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대감(1) >
*
그로부터 1주 뒤.
에곤 K의 담당자 시드니 캘러한은 리암홀트 빌딩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형 스튜디오, ‘두아트스튜디오 뉴욕’에 도착했다.
‘이곳이 바로 <캐슬>의 오디오북 녹음이 진행될 현장.’
그렇다.
오늘은 다름 아닌, 에곤 K의 신작 <캐슬> 오디오북의 첫 녹 음이 진행되는 날.
종이책 원고가 3교까지 마무리되어 본격적인 오디오북 제작 에 들어갈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
‘오디오북 녹음현장에 와보는 건 처음인걸.’
세련된 오브제로 장식된 리셉션 공간으로 들어서자, 직원이 그녀를 메인 스튜디오로 안내했다.
녹음부스와 컨트롤룸, 스탭 대기공간으로 이뤄진 넓은 공간.
“안녕하세요, 리암홀트의 시드니 캘러한입니다!”
그녀는 안쪽에서 대기 중이던 프로듀서와 감독, 엔지니어와 차례를 인사를 나눴다.
“저, 롤랜드 배우님은?”
“아, 녹음 부스에 들어가 계십니다.”
스태프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통유리창 너머 마이크가 놓인 책상 뒤편에 편안하게 앉아 있 는 노배우가 보였다.
반백의 머리, 은테 안경에 지적인 인상을 풍기는 주름진 얼 굴.
스크린상으로 익히 봤던 그대로의 원로배우 롤랜드 블랙우 드였다.
“···와.”
수많은 명작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옮긴 명성우의 모습에 시 드니의 가슴이 두근거리던 그때.
‘···!’
롤랜드 블랙우드가 고개를 들더니 그녀를 발견하고는 녹음 부스 바깥으로 나왔다.
시드니가 눈을 빛내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블랙우드. <캐슬>의 담당편집자 시드 니 캘러한이라고 합니다.”
“나도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군요, 캘러한 양.”
“시드니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배우님께서 녹음하신 <듄>부 터 <저주받은 군주들>까지 정말 뜻깊게 들었는데···.”
두 눈을 빛내며 팬심을 그대로 드러내는 편집자의 말에 롤랜 드 블랙우드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허허, 이거 영광이군요.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시드니는 미리 준비해온 쇼핑백과 메시지 카드를 얼른 배우 에게 전달했다.
“이건?”
“<캐슬>의 에곤 K 작가님이 배우님께 꼭 전달해달라고 부탁 하신 선물과 메시지입니다.”
“아니.”
생각지도 못한 서프라이즈에 노배우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반가운 마음으로 봉투를 열어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오, 동양주인가 보군요. 안 그래도 내가 술을 즐기는 편인데.”
어디선가 에곤 K가 자신과 비슷한 연배라는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언제 한 번 술자리를 같이 가지면 좋겠군- 이라며 롤랜드가 입맛을 다시는데.
“아, 그건 술이 아니고 홍삼액이라고, 면역력 증강에 좋은 제 품이라고 합니다.”
시드니가 고개를 저으며 얼른 설명했다.
안 그래도 에곤 작가님이 ‘병의 생김새만 보고 술로 착각하 실 수도 있을 텐데···’라며 신신당부하지 않으셨던가.
“어, 그래요? 허허, 난 또 에곤 작가님도 술을 즐기시는 줄 알 았지.”
“그··· 에곤 작가님은 술을 입에 전혀 안 대시는 걸로 알고 있 습니다.”
“호오, 그렇습니까?”
“건강을 굉장히 중시하시는 분이라···.”
시드니는 최근 자신이 들었던 건강 관련 조언-잔소리-을 몇 가지 들려주었고.
“허허, 이거 재밌는 양반이시구만.”
언제 한 번 얼굴 보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면 좋겠군.
노배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메시지 카드를 꺼내보았다.
“···.”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을 읽은 그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이거, 서로가 서로의 팬이 되겠군요.”
“네?”
눈을 동그랗게 뜬 젊은 편집자를 보며 노배우가 미소를 지었 다.
“내가 그새 <캐슬>을 읽으며 에곤 작가님의 팬이 되었거든 요.”
“···.”
“<캐슬>뿐 아니고, 전작들인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와 <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까지 모두 읽어보았는데, 매번 새로이 반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꼭 좀 전해달라는 배우 롤랜드의 말에, 시드니는 괜히 제 가슴이 벅차올랐다.
‘···너무 멋지잖아, 이런 거.’
*
잠시 후.
두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스탭들은 <캐슬>의 오디오북 녹음 에 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캐슬>은 분량에 비해 캐릭터 수가 다행히 그렇게 많은 편 은 아닙니다.”
“라이언과 클라이브가 서로의 속내를 숨기고 대화를 주고받 는 씬 말인데.”
“캐슬을 탈출한 이후부터는 작품의 색이 확 변하는 만큼, 전 반적인 분위기가···.”
롤랜드 블랙우드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캐릭터들의 목소리를 구사할 때마다-
‘···와.’
시드니를 비롯, 스탭 전원은 생생함과 개성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대략적인 논의가 마무리된 후, 본격적인 녹음을 눈앞 에 둔 상황.
바로 부스 안으로 들어가려던 롤랜드 블랙우드가 시드니의 눈빛을 보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편집자님도 같이 들으시겠습니까?”
“···!”
시드니가 흥분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이자, 롤랜드는 프로듀 서와 녹음감독을 돌아보았고.
녹음감독이 그녀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이 헤드폰으로 들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시드니는 얼른 헤드폰을 썼다.
너무 두근거리는 탓인지 제 심장 소리가 들려올 듯한 가운데.
“자, 녹음 들어갑니다. 3, 2, 1··· 고!”
스탭의 외침에 롤랜드가 눈짓을 보내자, 녹음감독이 레코드 버튼을 눌렀고.
-성은 살아 있었다.
헤드폰 안쪽에서, 명성우 롤랜드 블랙우드의 중후한 목소리 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주민 모두가 공유하는, 돌처럼 단단하고도 강력한 믿음이었다···.
텍스트로 봤던 문장들이 근사한 울림이 되어 허공을 떠돈다.
처음만 해도 직업적인 태도로 경청하던 스탭들마저 그저 한 명의 ‘청자’가 되어 귀를 쫑긋 세웠고.
-이를테면 햇살 아래 서 있을 때, 그림자는 반드시 햇빛의 반 대편으로 지기 마련이라든가. 아침에 뜬 해보다 한낮에 뜬 해 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든가···.
그들의 기대감이 이 너른 스튜디오 안을 팽팽하게 채우는 가 운데.
성우의 목소리는 천변만화하며 <캐슬> 속의 세상을 그려냈 다.
-소명이라고요? 사제님이 말씀하시는··· 소명이 대체 뭔데요.
때로는 변성기에 접어들기 직전, 소년의 미성으로-
이 폐쇄적인 세계 전체에 대한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감당하 기 어려운 소년 라이언을 연기하는가 하면.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냐, 라이언? 성 요하임께서는 말씀하 셨다. 모든 인간에게는···.
이내 한 옥타브 낮아진 목소리로, 주민들 사이에서 변함없는 권위로서 군림하는 엄격하고도 의뭉스러운 사제가 되었으며.
-저리 꺼져! 이 더러운 고아 녀석아.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조 슈아가···.
신경질적인 중년 여성의 톤으로 -라이언을 멸시하는- 이웃 집 여인을 연기하기도 했다.
칠색조처럼 쉴 새 없이 변화하는 목소리에, 정확하기 그지없 는 발음.
호흡 하나 하나까지 세세하게 살피며 조절되는 리듬에 이르 기까지.
‘마치, 단 한 대의 바이올린으로 혼자서 교향곡을 연주해내 는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같다고 해야 할까.’
명성우 롤랜드 블랙우드의 목소리를 통해, <캐슬>의 텍스트 가 그 자체로 생명을 얻는 느낌 속.
‘···와.’
시드니는 어느새 닭살이 돋은 팔을 쓸어내리며 마음먹었다.
이 경이로운 감동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에곤 작가님께 전 달해보겠다고.
*
오디오북 녹음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가운데.
어느덧 봄 기운이 완연해진 4월 첫 주가 되었다.
<캐슬>의 종이책은 4월 중순, 오디오북은 5월 초로 출간이 예정된 와중.
[에곤 K의 세 번째 장편소설 <캐슬>··· 사전 예약 시작한다]
이미 팽팽해질 대로 팽팽해진 기대감 속.
사전 예약이 오픈되자마자 엄청난 주문이 쇄도했고.
이 같은 열기에 걸맞게 -리암홀트와 라이터스홈에서 뿌린 보 도자료가 주가 되어- 온갖 매체에서 각종 보도가 쏟아지는 중 이었다.
[에곤 K의 신작 <캐슬>, 드디어 베일 벗는다]
[‘일곱 자릿수의 대형 선인세 딜’ <캐슬>, 리암홀트 최대 타 이틀의 출간이 눈앞으로···]
[<캐슬> 뉴욕타임스, 퍼블리셔스위클리 등 다섯 개 매체에 서 ‘올 상반기 최고의 기대작’ 1위로 선정]
[명성우 롤랜드 블랙우드의 목소리로 녹음되는 <캐슬> 오디 오북은 과연···]
[에곤 K <캐슬>, 정식 출간 전부터 이미 전 세계 해외판권 문의 쇄도]
뜨거운 관심과 기대감을 고스란히 담아낸 기사들이 대부분 인 가운데-
[SF씬의 초신성 에곤 K, 과연 삼연타 홈런이 가능할까?]
[평론가 칼 톰슨, ‘과대포장된 신인의 부담감’··· 에곤 K의 <캐 슬>을 향한 우려]
[출판업계의 고질적인 조급함··· 과학소설계 신성의 다작 행 보를 향한 불안감]
···조회수를 올리기 위한 어그로성 기사들도 종종 눈에 띄었 다.
그렇게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와중에도, 리암홀트 사의 마케 팅은 착착 진행되었는데.
[2.4k <캐슬> 미니북 이벤트 당첨된 사람?]
1챕터만 뽑아서 만든 <캐슬>의 미니북을 당첨 인원에 한정 하여 제공하는 이벤트를 진행한 것.
과거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때만 해도 일부 인플루언서 들에게 일일이 컨택해가며 책의 리뷰를 의뢰하는 상황이었다 면.
[상반기 최고 기대작, 에곤 K <캐슬> 미니북 리뷰 시작합니 다!]
[<캐슬> 미니북, 읽어봤니? @루나_북톡]
[밀라_북스| <캐슬>을 기다리다 지친 자의 #이달의 판타지 챌린지]
[댄 에이브러햄의 리뷰_너무 감질나는 동시에 기대되는 <캐 슬>의 1챕터]
···
지금은 확실히 예전과는 달랐다.
그런 의뢰 없이도 유명 북톡커나 북튜버, 리뷰어들이 자발적 으로 컨텐츠를 제작해 올리는 상황이었으니까.
또한 <뉴욕타임스 북리뷰>에 <캐슬> 전면광고가 게시됨과 동시에-
[리암홀트, 에곤 K의 <캐슬> 티저 공개 - youtube]
···성우 롤랜드 블랙우드의 목소리를 입힌, <캐슬>의 티저가 대대적으로 공개되었다.
이처럼 박자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마케팅 덕분에 한층 더 강 력해진 기대감 속.
독자들 사이에서는 앓는 소리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3.2k 에곤 k 캐슬 언제 나오냐]
[빨리··· 못 기다리겠음··· 얼른 줘]
-D-5
└얼마 안 남았다
└좀만 버티자
└크으 에곤 k의 판타지라니 기다리기 넘 힘들다
└<캐슬> 티저 봤냐
└ㅇㅇ 뽕이 참
└롤랜드 블랙우드 내레이션 미쳤더라··· 원래 오디오북 안 듣는데 도전해볼까
-미니북 이벤트 당첨된 사람 손
└나
└나도—!!!!
└으어 부럽다···.
└아 완전 궁금
└며칠만 참아라
···
에곤 k 서브레딧와 SF 서브레딧을 위시한 수많은 장르소설 커뮤니티는 말할 것도 없었고.
판타지&sf가 아닌, 일반 책 관련 커뮤니티에서도 이번 신작 을 향한 관심이 흘러넘치는 상황.
-에곤 k 신작 오디오북 기대되네요
└롤랜드 블랙우드가 성우를 맡다니ㄷㄷ
└롤랜드 배우 목소리면 전화번호부도 재밌게 들릴 듯
└롤랜드 성우가 작품 엄청 까다롭게 고르기로 유명한데
└이전 작품들도 좋다고 들었는데··· <캐슬>부터 도전해볼까 봐요
-에곤 k가 엄청나긴 하네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그 사이에 영향력이 엄청 나게 커진?
└최근에 이렇게 빨리 이름값이 높아진 작가가 있었나요
└에곤 K가 거의 유일무이한 느낌이긴 하죠
···
이처럼 <캐슬>을 향한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렀을때-
[@egon_k]
[게시물 11| 팔로워 1.1M| 팔로우 0]
아주 가끔씩, 중요 공지사항만 안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업 데이트가 거의 되지 않는 에곤 K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이곳에 간만의 새 게시물이 올라왔다.
[@egon_k]
1.1M 팔로워
[책상 위에 올려둔 <캐슬>의 하드커버판을 찍은 사진.jpg]
[성은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 성에서-
라이언이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이에 에곤 K 팬덤의 흥분이 한층 더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 었다.
완벽한 기대감 속, 일주일간의 사전 예약 기간이 빠르게 흘 렀고-
4월 13일, 에곤 K의 세 번째 장편 대작 <캐슬>의 정식 출간 일.
기다림은 끝났고, 팬들은 마법의 세계로 뛰어들 시간이 되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