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자식 소설(2)
*
2월 들어 반가운 소식이 꽤 많았다.
첫째로는, 영화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선댄스 영화제 경쟁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는 것.
나는 기사를 보자마자 바로 막성스 라미 감독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에곤_K : 막성스 감독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선댄스 영화제 관련 기사를 봤는데 정말로···(후략)···]
그것도 극영화 부문 심사위원 대상, 감독상의 2관왕에 빛나는 성과를 거둔 것.
메시지를 보낸 지 30초쯤 지났을까.
잔뜩 흥분한 막성스 감독의 답장이 날아왔다.
[막성스_라미 : 으흐흐흐 작가님!!! 안 그래도 제가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먼저 축하해주시다니요 XD 너무 감사합니다!!! 저희 지금 완전 파티 분위기···(후략)]
극장가에서도 성공적인 성적을 거뒀으며, 거기에 영화제에서까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막성스 감독 얘기로는 2관왕을 거머쥔 덕분에, 영화 <호수괴물>의 방영권 경쟁에 불이 붙었다는 것.
[막성스_라미 : 넷플릭스와 훌루가 판돈을 제일 크게 걸었는데··· 이거 어떻게 될지 감이 안 오네요 아하하]
여하튼.
영화 <호수괴물>이야 전부터 많은 이들이 수상작으로 점쳐왔던 상황이긴 했지만-
“···이건 다들 의외라는 반응인걸.”
또 하나의 좋은 소식.
그것은 연극 의 초연이 대대적인 성공으로 막을 열었다는 것이었다.
[젬마 도노반, 일인극 로 숨겨왔던 연기력 공개]
[‘젬마 도노반, 이렇게 연기를 잘했다고?’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는 1인2역···]
[평론가 켄 미첼, 속 젬마 도노반의 연기는 ‘그간의 논란을 불식시키는 완벽에 가까운 연기’]
···
기사 대부분이 젬마 도노반의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연기력이 너무나 뛰어났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 상황.
‘나야 뭐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이지만.’
회귀 전에는 몇 년은 더 있어야 그녀의 연기력이 재평가받았지만.
이번에는 그 시점이 한참 앞당겨졌다.
‘어디, 간만에 커뮤니티 반응 좀 살펴볼까.’
이런 쪽에 빠삭한 네드가 보내준 링크를 클릭해 들어가니.
[13.4k ai 데이지 직관 후기]
[젬마 도노반 연기 미쳤음
이것밖엔 할 말이 없네 다들 꼭 봐라]
└진짜 그 정도라고?
└‘젬마 도노반이 연기력을 숨김’
└언론들 설레발 아니었음?
└nope
└나도 직접 보기 전엔 그렇게 생각했다
└나도
└그러다 오열하며 나왔지···
└ㅋㅋㅋㅋㅋㅋ
└다들 부모님한테 잘해라 계실 때 잘해야 함
···
어쩐지 댓글 내용이 효도와 건강에 관한 것으로 흘러가는 가운데.
‘내가 다 통쾌한 기분인걸.’
그동안 젬마 배우의 연기력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하던 댓글이 쏙 들어간 것을 보니 괜히 흐뭇하다고 할까.
나는 로렌 루먼 교수님과 젬마 도노반 배우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유진_권 : 로렌 교수님, 젬마 배우님, 의 성공적인 초연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좋은 소식을 덧붙이자면.
[발신인 : [email protected]]
[제목 : 의 원작자 권유진 군에게 특별히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어쩌다 보니 스콜라스틱 공모전 재단에서 따로 감사 메일까지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 연극 포스터로 리커버한- <스콜라스틱 수상작 모음집>이 아마존에서 상당한 인기를 자랑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건, 연극 덕분이 크지.’
이런 유의 책들이야 보통은 늘 보는 사람만 사보는 법인데.
올해는 무려 아마존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그것도 전체 순위 150위, 문학 부문 80위를 기록하는-
‘그야말로 경이로운 수준인 셈.’
여하튼.
나는 틈날 때마다 이 <수상작 모음집>에 실린 작품을 읽어보고 있는데.
그 이름들이 조금 눈에 익어 반가운 기분이 든다.
···이 업계에서 쭉 있다 보면, 회귀 이전의 인연들과도 자연스레 연락이 닿게 되지 않을까.
그러는 한편으로는 꼬박 한 주간 <알파벳 D의 이야기>의 퇴고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어느샌가 전력을 다해 쓰게 되었달까.
···그리고 2월 3주차의 월요일 오후.
나는 원고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난 뒤.
“됐다.”
문예창작클럽에서 쓰는 공용 클라우드에 파일을 올렸다.
*
그로부터 약 5분 전.
제이든은 자신의 방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중이었다.
‘언제쯤 올라오려나.’
그가 받은 키워드는 신기술, 다중우주, 관계, 감정.
한눈에 보기에도 서로 연관짓기 좋은 키워드들이 나온 덕분에 진작 집필을 마쳐서 클라우드에 올려놨다.
“···물론, 빨리 썼다고 꼭 퀄리티가 좋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여기서 이 이상 어떻게 손을 보면 좋을지 모르겠어 그냥 올려버린 것에 가깝긴 했다.
그리고 지금 제이든은 본인의 작품보다도-
“유진이 쓴 건 언제 올라오려나.”
···알파벳이라는 까다로운 키워드를 고른, 유진이 대체 어떤 소설을 써냈을지가 훨씬 더 궁금했다.
‘마감까진 10분 정도 남았네.’
10분이 하루처럼 느껴지는 가운데, 제이든은 지금 자신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보았다.
넘치는 열정에 비해 기술적인 면이 아직 부족한 문예창작 클럽원인 그는 아이오와대학 문예창작과에 들어가길 꿈꿔왔는데.
‘제이든, 솔직히 말하면 지금 네 상황에서 문예창작과를 지원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구나.’
···얼마 전 진학 상담에서 레너드 선생님에게 들었던 얘기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너도 알다시피, 다른 학과는 모르겠지만 아이오와대의 문예창작과는 전국 최고 수준이잖니.’
컬럼비아대, 브라운대 등과 함께 명실상부 문예창작의 명문으로 꼽히는 곳.
그런 만큼 경쟁 또한 몹시 치열하여 제이든도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남은 1년간 유명한 공모전이나 주요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는 식의 명확한 성과를 낸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지금까지 쌓아온 포트폴리오와 학업성적으로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는 것.
게다가 그의 부모님은 전부터 제이든이 스포츠에 재능이 있는데도 그쪽을 고려조차 하지 않는 것을 늘 불만스러워했다.
‘제이든, 아까 오후에 너희 미식축구팀 코치님이 연락하셨다.’
‘사이먼 코치님이? 왜요?’
‘아이오와대의 체육특기생 전형에 지원해볼 생각이 없냐고.’
‘···.’
원하는 전공 분야로는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생각지도 않은 스포츠팀 선수 지원 제안이라니.
‘좀 고민해볼게요, 아빠.’
자신의 타고난 재능이 문학보단 스포츠에 가깝다는 걸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글을 향한 열정을 여전히 놓기가 어려운 가운데.
그의 눈에 유진은 그야말로 작가의 천재성 그 자체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만큼 그가 어떤 식으로 저 키워드들을 풀어낼지가 너무 궁금하달까.
제이든의 머릿속이 이런 저런 생각으로 가득하던 그때.
띠링-
알림음과 함께 유진의 원고가 클라우드에 올라왔다는 메시지가 떴다.
‘드디어!’
거구의 청년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파일을 다운받아 열어보았다.
그리고 이내, 화면 가득 펼쳐진 텍스트의 향연.
[<알파벳 D의 이야기> - 권유진
당신은 나를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한때의’ 베스트셀러 작가 말이다]
도입부에서부터 훅 빨려들어가는 기분 속, 제이든은 문장 하나 하나를 정신없이 읽어내려 갔다.
*
바로 그 시각.
유진의 원고를 게걸스럽게 읽는 것은 제이든뿐이 아니었다.
“···세상에.”
알파벳, 이상형, 쌍둥이, 동화.
까다롭다 못해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는 이 키워드들을 가지고, 이런 작품을 써냈다고?
“···.”
샬롯 데인스.
한때 이 힐크레스트의 문학 천재 소녀라 불렸던 그녀는 읽는 내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런 사람을 진짜 천재라고 하는 거겠지.’
너무 눈부신 재능 앞에선 질투심조차 들지 않는다고 하더니.
샬롯에게는 유진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저 순수하게, 그녀 자신이 지향해야 할 목표점처럼 느껴진달까.
샬롯은 다시금 <알파벳 D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주인공은··· 슬럼프에 빠져 있는 동화작가.’
그가 <알파벳 동화>를 써달라는 의뢰를 받고, 편집자와 머리를 맞대고 더 좋은 이야기를 고민해가는 과정이 눈앞에서 그려지듯 펼쳐지는가 싶더니.
[···드디어 돌아온 알파벳 D의 눈앞에, 오래도록 기다린 친구가 나타났다.
“뭐야, 또 다른 D를 찾아낸 거 아니었어?”
그것은 바로 알파벳 B.
정든 친구의 모습에 D의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데, B가 그를 끌어안으며 장난스럽게 말한다.
“있잖아 D, 우린 어쩌면 완벽한 짝일지도 몰라.”
“그게 무슨 소리야.”
“D가 위 아래로 두 개가 겹쳐지면 B가 되잖아?”
B의 실없는 소리에 D는 혀를 찼지만, 이내 친구를 따라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딘가 <토끼 남작의 모험>이 생각나는, 조금 엉뚱하고도 귀여운 동화.
“···풋.”
샬롯은 작중작인 <알파벳 D의 이야기> 전체 버전을 읽어보고 싶다 생각하며 후반부를 정독해나갔다.
주인공은 이 동화를 새로운 필명으로 발표하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호응과 인기를 얻는다.
덕분에 슬럼프를 이겨내고 작가로서의 자신감을 찾게 된 주인공.
그는 편집자와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알파벳 D의 이야기>가 성공한 건 편집자님 덕분입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난 이 글을 써내지 못했을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세요, 작가님. 저는 당신의···.
편집자의 목소리는 잠시 후에야 이어진다.
-영혼의 짝이나 마찬가지인걸요.
-소울 메이트란 말이죠.
-그래요. 우리는 처음부터 그걸 잘 알았잖아요? 다만···.
당신은 상대를 마주 보고, 상대 또한 당신을 마주 본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제대로 대화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지만.
-···.
당신과 상대 사이에 한순간 침묵이 자리한다.
그러나 그 눈빛만으로도 서로 간에 오가는 진심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내, 작품의 톤이··· 미세하게 바뀐다.
[당신은 나를 바라보고, 나는 당신을 바라본다.
당신의 눈동자.
녹색과 갈색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헤이즐색 눈동자가 나를 마주한다.]
···나, 라고?
갑작스러운 주어 변화에 샬롯이 눈을 크게 뜨는데.
[그렇게 우리의 시선이 마주한 순간.
당신은 당신도 모르게 손을 뻗고. 나 또한 손을 뻗는다.
우리의 손은 중간에서 멈추고, 손바닥 위로 단단하고 차가운 표면이 느껴진다.
···커다란 거울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가운데.
-고마워, 나의 영혼의 짝.
당신은 나를, 나는 당신을.
그러니까···.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보며 인사했다.
THE END]
유진의 <알파벳 D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마지막 문장을 읽은 지 한참 후에도, 샬롯은 두 눈만 깜박거릴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와.”
두 팔 위로 오스스 소름이 돋은 가운데, 두뇌는 빠르게 돌아가며 하나의 가설을 도출해낸다.
‘어쩌면 그저 결말 장면의 반짝, 하는 반전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녀는 파일 맨 처음으로 돌아가 첫 문장을 다시 읽어보았다.
[You can call me ‘bestselling author’···]
그 순간,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여러 개의 퍼즐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을 이루며 맞아들어갔고-
타닥, 타다다닥—
샬롯은 저도 모르게 새로운 파일창을 열고는 새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권유진의 단편 <알파벳 D의 이야기> 첫 문장은 <모비딕>의 그것을 패러디한 것에 가깝다.
‘Call me Ishmael.’
이는 흔히 ‘내 이름은 이스마엘이다’라는 의미로 읽히지만.
‘나를 이스마엘이라고 불러도 좋다, 혹은 이스마엘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본명이 따로 있지만, 자신을 그렇게 부르라는 표현인 셈.
그리고 저자는 이 문장을 이런 식으로 패러디했다.
-당신은 나를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그것은 바로 방금 읽은 <알파벳 D의 이야기>에 관한 평론이었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you라는 2인칭으로 진행된다.
시제 또한 현재형을 유지하여 -조금은 낯설고 불편하지만- 소설의 생동감과 현장감을 살리고, 독자를 ‘지금 여기’에 데려다 놓는 역할을 하는데]
탁탁, 타다다닥···.
그녀의 두 손이 신들린 듯 키보드 위를 움직인다.
[이 소설이 2인칭으로 진행되었던 이유가 결말에 가서야 드러난다.
그것은 단 한 번도 he나 she로 지칭된 바 없는, 등장할 때마다 ‘편집자’라는 일반명사로 지칭되던 조력자 캐릭터가···]
···사실은 거울 속의 나였다니.
여전히 경악한 채 고개를 저으며 작성을 이어나갔다.
[‘거울 속의 나’였다는 충격적인 반전을 선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
내내 you를 주어로 삼아서 진행되던 소설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I를 주어로 삼는, 즉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보며 인사했다’라는 문장으로 끝맺음된다. 이는 즉···]
거울 속의 나 자신.
지금껏 진정한 나 자신을 몰랐던 ‘내가’,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대면하고 내면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것에 성공했다는 것.
[그럼에도.
이 <알파벳 D의 이야기>에서 소설가와 편집자는 동일인일 수도, 아니면 별개의 인물일 수도 있다.
그것은 이 소설을 어떻게 바라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주인공이 겪는 일련의 일들이 현실이라고 바라본다면 별개의 인물이 될 것이고, 혹은-]
샬롯은 짧은 고민 끝에 다음 문장을 이어나갔다.
[이 단편소설 전체가 하나의 우화, 그러니까 예술가가 자신의 진정한 잠재력을 깨닫고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려내는 우화라고 본다면.
앞서 말한 대로, 둘은 하나의 인물일 것이다···]
거기까지 쉴 새 없이 쓰고 난 후에야-
“후우···.”
샬롯은 모아두었던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가 여전히 팽팽 도는 가운데,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