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인 여파(1)
*
다음 날 점심.
로완은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식사를 마친 뒤 <알파벳 D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어본 참이었다.
“···다시 읽어봐도 어마어마하네.”
대체 유진은 어떻게 그런 키워드들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혀를 내두르게 된다, 라는 표현이 피부로 체감되는 기분이다.
아무리 봐도 그저 놀라울 따름-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의 머릿속에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오늘쯤 연락을 준다고 했는데.’
로완이 기다리는 연락이란, 바로 <다중세계에서 들려온 멜로디>에 관한 것이었다.
앞서 수많은 에이전트들에게 거절당한 이 원고를, 유진의 충고대로 자가출판을 한 후 로완은 제법 자신감을 얻었는데.
[안녕하십니까 실버스톤 출판에이전시에서 연락드립니다···]
[제인 보스턴 리터러리에이전시에서 로완 무어 작가님께 제안을···]
[재커리그룹 에이전시는 최상의 서비스를···]
자가출판으로 거둔 성적을 함께 자료로 첨부해서 보냈더니, 꽤 많은 에이전트들이 그에게 계약을 제안했으며.
그중 -유진의 조언을 받아- 고르고 고른 한 곳과 에이전시 계약을 맺은 참이었다.
‘유진에겐 고마운 게 너무 많은걸.’
그리고 이제는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참이었는데···.
로완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이어지던 그때.
[미아_로페즈 : 유진 거 읽어봤어? 미쳤더라 진짜]
잔뜩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미아의 메시지를 필두로-
핸드폰이 지잉, 지이잉 쉴 새 없이 진동했다.
‘다들 읽어봤나 보네.’
그것은 다름 아닌 문예창작 클럽 채팅방.
자신뿐 아니라 학생들 대부분이 유진의 작품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제이든_쿤츠 : 뭐 유진의 실력이 미쳤다는 거야 다들 알지만
제이든_쿤츠 : 난 알파벳으로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미아_로페즈 : 제이든 너 ㅋㅋ 어째 좀 안심한 느낌이다?
제이든_쿤츠 : ㅋㅋㅋㅋㅋ]
하긴, 제이든은 괜히 자신만 이상한 키워드를 낸 것 같다고 신경 썼으니.
채팅창에 쏟아지는 메시지들을 보며 로완이 피식 웃었다.
[샬롯_데인스 : 난 유진 소설로 평론도 써보는 중 :3
미아_로페즈 : 오오 멋지다!
제이든_쿤츠 : 기대되는데 그것도 나중에 올려주면 안 돼?
샬롯_데인스 : 어 완성하면 올려볼게 XD
숀_카터 : 흐으 유진 것 읽고 나니까 자신감이 사라져서 내 거 못 올리겠다···
미아_로페즈 : 야 그렇게 따지면 우린 진작에 다 절필했어야 해
제이든_쿤츠 : ㅇㅇ 난 백 번도 더 했겠지]
그래, 그건 맞는 말이다.
전에 레너드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던가.
‘천재란 어느 분야에든 존재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인생은 각자의 페이스대로 가는, 기나긴 마라톤과 같다는 것.
‘그러니 누군가 월등한 속도로 앞서 나간다면, 그냥 보내주면 된다. 너희 모두는 각자의 속도로 나아가면 돼.’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그때의 그 말을, 로완은 내내 마음에 새겨온 터였다.
[미아_로페즈 : 그러니까 숀 너도 얼른 올려
제이든_쿤츠 : 자신감이 없어서 못 올리는 게 아니라 원고가 없어서 못 올리는 듯?
숀_카터 : 엌 ㅋㅋㅋ 어떻게 알았냐 ㅋㅋㅋ
제이든_쿤츠 : ㅋㅋㅋ 뻔하지]
···
이 녀석들이야 뭐, 언제나 즐겁지만.
로완은 지금도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 있었다.
톡, 토도독.
폰을 들어 채팅창에 메시지를 입력했다.
[로완_무어 : 근데 그 중간에, ‘헤이즐색 눈동자’라는 부분이 나오잖아
로완_무어 : 그건 무슨 의미일까
샬롯_데인스 : 아 나도 그건 좀 궁금하더라
로완_무어 : 그치? 근데 작중에서 딱히···]
무언가 의미가 있는 듯 보이지만, 앞서 딱히 언급된 바가 없고.
헤이즐이라는 단어 자체에 존재하는 은유적 의미를 살펴봐도···.
로완이 고민하던 그때, 제이든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제이든_쿤츠 : 유진의 취향이겠지
미아_로페즈 : 그게 뭔 소리?
제이든_쿤츠 : 여자 취향 말이야
미아_로페즈 : ???
샬롯_데인스 : 어 아 그러니까
숀_카터 : 오 혹시 유진의 전 여친이 헤이즐색 눈동자였다든가 뭐 그런거 아니냐
제이든_쿤츠 : 바로 그거지! 천잰데?
미아_로페즈 : 이 바보들···]
크큭, 로완이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는데.
유진이 뒤늦게 채팅창에 등장했다.
[유진_권 : 어 그런 거 아닌데
제이든_쿤츠 : 아니라고?
숀_카터 : 우리의 추리가 틀릴 리가 없는데
유진_권 : 아니 딱히 특별한 뜻이 있다기보단
미아_로페즈 : 잠깐만 유진!!! 거기까지!!!
유진_권 : ??
미아_로페즈 : 독자의 환상을 깨지 말라고!!!
유진_권 : 아 ㅋㅋㅋㅋ]
이어지는 채팅에 로완이 피식거리는데.
“···어.”
지잉- 하며 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꽤 오랫동안 기다려온, 반가운 소식이었다.
*
다시 그로부터 30분 전.
나는 점심시간을 활용해 레너드 선생님과 잠시 면담을 하는 중이었다.
“자, 이제는 정말로 명실상부한 아이오와대 학생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하하, 그렇네요.”
1월부터 준비한 서류를 모두 대학 측에 보냈고.
이제 3월이 눈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되어 조기 입학 신청의 결과가 발표된 것.
‘뭐, 결과야 말할 것도 없이 합격이지만.’
여기에 아이오와대학 측에서 제공하는 4년 전액 장학금과, 상당한 규모의 학업 보조금.
거기에 무엇보다도-
‘아이오와 작가 워크샵.’
원래는 학사 학위 소지자부터 들을 수 있는, MFA 프로그램의 일종이지만.
···스콜라스틱 공모전 금메달 입상 자격과 <토끼 남작의 모험> 출간 이력 덕분에 이 워크샵을 무상으로 수강할 수 있는 특혜 또한 보장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제 남은 건 네가 직접 등록을 마치는 것뿐인데.”
그것까지 하고 나면 이제는 정말 누가 뭐래도 무를 수 없다- 라며 장난처럼 얘기하는 레너드 선생님.
“무르다뇨, 절대 그럴 생각 없는걸요.”
“하하, 유진 넌 원래부터도 엄청나게 확고하긴 했지.”
“뭐, 스탠리 교수님은 조금 아쉬워하시겠지만.”
나를 시카고대에 데려가고 싶어서 안달내시던, 험상궂은 인상의 노교수님을 떠올리며 말하자.
“그러게, 교수님이야 조금 아쉬워하시겠지만···.”
레너드 선생님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유진.”
“···.”
“그동안, 정말 눈부시게 성장해왔구나.”
“고맙습니다, 선생님.”
면전에서 선생님께 이런 말을 들어서일까.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하는 기분이 든다.
“아 그리고, 이 <알파벳 D의 이야기> 말인데.”
웃음기 띤 얼굴로 화제를 돌리는 미스터 레너드.
“굉장히 재미난 시도를 했더구나.”
“그렇게 느껴지셨다니 안심인데요.”
“그 실험적인 시도도 그랬지만.”
레너드 선생님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유진 네 모습이 겹쳐보이는 느낌이라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해.”
“제 모습이요?
“매순간 진지하게 글을 대하는, 천상 작가의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
글쎄, 내가··· 그런 느낌으로 글을 써왔던가.
나 자신은 막상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포인트를 짚어내는 미스터 레너드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앞서 도 그랬지만, 이 작품도 이대로 우리끼리 보고 말기는 좀 아쉬운데 말이지.”
“아, 안 그래도···.”
짤막하게 설명하자, 레너드 선생님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권유진 이름으로··· 단편집을 출간할 생각이라고?”
“네. 아직은 생각뿐이긴 하지만요.”
연극 의 원작자가 나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러 곳에서 단편집 출간 제안을 해왔지만.
아직은 컬렉션으로 묶어서 출간할 만큼의 작품이 없다 보니, 이번에 이 <알파벳 D의 이야기>랑 단편 하나 정도를 더 써서 출간해볼 생각이라는 말에-
“아주 좋은 생각이구나.”
레너드 선생님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책상에 내려둔 핸드폰이 지잉—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울렸고.
그 화면을 힐긋거리고는 나도 모르게 어, 소리를 내고 말았다.
“왜?”
“···그게.”
잠시 그 내용을 확인하고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로완도, 출판사랑 정식 출간 계약을 맺었다는데요.”
“···!”
또 하나의 기쁜 소식에, 레너드 선생님의 얼굴이 환해졌다.
*
그주 주말.
우리 네 사람- 그러니까 나와 네드, 케이트, 클로이는 응접실에 다 같이 모인 채.
<토끼 남작의 모험> 시리즈가 일군 새로운 성과를 자축했다.
“우와아아~~ 갱장해~~”
“이거, 진짜 너무 잘 만들었는데?”
“으흐흐흐,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는 게 바로 이런 느낌이구나···.”
우리의 눈앞.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다름 아닌 <토끼 남작의 모험> 캐릭터 상품들.
‘해즈브로에서 아주 칼을 갈았는걸.’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로 <토끼 남작> 2권 초판 한정판 굿즈로도 나온 바 있는 봉제인형들.
키링용부터 시작해 총 3가지 사이즈로 제작되었다.
“너무 기여워···.”
손바닥만 한 베니, 책 사이즈만 한 베니, 대형쿠션만 한 베니까지.
클로이는 베니 세 마리를 한꺼번에 안고서 행복해했다.
내 눈엔 그러는 클로이가 더 귀여워 보이긴 했지만.
‘여기에 동전지갑, 아동용 책가방, 쿠션, 필통 등의 제작이 예정돼 있다고 했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일 마음에 들었던 것은-
“영롱하지 않냐.”
헤벌레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네드의 말마따나, 영롱하게 빛나는 ‘토끼 남작 베니’ 피규어였다.
금방이라도 쫑긋거릴 듯한 귀에 튀어나온 앞니.
화려하게 펄럭이는 망토에 당근 검을 들고 근사한 자세를 잡는 것이-
“그러게. 퀄리티가 장난이 아니네.”
“크으, 디테일이 아주···.”
거기에 버터컵 경과 안킬로 백작, 아기 티라노의 피규어까지 제작이 완료된 상태였는데.
이 피규어들을 아크릴 장식장 안에 넣어두고 감상하니 알 수 없는 뿌듯함이 차오른다.
“···이래서 사람들이 피규어를 모으는 건가.”
“크흐흐, 이제야 알았냐?”
네드는 몹시 만족스러운 기세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 소리를 내며 화제를 돌렸다.
“곧 있으면 로열티 정산 맞지?”
“그렇지? 분기별 정산이니까.”
녀석이 말한 로열티란 바로 이 해즈브로 측에서 지급할 캐릭터 상품 관련 로열티.
이 부분은 나와 네드만이 저작권자로 등록된 상황이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편집권이잖니? 그건 캐릭터 로열티와는 상관없는, 출판에 한정된 권한이고.’
새어머니가 그 부분 역시 업계 기준대로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
‘지금까지의 이 행운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늘 감사하고 있어.’
그러니 자신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하다고 말이다.
“흐으, 얼마나 들어올지 완전 기대되네···.”
요즘 계좌 안에 돈이 쌓이는 걸 보는 재미를 깨달았다며 네드가 신나서 얘기하던 그때.
“오, 왔다.”
“왔다니, 뭐?”
“<토끼 남작> 해외 판권 오퍼 현황.”
“오오오, 드디어!”
미스터 케빈이 보낸 메일 또한 시기적절하게 도착했다.
“그럼 이 자리에서 아예 의견을 정리해서 미스터 케빈에게 보내주죠.”
우리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댄 채 그것을 함께 열어보았고.
“와···.”
“잠깐만, 14개국에서 오퍼가 들어왔다고? 분명 얼마 전만 해도 4개국이었던 것-”
“그게 벌써 몇 달 전 일인데요.”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케이트를 보며 씩 웃었다.
“미스터 케빈이 판을 크게 키우려고 일부러 시간을 끌지 않았으면, 아마 진작에 10개국 넘게 팔렸을걸요.”
“···어머.”
그리고 이내.
각국에서 부른 선인세 액수들에, 새어머니와 네드의 눈은 또 한 번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
그 금액들도 엄청나지만, 이미 판권 경쟁이 완료된 나라들의 선인세 금액도 장난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무려 1억원에 낙찰됐지.’
그 정도 규모의 시장에서 1억의 선인세는 거의 탑급 작가들이나 가능한 수준인데.
전에 미스터 케빈이 말했던 대로 경쟁이 치열하긴 했던 모양이다.
“참, 신기하네.”
“뭐가 고모?”
네드의 목소리에 케이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희 둘이 클로이를 위해 만들어준 책이, 이제는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어린이들에게 읽히게 되는 거잖니.”
“···.”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신기하고 고무적이라는 말에, 내가 잠시 아무 대꾸도 못 하던 그때.
“우와아~ 그럼 이제 외국 어린이들도 베니를 좋아하게 되겠네? 너무 너무 죠아.”
두 눈을 반짝이며 외치던 클로이가 나를 보며 물었다.
“한국 아이들도?”
“응, 한국어로도 번역될 거야.”
“우와아! 나도 한글 배울래.”
“그래, 클로이.”
나는 씩 웃으며 동생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근데 일단은 영어부터 잘하자.”
“···나 쟐하는데.”
“아직 혼자서 책 못 읽잖아.”
“이잉, 나 잘 읽는데에···.”
동생의 뾰루퉁해진 얼굴을 보니 절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중에 한국 책 나오면, 오빠가 읽어줄게.”
“진짜? 히히히, 너무 신나~”
나 또한, 토끼 남작 베니가 전 세계 아이들에게 사랑받는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 해도 차고 넘칠 정도로 기쁜 일이라는 데에 백 퍼센트 동의하는 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