다 같은 사람인데 느낌이 엄청···.”
“1인극 궁금하긴 해.”
“그래 봤자 젬마 도노반이 하는 건데? 솔직히 기대되기보단 걱정이···.”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바로 얼마 전, 젬마 도노반 주연의 연극 포스터로 리커버된 버전의 <스콜라스틱 수상작 모음집>.
“흐흐,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단독 작품집인 줄 알겠어.”
“근데, 솔직히 이 는 같이 실린 작품들과 차원이 다르긴 하더라.”
“어어, 나도 이게 진짜 고등학생이 쓴 게 맞나 싶었음.”
“그거 쓴 애가 <토끼 남작> 저자라며?”
“와, 이건 좀 사기 아니냐.”
“사기캐 부럽다··· 난 언제까지 이놈의 입시 대비 글쓰기를 하고 있어야 하나.”
이들은 모두 문예창작과를 지망하는 학생들이었는데.
대부분이 이 분야의 명실상부한 1티어라고 할 수 있는 아이오와대, 컬럼비아대, 브라운대 등을 지원하고자 했다.
덧붙이자면 권유진의 가 표제작처럼 실린 이 작품집에, 자신의 작품이 실린 학생들 몇 명도 이 자리에 있었다.
“야, 니들 아까부터 너무한 거 아냐?”
“그래 그래, 설마 만 읽은 건 아니지? 내 거는?”
“흐흐, 당연히 니들 것도 읽었지···.”
다들 낄낄거리며 농담처럼 얘기하는 가운데, 깡마른 체구의 동양인 학생 한 명은 아까부터 불편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찬가지로 이 스콜라스틱 수상집에 작품이 실린- 중국계 미국인 2세 학생 채드 왕.
중국계 기업을 운영하는 부모를 둔, 부유하기 그지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목표는 가장 화려한 커리어를 쌓은 채로 아이오와대학에 진학하는 것이었는데.
이번 공모전의 단편 부문에서 -에 밀려- 은메달을 받은 학생이기도 했다.
“···하, 12학년도 아니고 11학년 작품을 이렇게 메인으로 뽑아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채드의 중얼거림에 다른 학생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아 맞다, 왕 네가 2위였지.”
“크크크, 질투가 나긴 하겠네.”
“···다들 닥쳐.”
사실 채드 왕은 이 진학반의 에이스나 마찬가지였다.
이전에도 수많은 공모전에서 수상했으며, 작년에 출간한 개인 단편집은 각종 지역지와 문학지에 소개되며 괜찮은 평가를 받았으니까.
‘무조건 1위가 되어야 한다, 채드.’
‘그래, 설령 문학의 세계라 해도 그 안에서 서열이 나뉘기 마련이니까.’
‘우리 얼굴에 먹칠하지 않도록···.’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기업을 물려받으라는 부모의 명령을 거부한 채 시작한 문학의 길이 아닌가.
‘유진··· 권? 정말로 마음에 안 들어.’
그런 와중 자신이 받아야 했을 금메달을 채어가는 것은 물론.
모두가 그 결실을 공유해야 하는 작품 수상집에서조차 혼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 상황이 채드 왕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
가만히 지켜보는 누군가에게, 그녀의 친구가 말을 붙였다.
“헤이즐, 근데 넌 왜 갑자기 아이오와대로 지망 변경한 거야? 원래는 컬럼비아대 간다고 했잖아.”
“그냥, 생각이 좀 바뀌어서.”
“···으으, 그럼 저 재수 없는 채드 자식이랑 같은 과로 가게 될 텐데.”
채드 왕을 힐긋거리며 혀를 차는 친구의 모습에, 여학생은 어깨만 으쓱했다.
“뭐, 상관없어. 쟤가 좀 짜증 나는 스타일이긴 해도, 글러먹은 인간은 아니니까.”
“진심이야?”
“응?”
“···아무리 봐도 너 예전이랑 너무 다르단 말야.”
“그래서, 싫어?”
그 말에 친구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그럼 됐지 뭐.”
그녀 또한 생긋 웃으며 책상 위에 올려둔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대되는걸.’
포스터로 리커버된 책을 보며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
금요일 저녁, 시드니 담당자에게서 그런 연락을 받은 이후.
‘롤랜드 블랙우드라니!’
나는 주말 내내 잔뜩 들뜬 기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듄>에서 들었던, 폴 아트레이데스의 목소리가 <캐슬> 속 라이언의 목소리가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오는 가운데.
“그건 그렇고, 이제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해볼까.”
나는 자신만만한 기분으로 <알파벳 D의 이야기> 워드 파일을 불러냈다.
[<알파벳 D의 이야기>]
한겨울 한기가 온 집안에 가득한 와중, 두꺼운 카디건을 걸친 채 본격적인 고민을 시작했다.
‘첫 문장을 시작하기 앞서, 일단은 시점부터 결정해야지.’
앞서 작품들은 모두 3인칭으로 썼다면, 이번 단편은 주인공이 작가이기 때문일까.
유독 주인공이 나 자신 권유진과 좀 더 가깝게 느껴진다.
‘그러면 역시 1인칭, 나- 로 진행하는 것이 좋을까.’
그동안 정리해놓은 아이디어를 쭉 훑어본 뒤, 가볍게 첫 문장을 썼다.
[나는 한때 베스트셀러 작가였다(I was once a best-selling author).]
음, 나쁘지는 않은 서두이지만···.
잠깐 고민에 잠겨 있던 그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탁, 타다닥-
[당신은 나를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불러도 무방하다(You can call me ‘bestselling author’.)
그것은 1인칭과 유사하지만, 조금 다른 느낌을 주는-
‘2인칭.’
이번 작품은 ‘you’를 주어로 삼아서, 그것도 현재 시제로 집필해볼 생각이었다.
독자들에게는 조금 낯설게 느껴지지만, 단편에서는 종종 사용되는 방식이기도 하니까.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한때의’ 베스트셀러 작가 말이다.]
첫 문단을 끝내고 나자, 키보드 위를 움직이는 손가락의 속도가 빨라진다.
[당신은 거울을 마주 본다.
짧은 머리에 흐리멍텅한 눈빛.
언제 감았는지 감도 오지 않는 부스스한 머리.
“···이제는 정신을 좀 차려야지.”
당신은 거울을 보며 혼잣말을 한다.]
문장을 쓰면 쓸수록.
단편 속의 주인공이 되는 느낌에 사로잡히는 기분.
[당신을 덮친 것은 지독함, 무기력함, 또 다른 말로 하자면 슬럼프다.
그것은 어느 한순간 우리의 내면에 그림자처럼 숨어들어와, 기쁨으로 빛나던 마음을 검게 물들이는 자객과도 같다.
머릿속에서 반짝이는 영감들을, 어떻게든 태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소리 없이 죽여버리는 암살자.
···그래, 당신은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한 번 물꼬가 트이고 나니 그다음은 거침이 없었다.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키보드 위를 질주한다.
[그런 당신에게, 출판사에서 보내온 의뢰는 어쩌면 그 지독한 슬럼프의 늪에서 당신을 구해줄 마지막 희망인지도 모른다.
‘기획작이란 말이지.’
어느 정도 이름값이 있는 작가라면 여간해서는 받아들이지 않으며, 보통은 신인에게 돌아가고는 하는 일.
그러나, 얼마 전 통화에서 들었던 당신의 담당 편집자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건, 작가님을 위한 일이기도 해요. 기획작이든 뭐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
-저는··· 이번 의뢰가, 작가님이 예전처럼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고 편하게 글을 쓰는 계기가 되어 줬으면 좋겠어요.
필명을 쓰든 뭘 하든 상관없으니, 머리를 맞대고 자신과 함께 고민해봤으면 좋겠다는 편집자.
그래. 그런 편집자가 모든 작가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당신은 잘 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자신이 어느 정도는 운이 좋은 작가라는 것을···]
그 부분을 쓰고 있자니, 문득 예전에 편집자로서 일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전에 나도 내가 담당하던 작가랑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 그녀도 기나긴 슬럼프로 힘들어했던 것 같다.
그런 담당작가의 마음을 조금 가볍게 해주고자-
‘그럼 작가님이 좀 더 가볍고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글을 써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런 유의 제안을 했더랬다.
그뿐 아니라 근무시간 외에도 종종 만나 사담을 나누고, 그러다 꽤 친해져서 속에 있는 대화까지 가감없이 나누는 사이가 되었는데···.
‘그런 걸 보면 제법 가까운 사이였을 텐데, 이름이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걸.’
하지만 뭐, 결국은 지나가면 그만인 수준의 인연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나는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집착하는 대신 눈앞의 작품에 다시 집중했다.
[···문제는 이번 기획작의 의뢰가 조금 애매하다는 데 있었다.
“알파벳이라.”
알파벳 학습을 위한 아동용 워크북의 마지막 챕터에 넣을 짤막한 동화를 집필해달라는 것.
사실 이런 워크북에 들어가는 동화 수준은 뻔하다.
애초 의뢰하는 출판사에서도 수준 높은 것을 기대하지 않고, 작가 또한 가벼운 마음으로 응하는 것.
그러니 편집자가 말했듯이, 당신도 마음을 좀 내려놓고 편안하게 써보면 좋으련만.
“···이놈의 성격이 문제인가.”
당신은 내려놓는 게 좀처럼 잘 되지 않는다.
자꾸만 더 의미 있는, 근사한, 아름다운, 완벽한 글을 추구하게 되는-
작가의 완벽주의인지 혹은 아집인지를 내려놓기가 어렵다···]
그렇게 나는 한참을 더 집중해서 써내려갔다.
액자식 구성인 만큼, 중간에는 이 주인공의 ‘알파벳 동화’도 적절히 삽입해야 했는데.
‘음, 로알드 달 스타일은 어떨까.’
로알드 달.
우리에게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으로 대표되는 아동문학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풍자와 해학, 위트가 가득한 작가.
나는 그의 문체를 상상하며 주인공의 작중작을 써내려갔다.
[···알파벳 마을에는 독특한 개성의 알파벳들이 살고 있었다.
그중에는 알파벳 D도 있었는데, D는 이 마을에서 자신은 늘 툭 튀어나온 못 같다고 생각했다.
“아, 나와 똑같은 알파벳을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아줄, 마음의 모난 구석마저 이해해줄 단짝.
아주 오래된 외로움을 이해해줄 영혼의 쌍둥이를 찾던 가운데.
“D, 혹시 이 이야기 들어봤어?”
알파벳 D의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이자, 투덜거리고 잔소리도 곧잘하는 조금은 얄미운 친구.
알파벳 B가 놀라운 소식을 들려주었다.
“바다 건너편에, 또 다른 알파벳 D가 있다고?”···]
그동안 <토끼 남작> 시리즈를 써서 그런가, 어느새 동화의 문체에 제법 익숙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문체가 원래 단순하고 명확한 편이니, 동화에 잘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이 <알파벳 D> 이야기도 동화 부분만 따로 떼어내서 클로이에게 들려주면 재미있어 하지 않을까.
주인공은 이 동화를 편집자에게 보여주고, 편집자와 대화를 여러 차례 나눠가면서-
[···그리하여 결국, 알파벳 D는 저 먼나라에 살고 있는 또 다른 D를 만났다.
그토록 기다리던 영혼의 쌍둥이 D는 자신과 모든 것이 같았다.
좋아하는 음식, 책, 운동, 잘 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올리고 자는 습관까지도.
그럼에도, D는 깨달았다.
자신과 똑같은 알파벳과 함께하더라도, 마음속의 구멍은 쉽사리 메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중략)···
그때서야 알파벳 D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이 똑같은’ 쌍둥이가 아님을 깨달았다.
가끔은 의견이 다르고, 가끔은 서로에게 투덜대고, 가끔은 투닥거리더라도···.
“B. 나의 친구 B가 보고 싶어.”]
···날것에 불과했던 동화를 좀 더 정교하고 아름답게 다듬어내는 것.
그 과정을 통해 주인공은 슬럼프를 극복하고, 예전보다 훨씬 더 좋은 작품을 완성하기에 이른다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이대로만 끝나도, 충분히 괜찮겠지만.”
하지만 왠지 이렇게 마무리하기는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도 이 주인공, 왕년의 베스트셀러 작가처럼 나름의 고집이나 승부욕이 있는지도.
‘그러니 이 까다로운 키워드들을 뽑았을 때도 어떻게든 제대로 된 소설을 써보겠다며 불타올랐겠지.’
욕심을 부리는 김에 마지막에 트위스트를, 그러니까 반전을 주는 건 어떨까.
1인칭이라면 I, 3인칭이라면 He나 She를 주어로 삼는 대신 You를 주어로 사용한 만큼-
‘조금 더 재미있는 반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두 눈을 반짝이던 그때, 옷장 옆에 있는 전신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내 소설의 바로 두 번째 문장에 등장한 거울.
나는 뭔가에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앞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
매일 아침 보는 익숙한 얼굴을 시야에 담은 채, 방금 전 썼던 문장들을 떠올린다.
[당신은 거울을 마주 본다.
짧은 머리에 흐리멍텅한 눈빛.
언제 감았는지 감도 오지 않는 부스스한 머리···]
천천히 거울 위에 손을 올린 채.
거울 속의 내 얼굴과 검은 눈동자를 지그시 마주 보았다.
그러자 내 손으로 직접 적어넣은, 편집자와 작가 간의 대화가 떠오른다.
[-알파벳 D가··· 여행을 떠나는 건 어떨까요?
-여행이라면.
-영혼의 쌍둥이, 또 다른 D를 찾으러 가는 여정인 셈이죠.]
자신의 짝을 찾아나서는 알파벳 D.
그리고-
‘거울 속에 존재하는, 영혼의 쌍둥이.’
···이내 번뜩, 하고 떠오른 아이디어에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