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국 깡촌의 천재 작가-122화 (122/126)

< 다른 세계로의 여행(4) >

잠시 후.

나는 미스터 케빈과 마커스 작가와 셋이서 테이블에 둘러 앉 았다.

얼굴에 티가 나지 않아 다행이긴 했지만, 솔직히 아까는 굉 장히 식겁했다.

‘···마커스 스톤 작가가 왜 여기에?’

그러다 이내, 언젠가 미스터 케빈이 했던 얘기가 떠올랐으니.

‘마커스 작가님이 곧 디모인에 이사 오실 건데, 그러면 아마  종종 이쪽 산학협력 사무실에서 미팅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나랑 오며 가며 마주칠 수도 있을 거라는 말을-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 순간이 이렇게 금방 찾 아올 줄은 몰랐는걸.’

마른침을 삼키고는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제가 마커스 작가님 미팅하시는 자리에 갑자 기 쳐들어와버렸네요.”

직업군인 느낌이 물씬 나는 다부진 체격에 각진 턱, 매섭게  반짝이는 눈.

마커스 스톤은 책날개의 사진처럼 남성적인 외모를 자랑했 지만.

“하하, 쳐들어오다뇨, 오히려 더 좋은걸요. 이 동네에 아는 사 람이 거의 없는데, 작가들끼리 알고 지내면 좋을 것 같군요.”

웃는 낯과 말투 때문인지 직접 보니 훨씬 부드러운 인상이네 - 라고 생각하던 그때.

“저도 <토끼 남작의 모험>, 엄청 재밌게 읽었어요.”

마커스 작가가 꺼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엇, 정말요?”

“그럼요. 아기 티라노가 너무 귀여워서··· 아! 이것도 있는데.”

“···.”

이내 보여준, 그의 가방에 달린 베니 키링인형을 보고 한순 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이 자리에 유진 작가님이 오실 줄 알았으면 책을 들고  오는 건데.”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서로 사인을 받지 못해 아쉽다는 우리 둘의 모습에 미스터  케빈이 -조금 안심한 듯-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이거, 두 분 작가님들 너무 보기 좋으신데요?”

사인본은 자신이 나중에 전달해주겠다는 그의 말에, 나와 마 커스 작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

‘생각보다 말이 너무 잘 통하는걸.’

마커스 스톤.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그는 자신이 10대 청소년과 이렇게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하, 맞아요. 요즘 새로 나온 소설들 보면 확실히 그런 성 향이 있죠.”

그냥 편안한 정도가 아니라 물 흐르듯 이어지는 것은 물론이 고.

출판계에 관한, 고등학생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식견은 더더 욱 놀라웠으니까.

“아 맞다. 그, 유진 작가님 혹시.”

그래서 마커스는 아주 자연스럽게 에곤 K의 신작을 입에 올 렸다.

상대가 이미 읽어봤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 제목을 들어 봤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서.

“에곤 K의··· <캐슬>이요?”

그 제목을 들은 유진은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하하, 제가 하도 에곤 작가님 작품을 추천하고 다니니까 주 변에선 에곤 K 홍보대사냐고 묻더군요.”

물론 자신이 굳이 안 그래도 워낙 인기가 많은 작가님이긴  하다- 라고 그가 덧붙이자.

유진은 한 박자 후에야 말을 받았다.

“음, 저희 학교··· 문예창작클럽 친구들도 이 <캐슬>을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유진 작가님은요? 읽어보셨어요?”

“아, 저는···.”

아주 짧은 고민 끝, 유진이 대답했다.

“재밌었어요.”

“여억시, 그렇죠? 이거, 유진 작가님이 이미 읽어보셨다니 할  얘기가 많겠는데요.”

신나하는 마커스를 보던 유진이 가만히 물었다.

“마커스 작가님은 <캐슬>, 어떠셨어요?”

“저야 뭐, 할 말이 사실 너무 많은데···.”

감상문을 쓰라고 한다면 거의 평론 수준으로 써낼 수 있다,  라고 덧붙이는 마커스.

“다 읽고 나니 딱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

“정말, 정말로 재밌다. 이 책 속의 세계에서 나오고 싶지 않 다.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요?”

유진이 그 말에 눈을 껌벅였다.

“책 속의 세계에서 나오고 싶지 않다고요?”

“네, 뭐라고 해야 하나.”

잠시 할 말을 찾던 마커스의 말이 이어졌다.

“<캐슬>을 읽으면서··· 정말 오랜만에, 어렸을 때 책 읽던 기 억이 떠올랐거든요.”

“어렸을 때.”

“네, 원래는 제가 그렇게 책벌레 타입이 아니었거든요. 근데.”

어릴 적 가정환경이 그리 좋지 않았고, 부모님 사이도 좋지  않았다는 것.

“부모님이 큰소리를 내고 싸울 때마다 다락방 같은 데에 피 해 있었는데.”

거기에 -자신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형이 읽고 놔둔 책들이  몇 권 있었다는 것.

“원래는 형이 책을 읽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었거든요, 저야  나가서 뛰어노는 타입이었으니까. ···근데 그때 그 다락방 안에 선 심심하니까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책을 꺼내들었는데, 그 게 바로 <나니아 연대기>였죠.”

“<나니아 연대기> 재밌죠.”

“처음엔 좀 어색했지만··· 조금 지나고 나니 어느새 그 세상  속에 완전히 빠져들어 있더군요.”

“아, 그거 뭔지 알아요. 음, 뭐랄까.”

웃으며 적절한 표현을 찾던 유진의 말이 이어졌다.

“꼭··· 시공을 넘나드는 여행자가 된 기분?”

“오! 그 표현 너무 좋은데요.”

매우 정확한 표현에 마커스 스톤이 손뼉을 쳤다.

어느덧 서른중반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그때가 종종 떠오르 곤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자신과 눈앞의 책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던 첫 순간 말이다.

“읽는 내내, 근사한 갈기를 휘날리는 사자 아슬란과 함께하 는 기분이라고 할까.”

가슴 뛰는 모험,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

···그 안을 탐험하는 동안만큼은 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부  모의 악다구니, 서로를 증오하며 퍼붓는 저주의 말들, 뭔가를 집어던지는 소음 따위가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 다락방 안에서, 완벽한 허구의 세계 속에서 홀로 오 롯한 행복을 즐길 수 있었다.

그때야 비로소-

어린 마커스는 소설이 지닌 힘을, 헤어나올 수 없는 마력을  알아버린 것이었다.

“다 읽고 나서도 가끔씩, 벽장을 열 때마다 그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했죠. 아, 물론 어릴 때 말이 지만요.”

“흐흐, 그거 뭔지 알죠.”

자신 또한 어릴 때 <해리 포터>를 읽고 호그와트 입학편지 가 날아오길 기다렸다는 유진의 말에, 마커스가 웃음을 터뜨렸 다.

“뭐, 돌이켜보면 결국은 그 덕분에 제가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것 아닌가 싶네요.”

마커스의 진솔한 말에 유진이 그를 마주 보았다.

“전 마커스 작가님 취향이 좀 더··· 문예소설(literary fiction)  쪽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인걸요.”

“하하, 물론 리터러리픽션도 좋아합니다. 제 문체나 작품 스 타일도 그쪽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걸 떠나서 대중소설, 혹 은 장르소설이야말로-”

젊은 소설가의 눈이 강직하게 빛났다.

“이야기의 힘 또는 ‘본질’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장르라 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저도 생각나는 게 있는데.”

신이 난 유진이 프랑스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이야기를  꺼냈다.

“<삼총사>나 <몽테크리스토 백작>. 이런 작품은 당시만 해 도 신문에 연재되는 대중소설이었는데.”

당시 문학평론가들에게는 ‘대중의 오락거리’로 치부되던 작 품들이었지만.

끝없이 회자되며 후대의 소설들에 수많은 영향을 준 것은 물 론.

“이제는 고전명작으로 살아남게 됐잖아요? 그게 결국은 ‘이 야기의 힘’ 덕분이 아닌가 싶어서.”

때로는 소설의 예술성, 혹은 그 안에 담긴 가치와 완성도 또 한 중요하겠지만.

이야기 자체가 지닌 끈질긴 생명력이야말로 오랜 세월 후에 도 여전히 독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시간의 시험’을 견뎌내는, 진정한 고전으로 만들어주는 것 이 아닐까요.”

“···.”

그 말에 마커스는 한순간 넋을 놓은 듯 유진을 바라보더니,  이내 감탄하고 말았다.

“와, 유진 작가님.”

“네?”

“진짜로 고등학생··· 맞는 거죠?”

자신보다 훨씬 더 식견이 대단한 것 같다, 라는 마커스의 말.

“어, 그, 저희 유진 작가님이 좀-”

“제 별명이, 애늙은이라서요.”

어색하게 변명하려는 케빈을 돌아본 유진이 씩 웃으며 말하 자.

“흐흐, 잘 어울리는데요?”

마커스 또한 미소띤 얼굴로 그 말을 받아쳤다.

*

잠시 후.

미팅을 먼저 마친 마커스 작가가 나간 후 한산해진 미팅룸  안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처음만 해도 상당히 긴장했지만, 대화가 생각 외로 즐거웠 지.’

성격이나 취향도 그렇고, 문학관도 여러모로 비슷한 느낌이 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에곤 K’의 작품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독자님 이 아닌가.

나중에 에곤의 정체를 밝히는 시점이 찾아온다면, 마커스 작  가님에게는 좀 더 미리 말씀드려야겠다- 라고 마음먹던 그때.

“후우, 작가님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언질을 드렸어야 했는 데.”

아까부터 잔뜩 굳어 있던 미스터 케빈이 이제야 안도의 한숨 을 쉬었다.

“메시지 보내주셨는데 확인 안 한 제 잘못이죠, 뭐. 그리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즐거운 대화였다고 하자, 미스터 케빈 의 험상궂은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두 분이 잘 맞으실 것 같았는데, 즐거우셨다니 다 행인데요.”

“하하 그러게요. 아 맞다.”

“···?”

“마커스 작가님한테 무슨 운동하시는지 묻는 걸 깜박했네.”

그런 나를 가만히 보던 미스터 케빈이 한 박자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유진 작가님, 요즘 몸이 한층 더···.”

“흐흐, 티가 나나요? 중량을 좀 늘렸는데. 아, 미스터 케빈도  운동을 해보시면-”

미스터 케빈은 내 잔소리에 조금 시달린 후에야 본격적인 용 건을 꺼낼 수 있었다.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 시나리오, 어떠셨습니까 작가님.”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긴 했다.

‘릭 그로브.’

내게는 연극 의, 술자리 좋아하고 입담 좋은 연 출가 정도의 이미지였지만.

이번에 <피터팬> 시나리오를 받아보고서 그에 관한 인상이  180도 바뀌었다.

“완벽하던데요.”

“···!”

극찬이나 다름없는 내 표현에 미스터 케빈이 눈을 크게 떴다.

아마도 내가 여간해서는 이런 말을 잘 안 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일 터.

“과감하다 싶은 각색이지만, 원작의 메시지에서 벗어나기는 커녕 오히려 더 강화하는 효과를 주더군요.”

한마디로,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완벽하게 활용한 각색이 라는 것.

“저도 동감입니다, 작가님. 무엇보다도 <피터팬>은 <호수괴 물>과 달리, 애초에 중편을 모아서 낸 픽스업 소설이다 보니···.”

미스터 케빈이 지적한 부분은 정확했다.

일반적인 장편소설에 비해, 픽스업 소설은 그 장르적 특성상  더 과감하고도 센스 있는 각색을 요구하는 것이 사실.

“네 맞습니다. 솔직히 제 선에서는 딱히 수정 요구할 게 없다 고 할까요.”

“하하, 작가님이 이렇게 나오시는 거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은 걸요.”

“어, 저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은 아닌데요.”

내가 사서 고생하는 걸 좋아하는 타입은 딱히 아니다.

다만 아쉬운 부분을 그냥 넘기는 성격이 못 될 뿐.

“다른 건 몰라도, 각색에 관해서는 그냥 맘 편히 지켜보기만  해도 될 것 같네요.”

“저도 시나리오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근데 오히려···.”

<피터 팬>의 영화화를 맡은 알랭 노에 감독과, 릭 그로브 각 본가 모두 원작자의 참여를 바라는 상황이라는 것.

“에곤 K 작가님의 머릿속 이미지와 부합하는지를 확인해보 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건 좀 신기하네, 라고 생각하는데 이내 케빈이 설명을 덧 붙였다.

“이건 제 사견이지만, 알랭 노에 감독의 부담감이 꽤 크지 않 을까 싶습니다.”

<피터팬> 감독으로 물망에 오를 때만 해도 별다른 마음의  부담 없이 연출 제안을 받아들였을 테지만.

이후 <캐슬>이 빠르게 베스트셀러 1위를 찍고, 이후 지금까 지 내내 그 자리를 수성하고 있는 만큼.

“<피터팬>의 영화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잔뜩 커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배우 캐스팅에 관해 의견을 주 시길 바라는 것 보면 말이죠.”

“아.”

다만, 에곤 K 본인이 오디션 현장에 갈 수 없음은 잘 인지하 고 있는 만큼.

“오디션 테스트 영상을 보내줄 예정이니, 작가님께서 여유  있게 살펴보시고 의견을 주셨으면 한다더군요.”

케빈의 설명을 다 들은 나는 짧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 다.

“그거야 뭐 어려운 일은 아니죠.”

어느 정도는 나도 바라던 바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후.

<캐슬>에 관한 보고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아마존 베스트셀러 연속 2주간 1위.

미국 도서관 협회에서 선정한 이달의 책.

굿리즈 초이스 어워드 소설 부문 최종후보작···.

화려하기 그지없는 타이틀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여전히 실 감은 잘 나지 않았다.

“···.”

그럼에도 내가 여전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성공을 나 권유진의 성공이 아닌, ‘에곤 K’의 성공처 럼 바라보고 있기 때문.

‘즉,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 지켜보는 덕분이라는 거지.’

그 말은 곧 내년쯤 내가 에곤 K라는 사실을 공표하게 되면,  지금 이 평온함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과는 다르지 않은가.

이전처럼 멍하니 그 급류에 휩쓸려 나동그라지지 않을 거라 는, 강력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음, 한 달 뒤면 한국에 가야 하니까.”

···<토끼 남작의 모험> 3권을 본격적으로 구상할 타이밍이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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