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세계로의 여행(2) >
*
그 시각.
시카고대학 영문학과의 스탠리 교수는 서재의 책상 앞에 앉 아 누군가와 통화하는 중이었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4월의 기분 좋은 햇살이 쏟아지는 가운 데.
“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메일이 오길 기다리도록 하지요.”
위압적인 인상의 노교수가 중후한 목소리로 통화를 마쳤다.
나름 긴장이 되었는지 후우, 가볍게 한숨을 내쉬던 그의 시 선 끝.
책상에 올려둔 두꺼운 책 한 권이 들어왔다.
“아, <캐슬>을 마저 읽어야겠구만.”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서점에 가서 사 오지 않았던가.
···첫 문장을 읽자마자 홀린 듯이 빠져든 것은 물론, 벌써 절 반 가까이 읽어버렸다.
<캐슬>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 자연스레 그의 친구가 생각 났다.
‘해리 그 친구도 다 읽었으려나 모르겠네.’
해럴드 그린.
아이오와대학 문예창작학과의 교수이자, 스탠리 자신과는 독서 취향까지 비슷한 오래된 친우.
‘그 친구가 아니면 딱히 이런 얘기를 나눌 만한 사람이 없단 말이지, 흥.’
고리타분한 연구서나 논문 외에는 잘 읽지 않는 제 주변 교 수들을 떠올린 스탠리가 고개를 젓고는, <캐슬>의 책갈피를 꽂아둔 부분을 펼쳤다.
“그래, 여기까지··· 읽었었지.”
분량이 상당한데도 페이스가 빨라서 그런가, 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정신 없이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어느새 백 페이지씩 지나가 있기 일쑤였다.
‘남은 페이지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구만.’
스탠리 교수가 읽던 대목은 바로, 라이언이 ‘후계자 대역’이 되기 위해 가문의 가신 클라이브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는 부분.
각종 예의범절과 교양, 그 외에도 수많은 지식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동안, 청년은 이 세계에 대한 각종 정보를 모으게 된 다.
그들이 사는 ‘제국’에는 따로 황가가 존재하지 않고, 선거를 통해 귀족 중 하나가 황제로 선출되며.
이 황제가 몇 년의 임기 동안 통치한 후에는 다시 선거를 통 해 또 다른 귀족이 황제가 된다는 것.
또한-
캐슬의 주민들, 이곳에서는 ‘노예’라고 불리는 이들의 비밀.
···즉, 이들이 자연수정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 로 만들어진 유전자 조작 인간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노예는 실제로 존재하나 법적으로, 사회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런 법적 권한도, 자신을 증명할 만한 그 어떤 기록도 없 는 ‘유령’이나 다름없는 것.
“그러니 라이언, 너는 굉장히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해야겠 지.”
비아냥 섞인 클라이브의 말을, 라이언이 흘려듣는 가운데 설 명은 계속되었다.
노예 남성에게는 생식 능력이 없으며 노예 여성은 ‘아기 공 장’에서 인공수정을 통해 캐슬의 주민을 낳는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5살 때까지 보호소에서 아무런 교 육 없이, 개나 고양이처럼 자라다 제국 곳곳의 캐슬로 보내진 다.
‘그것이 바로, 아이의 인도식.’
라이언은 조슈아네 부부가 다섯 살짜리 아이를 인도받던 광 경을 떠올렸다.
조슈아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후, 다 큰 아이를 끌어 안고 조슈아의 아내가 울부짖던 광경도.]
기계로 대체하기 어려운 노동을 전담해줄, 저렴한 인력을 생 산하기 위한 아기 공장.
···그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된 라이언은 이 세계의 지독함에 치 를 떤다.
그로부터 3개월 후.
클라이브의 교육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라이언은 ‘젊은 백작’ 으로서 세상에 소개되고.
가신 클라이브의 꼭두각시가 되어 정무를 보는 와중, 자신의 출생의 비밀 또한 알게 된다.
···즉, 자신이 다른 캐슬 주민들과 달랐던 이유.
라이언은 캐슬을 소유한 가문의 전대 백작, 그러니까 ‘영주’ 가 노예를 겁탈하여 생겨난 아이였다.
‘귀족과 노예의 유전적 형질이 절반씩 섞여 있으니, 매번 캐 슬 주민들보다 더 빨리 배가 고팠던 거로군.’
노예들은 최소한의 양식으로 최대한의 에너지 효율을 내도 록 개량된 유전자를 지닌 까닭이다.
라이언은 어머니 쪽보다는 아버지 쪽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탓에 ‘후계자’ 대역을 하기에 적합했던 것이며, 애초 그가 운 좋게 ‘캐슬’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영주의 사생아라는 걸 알고 있던 클라이브의 계략 때 문이었다는 거지···.”
점차 풀려나가는 비밀, 그 뒤에 도사린 음모와 계략들.
그것들이 너무도 제 취향이라, 스탠리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이처럼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라이언은 가신 클라이브를 견 제하고자 -그의 라이벌인- 또 다른 가신과 의도적으로 가까워 진다.
그 둘을 이간질하여 가신들의 주의를 자신에게서 돌리는 한 편, 본인의 세력을 비밀리에 늘려나가고···.
‘클라이브를 향한 라이언의 심리가 재미난걸.’
사락, 사라락-
페이지 넘기는 소리가 기분 좋은 가운데, 스탠리가 생각했다.
라이언에게 클라이브란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준 첫 번째 조 력자이자, 자신을 그저 쓰고 버릴 장기말로 여기는 대척자.
복잡하기 짝이 없는 양가 감정 속에서 라이언은 클라이브를 회유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인간은 변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까, 각하?”
지금 그들은 자칭 ‘캐슬 주민 자유해방군’ , 혹은 반군이라 불 리는 세력에 어떻게 대응할지 논하는 중이었다.
“그렇네.”
“글쎄요, 혹여 겉모습이나 알맹이가 달라진다 해도.”
라이언을 마주 보는 클라이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 었다.
“그 몸에 흐르는 더러운 피는, 각인된 유전자는 바꿀 수 없는 법이지요.”
“···진심으로 그리 여기는가?”
조금은 의미심장한 라이언의 질문에, 중년의 가신은 확고한 태도로 대답했다.
“적어도 제 생각은 그러합니다. 그러니 노예 놈들에게 일말 의 빈틈도 보여주지 마십시오.”
“···.”
“악마를 상대하려면, 악마가 되어야 하는 법이지요.”
반군 세력을 피도 눈물도 없이 짓밟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 장하는 클라이브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아.’
라이언은 새삼 깨달았다.
3년의 기간이 끝나면, ‘진짜 백작’이 돌아오고 나면.
‘더러운 피, 라고 했던가.’
···이자는 단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자신의 심장을 찌르고도 남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 후, 라이언은 클라이브를 향한 망설임을 완전히 버린다.
겉으로는 성실한 귀족을 가장하며 뒤로는 점점 더 많은 반군 세력과 손을 잡는다.
그 외에도 여러 귀족 가문, 반제국주의자들 등 다양한 세력 들 사이에서 팽팽한 균형을 유지해가며-
‘마침내 3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
라이언에게 충성을 맹세한 여러 수족 중 하나가 -여전히 난 치병이 완치되지 않은- 진짜 백작을 비밀리에 암살하는 데 성 공하고.
이에 충격을 받은 클라이브가 라이언이 가짜임을 온 사방에 알리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세간에 그는 ‘헛것을 보고 헛소리를 일삼는 마약중독자’로 널리 알려져 버렸으니까.
[오랜만에 찾아간 백작의 집무실은 강렬한 향기로 가득했다.
향초의 몽롱한 향기가 코 끝을 간질이는 가운데, 그 사이 희 미하게 섞인 정체불명의 냄새를 클라이브는 알아차리지 못했 다.
‘역시, 모르는군.’
그리고 그 희미한 냄새의 정체는, 바로 캐슬에서 종종 손으 로 캐곤 했던 ‘시험의 풀’이었다.
라이언은 어느 정도 내성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환각 상태에 빠지는 것.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는, 일종의 함정이나 다름없는 셈이 었다.
“각하, 지금이라도 본인의 입으로 털어놓으시지요.”
그 사이 훅 늙어버린 가신을 보며 라이언은 조소했다.
비할 데 없는 충신처럼 구는 저자가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암살 계획을 세워놨음을 잘 알고 있기에.
“털어놓으라니, 무엇을 말인가?”
“네?”
“자네가 약쟁이라는 것?”
“그게 무슨-”
“사람들이 과연, 누구의 말을 믿을까?”
미소를 띤 채 한 걸음 다가서자, 클라이브가 저도 모르게 물 러선다.
“작위를 물려받자마자 골치 아픈 일들을 수없이 해결해낸, 유능하고 성실하며 젊은 백작? 아니면···.”
라이언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 백작을 어떻게든 좌지우지해보려고 온갖 말도 안 되는 수를 쓰다가.”
그 말에 고개를 든 클라이브가 젊은 백작의 얼굴을 마주했다.
“저의 가문이 몰락하기 직전에 이르자, 자포자기해서 마약에 까지 손을 뻗은 형편없는 늙은이?”
“···그런!”
“그래, 자네라면 어느 쪽을 믿겠나?”
주먹을 꽉 쥔 클라이브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럴 수는 없어, 내가, 내가! 라이언 너를 키웠단 말이다-!”
“클라이브, 자네의 가르침엔 늘 감사하고 있어. 그렇지만···.”
라이언의 아름다운 얼굴에 한순간, 회한의 빛이 스치고 지나 갔다.
“그러는 내내 당신은 내 목을 노리고 있었지.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았나?”
언제 어디서든.
주인의 명만 있으면 목숨을 끊을 수 있게 심장을 조준한 채 로.
“···내가 사자 새끼를 키웠구나.”
한 박자 후에야 클라이브의 입에서 나온 말에, 라이언은 바 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니 참으로 애석하군.”
그리고 이내.
클라이브의 얼굴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이 냄새는···.”
시험의 풀에서 나는 향기를 너무도 늦게 알아차린 것.
“어떻게 너는, 아무렇지도-”
“글쎄, 내 몸에 흐르는 고귀한 피 덕분인가 보지. ···그럼, 즐거 운 시간 보내길 바라네.”
그리고 이내, 클라이브는 걷잡을 수 없는 환각 속으로 빠져 들기 시작했다.
기이하게 뒤틀린 얼굴로 극락을 맛보는 중인 그를 흘깃 본 라이언이 명령했다.
“끌고 나가.”
그의 부하들에게 사지가 붙잡혀 나가는 와중에도, 중년의 가 신은 무엇을 보는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그로부터 30분 뒤.
미리 제보를 받은 기자들이 ‘마약에 중독된’ 클라이브의 사 진을 찍고, 이는 온갖 언론의 일면을 장식하기에 이른다.
최초의 조력자이자 최후의 라이벌인 클라이브마저 간단하게 처리된 이후.
라이언은 더는 거칠 것이 없었다.
문득 자신의 손이 피로 젖었다는 느낌을 받지만···.
[‘클라이브의 말이 맞았는지도 모르지.’
···악마에게 맞서려면 나 자신도 악마가 되어야 하는 법이라 고 했던가.
상대가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댄다면 그 또한 칼을 들고 대 항할 수밖에 없다.
쓴웃음을 짓던 그때, 라이언은 문득 비밀 도서관에서의 기억 을 떠올렸다.
성자들과 성녀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던, 낭만적이고도 근사 한 과거의 기록들 또한.
그들이 성스러운 힘으로 사람들을 구하고, 거짓을 설파하던 교단에 맞서 싸워-
‘무지몽매함에 빠져 있던 세계를 구원해낸 지로부터도 어느 덧 오백 년.’
···그 오백 년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리의 세계는 이렇게 되 었을까?]
그리고 몇 년 뒤.
이제는 명실상부한 ‘백작’으로 거듭난 라이언은 다시금 자신 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나를 규정하는가.
나의 겉모습? 지위? 아니면··· 언젠가 클라이브가 말했던 대 로 이 몸에 흐르는 피?
하지만 우습게도, 이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은 노예가 아니 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성 요하임께서는 말씀하셨다.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신 의 소명을 부여받기 마련이라고.’
그래, 소명.
무엇을 해내는지가 나를 규정한다면, 나는 기꺼이 나의 소명 을 스스로 결정하겠다.]
그렇게 결심한 라이언은, 이내 이런 결론을 내린다.
[오랜 세월 유지돼온 균형을 망가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비틀어진 질서를 깨부수는 것이 바로 그의 소명이라고.
파이톤 사제가 말했듯 누구에게나 그러한 소명이 있다면.
이 거짓된 구조를 파괴하는 것이야말로, 거짓된 얼굴을 갖고 서 평생토록 살아갈 라이언 자신에게 존재하는-
단 하나의 소명이 될 것이라고.]
···후우.
전율이 느껴지는 장면에 스탠리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 깍 삼켰다.
‘이게 바로, 독서가 주는 진정한 쾌감인 법이지.’
쉽사리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채, 방금 전의 장면을 다시 한 번 읽어보던 그때.
지잉, 핸드폰이 진동했다.
“아하, 드디어 왔구만.”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을 아이오와대 정교수로 정식 채용한 다는 공문 메일.
‘아빠, 언제까지 혼자서 지내실 거예요?’
그의 딸 클라라가 평소 얼마나 성화였던가.
연락할 때마다 온갖 잔소리를 쏟아내던 그 아이가, 이번에 아이오와시티 근처로 직장을 옮겼다는 연락을 해왔다.
‘이번에 아이오와대학에서 채용 공고 떴다면서요.’
그러니 아버지도 가능하면 아이오와 쪽으로 직장을 옮겨, 자 신과 함께 지내자고 제안해온 것.
그런 연유로 스탠리는 용기를 내 아이오와대학 정교수 채용 공고에 지원했고-
“흐흐흐, 해리 놈에게 얼른 연락을 해야겠어···.”
정교수 채용이 확정된 지금, 스탠리는 곧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해럴드 그린의 번호를 검색하는 가운데.
‘클라라에, 해리에 거기다가···.’
권유진, 그 재미난 학생도 볼 수 있겠구만.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감으로 온몸에 활력이 가득해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