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 가자(1) >
*
인천국제공항에서 -출판사 측에서 마련해준- 5성급 호텔에 도착하기까지.
이번의 한국행에 가장 들떠 있던 것은 의외로 클로이가 아니 었다.
“미쳤어, 완전 미쳤다고···!”
···아까부터 crazy라는 단어를 스무 번 넘게 연발하고 있는 네 드였다.
‘그러고 보면 네드는 국제선은 처음 타보는 거라 했지.’
엄마가 사는 애틀란타행 국내선은 몇 번 타봤지만.
해외, 그것도 이렇게 멀리까지 와본 건 처음이라고 했다.
“여기가 바로 유진, 너의 나라 한국이라는 거지.”
“···.”
“우리 클로이의 절반을 이루는 나라!”
어쩐지 네드 혼자서 엄청 감상에 젖은 가운데.
우리는 호텔에 짐을 풀고 곧바로 식사를 하러 나섰다.
사실, 장거리 여행이라 클로이의 컨디션이 제일 걱정됐는데.
“너무 너무 좋아! 다 재밌어!”
의외로 클로이는 기운이 흘러 넘쳤다.
만반의 준비를 해온 덕분에, 기내에서 이런 저런 것들로 적 당히 놀다가-
‘나 졸려, 엄마. 코 잘래···.’
기내의 불이 꺼지자 금세 잠이 들더니 나머지 시간 내내 숙 면을 취하며 온 덕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삼성동 맛집으로 유명하다는 어느 삼겹살 전 문점에 도착한 참.
“오, 실내에 바비큐 덱이 있네?”
전형적인 고깃집 불판을 보며 신기해하는 네드의 모습에 고 개를 갸웃했다.
“너 한식당 안 가봤나?”
“음, 몇 번 가보긴 했는데 이런 게 있는 곳은 첨 와보네.”
기껏해야 비빔밥과 잡채를 파는 곳을 가본 게 전부라는 것.
어쨌거나 우리는 사람 수대로 삼겹살을 주문하기로 했고-
「줘기요~」
네드가 나한테 배운 한국어로 어설프게 손을 들어 점원을 부 르려던 그때.
“이거.”
내가 가리킨 것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응? 웬 버튼.”
“이게 호출 벨이야.”
네드가 긴가민가하면서도 벨을 눌렀고, 띵동- 하는 소리에 깜짝 놀란 것도 잠시.
점원이 곧바로 우리 테이블로 왔다.
「주문하시겠어요?」
그 광경에 네드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클로이도 두 눈을 깜빡거리며 신기해하더니 나를 돌아보며 작게 말했다.
“오빠아~ 나도 나도 누를래.”
“안 돼, 이따 필요할 때만 눌러.”
“에잉.”
아버지가 주문을 마치고 나자, 클로이가 점원을 돌아보며 활 짝 웃었다.
「고마어요~」
그러자 방금 전만 해도 사무적이던 점원의 얼굴이 흐물흐물 풀어졌다.
「너무 귀여워~ 한국에 놀러왔쪄요?」
「저, 한국 사람이에요~ 아빠 한국사람~」
「어머 그렇구나. 재밌게 놀다 가요.」
점원은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클로이와 몇 마디 더 나누고 멀어져갔다.
‘그래도 클로이가 한국말은 제법 하네.’
나와 아버지가 집에서는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는 덕분인지, 일상적인 대화는 어느 정도 가능한 수준이다.
듣기나 말하기는 나쁘지 않지만, 읽기는 전혀 못하니 클로이 가 바라는 대로 언젠가는 한글도 따로 공부해야겠지만···.
일단 영어부터 제대로 익히고 나서 시간을 들여서 해도 괜찮 지 않을까, 생각하던 그때.
“어 잠깐만, 우리 이런 거 안 시키지 않았어?”
대여섯 가지가 넘는 기본 반찬이 나오는 모습에 네드가 당황 하는 것이 아닌가.
“이건 기본 반찬이야.”
“기본 반찬? 그게 뭔데.”
케이트에게서 설명을 들은 네드는 더더욱 신기해하는 모양 새였다.
“···이런 걸 이렇게 많이 준다고? 그럼 식당에 뭐 남는 게 있 나?”
인심이 후해도 너무 후하다는 말에 아버지가 웃음을 터뜨렸 다.
“네드 네가 한식당에 안 가보긴 했나 보구나.”
“아, 아무래도 그렇죠.”
“하긴 아이오와주에서 제대로 된 한식당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긴 하니까.”
“맞아 여보. 전에 코리안 레스토랑이라고 써 있길래 들어가 보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리엔탈풍의 요리를 내놓고 있었다고 덧 붙인 새어머니가 네드를 돌아보았다.
“후후, 나도 한국에 처음 갔을 때 엄청 놀라긴 했어.”
“고모도?”
“그럼. 지금이야 뭐 익숙하지만. 근데 몇 년 사이에 되게 많 이 바뀐 것 같네. 안 그래, 여보?”
“그렇지. 한국이 빨리 바뀌긴 해서 말이야.”
1년에 한두 번씩은 꼭 출장오는 아버지의 눈에도 그 변화가 매번 보인다고 한다.
···회귀하기 이전, 몇 년에 한 번씩 한국 출장을 가곤 했던 나 역시 그 변화의 속도에 매번 놀라곤 했고 말이다.
그리고 잠시 후.
“으어, 맛있겠다.”
“배고파아··· 고기, 고기 죠아.”
두툼한 삼겹살이 불판 위에서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노릇노 릇 구워졌고.
점원이 와서 커다란 가위로 서걱서걱 그것을 잘라주는 모습 에 네드가 또 한 번 신기해했으며.
“으아아, 입에서 살살 녹아···”
“완전 맛있쪄! 더, 더 줘!”
“클로이, 꼭꼭 씹어 먹어. 천천히, 입에 든 거 다 먹고.”
“어머, 너무 맛있구나.”
“다들 잘 먹으니 보기가 좋구나 하하.”
···모두가 아주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
이처럼 유진 일행이 한국에서 기분 좋은 첫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
뉴욕의 어느 스튜디오에서는 영화 오디션이 한창이었다.
“잠시 휴식하고 합시다!”
스태프의 한마디에 오디션장의 관계자들 모두 안도의 한숨 을 내쉬는 가운데.
“아오, 힘들구만 힘들어.”
제일 가운데에 앉아 있던 감독 알랭 노에가 눈앞의 음료를 집어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새치투성이의 회색 머리, 아무렇게나 기른 수염 때문에 일견 괴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섬세하고 사교적인 성격인 그의 말에 각본가 릭 그로브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디션 한두 번 해보나, 뭐. 그리고 이번은 워낙 난이도가 높잖아?”
“···그건 그렇긴 하지.”
오랜 인연을 자랑해온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알랭 노에.
애초 감독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그 점은 감안하긴 했지 만, 에곤 K의 <멸망한 세계의 피터 팬>을 원작으로 하는 이번 작업은 알랭 자신에게도 하나의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원래 원작이 있는 작품은 잘 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 작품은 욕심이 나는걸.’
한창 이 <피터팬>으로 영화판이 떠들썩할 때, 별 생각 없이 시놉시스를 읽어봤다가 홀딱 빠져버린 까닭이었다.
제작사와 얘기도 일사천리로 진행된 덕분에 순항하고 있는 것은 좋았으나···.
‘피터 팬딧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참 어렵단 말이지.’
외모는 13세 소년이지만 그 알맹이는 35세의 성인 남성인 주인공.
그것도 난치병을 오래도록 앓아온, 지극히 복합적인 심리를 지닌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는데.
“···그걸 과연 아역배우가 표현해낼 수 있느냐, 라는 거지.”
요컨대 캐스팅 자체의 난이도가 높다라는 그의 말에 릭이 물 었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 자신이 없다 그거야?”
“당연히 그건 아니지. 배우의 연기가 좀 아쉬워도 보완할 방 법이야 있으니까.”
어떻게든 연기를 극한까지 끌어내고, 장면 하나 하나, 정말 작은 부분까지 디렉팅을 해서 따낸 컷을 블럭 조립하듯이 붙여 넣으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근데 모르겠다, 내가 개인적으로 그런 스타일이 아니라고 해야 되나?”
알랭 노에는 배우 본인에게서 뿜어져나오는 그 특유의 카리 스마와 저력을 조금 더 신뢰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니까, 본인의 디렉팅으로 만들어진 연기보다는-
“배우가 시나리오에 완벽하게 몰입한 채, 그 상태에서 보여 주는 모습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걸 목표로 한다 이 말이지?”
“···그렇지.”
“그게 이상적이긴 하지, 너무 이상적이라서 어렵지만.”
각본가 릭의 말에 알랭이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런 만큼, 그는 그 어떤 감독들보다도 캐스팅 오디션 을 -남들이 보면 지독하다 할 정도로- 철저하게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원작자, 그러니까 에곤 K 작가에게 오디션 관련하여 의견을 달라 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원작자의 눈에는 과연 어떤 배우가 이 배역에 제일 어울릴지 궁금했기 때문.
···그 같은 알랭의 말에 릭 그로브는 처음에 조금 반대했었다.
‘글쎄, 소설가가 영화배우 연기를 보고 평가할 게 있겠어?’
‘아니 아니지, 내가 바라는 건 그쪽이 아니잖아? 연기보다는··· 그래, 캐릭터 이미지를 봐달라는 거지.’
그제서야 납득한 릭은 이제 와서 이런 말을 꺼냈다.
“생각해보면, 원작자랑 협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더 라.”
“응? 웬일로 그런 말을 다하네.”
“아니 아니, 그 말이지.”
릭이 꺼낸 말에 알랭은 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의 친우이자 동료인 릭 그로브가 연출한 연극 가 대대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
···그 작품의 경우, 이미 모든 기틀이 다 짜여진 만큼 릭이 일 선에서 물러나도 공연 상연에는 전혀 차질이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래, 유진 권이라고··· 원작소설을 쓴 학생 말 이야.”
“학생, 학생이라고 했지.”
“그것도 무려 고등학생 말이야.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자네 한테도 얘기했던 거 기억 안 나나?”
“기억 나지.”
“솔직히 말해, 난 로렌 그 친구가 원작자를 보러 간다고 했을 때 이해가 잘 안 갔거든. 근데···.”
리허설 때 와서 논의하는 모습을 보며, 나이가 어린 데도 보 통이 아니구나- 감탄하고 말았다는 것.
“우리 배우님도 굉장히 좋은 영향을 받았고.”
“아, 젬마 도노반.”
릭의 말에, 알랭은 오픈런 당시에 봤던 그녀의 충격적인 연 기를 떠올리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 ‘아름다운 금발 상속녀’ 이미지로 소비돼 왔던 젬마에 게 그 정도 포텐셜이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으니까.
‘마음 같아선 이번 작품에서 어떻게든 캐스팅해보고 싶었지 만.’
젬마의 스케줄도 그렇고, 그녀에게 마땅한 배역이 없다는 게 못내 아쉬웠으니 말이다.
그런 알랭의 속마음을 뻔히 아는 릭이 웃으며 덧붙였다.
“뭐, 꼭 이번이 아니더라도 기회는 얼마든 있잖아? 안 그래도 젬마 배우가 이 <피터 팬>에 관심이 많은데, 언제 한 번 촬영 장에 초대해보자고.”
“오 그거 괜찮네.”
그리고 이내, 두 사람의 화제는 ‘고등학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식견’을 지닌 의 원작자 학생에게로 향했다.
“나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 요즘 애들은 다 그렇게 똑똑한가? 우리 때랑은 아주 딴판이라.”
“야, 우리 집 애들 보면 그렇지도 않다.”
얼마나 속을 썩이는지 모르겠다는 그의 말에 릭 그로브가 픽 웃었다.
“아빠가 천재 영화감독인데, 굳이 애들까지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있겠어?”
“야.”
“나 같아도 게임 좀 하고, 적당히 즐기면서 살겠다.”
“이거 이 친구 안 되겠네, 자기 자식 아니라고 말을···.”
두 사람이 농담을 주거니받거니 하던 그때.
“다시 오디션 재개하겠습니다!”
단비 같았던 10분간의 휴식이 끝나고, 곧바로 피터 팬딧 배 역의 캐스팅 오디션이 재개되었다.
“다음 배우분 들어와 주세요.”
지금까지 20여 명 정도가 오디션을 본 상황.
앞서 본 아역 배우들 모두 이름 깨나 날린다는 친구들이었지 만.
헐리우드에서 선전수전 다 겪은 두 사람이 보기에는 아쉬운 부분투성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들어온 것은 바로 노아 데보로.
어린 소년에서 청소년 시기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선이 고운 아역배우를 알랭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호수에 무언가가 산다> 주연이었지.’
역시 에곤 K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그 영화에서 굉장한 호연 을 선보였을 뿐 아니라.
어릴 때부터 ‘천사 같은 이미지’로 알려진, 한때 광고계를 휩 쓸던 사랑스러운 아역 스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꼭, 이런 재능 있는 아역들에게는 부모라고 부르기 도 부끄러운 인간들이 있기 마련이지.’
비단 노아 데보로뿐이 아니고, 비슷한 케이스의 아역들을 수 없이 봐온 알랭은 조금 입안이 쓴 기분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노아 데보로입니다.”
“그래요, 노아 군.”
알랭 노에와 릭 그로브.
<피터 팬>의 감독과 각본가는 반갑게 인사를 받았다.
“피터 팬딧 역에 지원했는데, 연기 시작하기 전에 특별히 하 고 싶은 얘기라도 있을까요?”
릭의 물음에 노아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뭐 정확한 건 연기로 직접 보여드리는 게 제일 좋겠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제가 여기 주인공과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노아 군이 피터 팬딧과 닮았다고요? 글쎄, 어떤 부분이?”
두 눈을 껌벅이며 릭이 되묻자, 씩 웃으며 대꾸하는 노아.
“겉모습은 어린 소년이지만··· 내면은 나이 들어버린, 바로 그 런 느낌?”
“이거, 상상이 안 되는데.”
“그래 그래, 내 이미지 속의 노아 군은 그런 느낌이 아니란 말이죠.”
“하하, 그런가요? 그렇다면···.”
노아의 말간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걷혔다.
“바로, 연기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좋아요, 기대해보죠.”
그리고 잠시 후.
노아가 잠시 눈을 감고 짧게 심호흡하는 듯하더니.
셋, 둘, 하나, 아주 작게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
반짝, 하고 눈을 떴다.
그 안에 새파란 눈동자가 두 사람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가운 데.
“나는, 이 빌어먹을 세상의 완벽한 리더였다.”
촉망받는 10대 천재 아역 배우 노아 데보로.
그의 눈빛은 이미-
“황폐와 절망의 세계 어딘가, 네버랜드의 약속을 믿는 아이 들을 이끄는··· 마지막, 희망의 등불.”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 남으려 분투하는 피터 팬딧의 눈빛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