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인 여파(2)
*
<알파벳 D의 이야기>를 기분 좋게 탈고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넘게 지났다.
문예창작클럽 친구들, 특히 샬롯과 로완은 머리를 맞댄 채 이 단편의 ‘다양한 함의’를 읽어내겠다며 열정을 불태웠고 말이다.
여느 때처럼 클럽활동을 마친 뒤, 네드와 아델까지 차에 태우고 집에 돌아가는 길.
부웅—
차가 도로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가운데, 한겨울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는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한때는 매일 같이 칼바람이 불고 시도 때도 없이 폭설이 오더니.’
앞마당에 수북하니 쌓인 눈을 치워내던 것을 생각하면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그래도 뭐, 클로이를 데리고 눈사람 만드는 건 나쁘지 않았지만.
3월 초가 되니 날씨가 좀 풀리는 것 같아 다행이네- 생각하던 그때.
“유진, 나 그거 다 읽었다.”
“어어 나도 나도! 이번엔 또 뭔가 새로운 느낌이던데?”
뒷좌석에 앉아 있던 두 친구 또한, 내가 보내준 <알파벳> 단편을 다 읽었다며 신나게 소감을 늘어놓았다.
“뭐랄까, 예전에 니 작품들은 좀 더··· 장르적인 색채가 강했다면 이번엔 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야.”
아델의 진지한 리뷰를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와 잠깐, 너 내가 아는 아델 애시번 맞아? 방금 좀 소름.”
“그 반응 뭔데? 나도 진지한 얘기 할 수 있거든? 그럼 넌.”
네드의 반응에 아델이 미간을 좁히며 뾰로통한 얼굴로 되묻는다.
“응?
“넌 얼마나 대단한 감상을 느꼈냔 말이지.”
“어, 아. 난 뭐···.”
머리를 긁적이더니 으흐흐 웃으며 말하는 네드.
“우리 유진 디어웨이큰이 연애가 하고 싶나 보구나, 뭐 그 정도?”
“···뭔 소리야.”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내가 어이없어 한마디하자.
“아니 아니, 이 편집자 말야. 니 이상형 같은 거 아님? 작품 고민도 함께해주고, 속마음도 말하기 전에 알아서 읽어주고-”
“그거야 자기 자신이니까 그렇지.”
“어? 자기 자신이라니. 그게 뭔 말?”
“아아아 진짜아~”
몹시 답답하다는 듯, 그러나 그러면서도 이 <알파벳>의 결말이 지니는 의미를 아델이 하나 하나 설명해주자.
“오, 아델 너 좀 달라 보인다? 급진지 모드.”
“···나 원래 진지했거든?”
그런 반응에 낄낄거린 네드가 운전석에 앉은 내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아 맞다, 나 이 <알파벳> 이야기 읽고 이런 생각도 났는데.”
“무슨 생각?”
“그 우리, <토끼 남작> 말이지.”
“···?”
“아니 아니, 베니가 아예 알파벳 왕국에 가는 건 어때?”
기왕 동생들 이름도 알파벳 순으로 지어놨으니, 그런 걸 활용해봐도 좋지 않겠냐는 것.
“오, 괜찮은데?”
안 그래도 다음 권의 아이디어를 이것저것 고민하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네드가 신이 나 말을 잇는다.
“그르치이? 거기다 아예 학습용 워크북도 내는 거지! 아주 돈을 쓸어담아서, 으흐흐흐···.”
“와, 자본주의의 망령이 다 됐네.”
“너도 벌어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아델.”
그건 그렇고.
나는 꽤 한참 전, 네드가 받았다는 SCAD(사바나 예술대학)의 장학생 제안을 화제로 올렸다.
“SCAD, 다니기로 한 거 맞지?”
“어어, 그거야 당연히 그런데··· 지난번 크리스마스 때 엄마 보러 가서 그 얘길 꺼냈거든.”
“오, 어머니가 뭐라셔? 엄청 좋아하시지?”
“생각해보니 SCAD가 애틀랜타에 있구나.”
아델과 내가 대꾸하자, 잠시 머뭇거리던 네드가 말을 받았다.
“안 그래도 엄마가, 집에서 다니는 건 어떻냐고 하더라고. 차도 중고차 하나 사줄 테니, 집에서 통학하라고.”
“···.”
네드의 저 망설임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네드의 부모님, 그러니까 조셉 아저씨와 네드 어머니는 몇 년 전에 성격 차이로 이혼하셨는데.
‘그때 네드가··· 꽤 힘들어했지.’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
사춘기의 한복판에서 괴로워하던 그때와 달리 지금의 네드는-
“음, 엄마랑 같이 있는 게 나쁘진 않지만 좀 어색할 것 같아서.”
저 말대로 딱 ‘어색한 정도’이지 않을까.
“뭐, 그건 니가 좀 고민해보고 결정해도 될 듯?”
어머니 집에서 통학해도 되지만, 여차하면 기숙사에서 다니는 것도 괜찮지 않겠냐는 내 말에 네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엄마도 괜히 미안하니까 말은 그렇게 하는데, 갑자기 같은 집에서 살면 불편하지 않겠어?”
“맞아, 주말마다 같이 시간 보내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으렇지.”
아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네드가 그녀에게 물었다.
“맞다. 아델 넌, 대학 진학상담 좀 해봤어?”
“아, 엄마 아빠랑도 한참 얘기하고 담당 선생님이랑 얘기해봤는데.”
씩 웃은 그녀가 나와 네드를 차례로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조지아 음대에 지원해보려고.”
“조지아 음대?”
“응. 거기가 실용음악과가 엄청 유명하더라고. 사실 내 성적으론 어떨지 모르겠는데···.”
말은 저렇게 해도, 아델은 -늘 들들 볶아온 어머니 덕분에- 평소 성적도 제법 괜찮고 그 외 이런 저런 대외활동도 쌓아둔 상황이고.
무엇보다 그녀는 이미 음반 에이전트와 계약도 하고, 자작곡이 꽤 많은 상황이 아닌가.
“그래서, 나도 지금부터라도 음대 입시 위주 실기를 준비해보려고.”
“멋지네.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려놓은 곡들로만 포트폴리오 구성해도 충분히 잘될 것 같아.”
“히히, 그랬으면 좋겠어.”
그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네드가 문득 이런 말을 꺼냈다.
“조지아 음대도··· 애틀랜타에 있지?”
“어, 왜?”
“아델 너, 설마 나를 따라서-”
“아 뭔 소리야 진짜!”
아델이 어이없어하며 네드의 어깨를 주먹을 팍 치자, 네드가 실실 웃으며 좋아한다.
“아 진짜 아니라고오- 기분 나쁘게 좀 웃지 마.”
“으흐흐.”
뒷좌석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가운데.
‘으음, 이건 확실히···.’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자동차 앞유리, 그러니까 도로 풍경에만 집중했다.
‘그래도 뭐, 셋이 다같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네드 따로, 아델 따로 만나러 가는 것보단 한꺼번에 보러 가는 게 괜찮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
3월이 되어 달라진 것은 날씨뿐이 아니었다.
나는 앞서 <캐슬>의 퇴고를 생각보다 조금 빠르게 마무리해서 원고를 보낸 바 있는데.
“그게 벌써··· 2교가 끝났다고?”
1교와 2교를 마치고, 내게 저자교를 봐달라는 메일이 온 것이 아닌가.
[리암홀트편집부_시드니 : 염려하실까 봐 덧붙이자면 그러는 동안에도 야근은 한 번도 안 했습니다. 아 그리고 어제 점심엔···]
그녀가 메시지로 최근의 식단을 보고하는 가운데.
나는 방금 도착한 메일 내용과 첨부파일을 살펴보았다.
“···.”
교정파일은 이미 조판까지 완벽하게 마친 상태.
척 보기에도 완성도가 높은 것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한편-
‘4월 중순 출간 예정?’
출간의 세부일정을 정리해놓은 내용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솔직히 말하면, 워낙 긴 원고이다 보니 6월, 아니면 빨라도 5월 초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리암홀트편집부_시드니 : 아 작가님, 함께 첨부한 표지 시안 파일 역시 확인 부탁드립니다.]
···표지 시안이 완성됐다면, 확실히 이 정도 일정도 가능하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표지시안_확정_<캐슬>.jpg’을 클릭해 열어보았고.
“···.”
이내 모습을 드러낸, 영롱하고 화려한 이미지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온 화면을 꽉 채우는 거대한 성.
그러나 디지털아트 화풍으로 그려진 고성은 홀로그램 느낌으로 반짝이는 까닭에, 어딘가 미래적인 느낌을 준다.
‘즉, 이 <캐슬>의 실체를 완벽하게 반영한 표지라는 것.’
그렇다고 반전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유추만 가능하도록 말이다.
“···멋진걸.”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시드니 담당자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며, 고생많으셨다고 메시지를 작성했다.
[에곤_K : ···표지도 정말 근사하군요, 이 <캐슬>에 꼭 맞는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이자면···]
[에곤_K : 롤랜드 블랙우드 배우의 목소리로 녹음될 오디오북 또한 진심으로 기대됩니다.]
마음 같아서는 녹음현장에 직접 찾아가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쉬운지.
[에곤_K : 대신, 배우님께 선물과 메시지를···]
일종의 팬레터에 가까운 메시지와 선물을 전달해달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책상 앞에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면 이제는 본격적인 저자교에 들어가볼까.’
파일을 열어 한층 매끈하게 가다듬어진, <캐슬>의 문장들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
<캐슬>의 저자교를 진행하느라 3월의 첫 번째 주가 정신없이 지나가는 와중에도-
“다음에 보자고.”
“으흐흐, 유진 너 몸이 점점 더 좋아지는걸.”
“잘 가라!”
나는 스포츠클럽 활동을 마치고는 학교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출발시켰다.
“흠, 흠~”
땀 흘리며 운동한 뒤 샤워하고 난 후의 상쾌함이란.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오던 그때, 지잉- 하고 차량용 거치대 위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미스터 케빈’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블루투스로 연결된 차량 스피커로 안내음성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메시지를 읽어줘.”
그러자 이내 음성으로 들려오는 미스터 케빈의 메시지.
[미스터 케빈 : 유진 작가님, 반가운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이번에 <토끼 남작의 모험> 한국어 번역 출판권을 획득한 문학마을 출판사에서···]
···한국 도서전에 <토끼 남작>의 저자들을 공식으로 초청한다고?
메시지의 내용에 한순간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
바로 다음 날, 토요일 아침.
우리는 간만에 가족끼리 외식을 하러 갔다.
이곳은 클로이가 좋아해서 가끔 오곤 하는 전형적인 미국식 브런치 식당.
“우와아~”
팬케이크에 초코 시럽으로 스마일을 그려넣은 어린이 메뉴가 나오자 동생이 행복해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케이트가 나를 돌아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유진아, 축하한다.”
“진심으로 축하해, 유진.”
클로이 또한 입가에 초콜릿 시럽을 잔뜩 묻힌 채 날 보며 헤헤 웃었다.
“오빠 너무 멋있어어~ 대학생이면 이제 어른이야?”
“어른은 아니고, 그냥 대학생인 거지.”
“그게 머야아, 대학생은 어른인 거 아냐?”
“그건 그렇긴 한데···.”
오늘 이 자리는 아이오와대학 조기입학이 확정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얘기가 나온 것은 한참 전이기도 하고, 그래서 다들 특별한 감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어어? 입학 확정? 저, 정말이냐?’
특별 장학생으로 입학 확정됐다는 서류를 보여드리자.
두 분이 함박 미소를 짓더니, 당장 주말에 축하의 자리를 마련하자는 얘기가 진행됐던 것.
게다가 이 이야기가 심지어 지역 일간지에도 실린 모양이었다.
[브로드웨이를 뜨겁게 달군 연극 의 원작자 권유진 군, 아이오와대학 조기 입학한다]
[<토끼 남작>의 학생 저자 ‘스콜라스틱 금메달리스트’ 권유진, 올 9월에 대학생돼···]
···
그 때문인지 아버지와 케이트는 요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하하하, 유진아. 이거 봤니? 네 이야기가 신문에 나서 그런지, 여기저기서 네 안부를···.’
‘후후후, 요즘 서점에 오시는 동네 손님들도 다 한 번씩 유진 네 이야길 한단다.’
부모님한테 인정받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했던 선택은 아니지만.
두 분이 이렇게 기뻐하시는 것을 보니 괜스레 뿌듯해진다.
‘회귀 전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더더욱 감회가 새롭기도 하고.’
그때 나는 일단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이오와대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정도였고, 컷이 훨씬 낮은 대학에 간신히 들어가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다녔다.
‘나중에 회사 다니며 대출을 갚느라 굉장히 허덕였던 기억이 나는데.’
이번에는 모든 것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다른 상황.
그 사실이 여전히 놀라운 동시에 감사할 따름이다.
“···.”
아니지, 감사한 일은 그뿐이 아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강한 아버지의 모습.
부쩍 가까워진 덕분에 나를 편하게 대해주시는 케이트.
기억 속의 모습보다 훨씬 더 밝은, 지극히 어린이답게 행동하는 우리 클로이.
···누군가에겐 너무도 당연하고 평범한 일상일지도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을 잃어봤던 나는, 지금 이 광경이야말로 가장 소중하며 그 무엇에도 비할 바 없는 행복이란 것을 잘 안다.
“아, 얘기드릴 게 하나 있는데.”
나는 미스터 케빈에게서 들은, 한국 출판사의 도서전 초청 소식을 꺼냈다.
“···어머.”
“그게 정말이냐?”
6월 초부터 1주간의 체류일정이며, 한국 출판사 측에서 교통편과 숙박을 모두 제공하겠다는 얘기에 케이트와 아버지가 깜짝 놀랐다.
“네, 어차피 아버지는 이때쯤 한국 가시려고 했잖아요?”
“그렇지.”
한국 도서전이야말로 아버지에게는 연중 가장 중요한 행사인 만큼, 매년 이때에 맞춰 한국 출장을 가셨던 터.
“기왕 가는 김에, 온 가족이 다 같이 가는 건 어떨까요?”
“···!”
그리고 내 말에 가장 눈을 빛낸 것은-
“우와아아—! 신나아~~”
의외로 클로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