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개방
천천히 눈을 떴다.
여느 날의 아침과 다를 바 없는 시작이었지만,
“으.”
날 맞이한 건 어두컴컴한 골방의 천장이 아니었다.
눈을 뜨기 무섭게 쏟아져 들어오는 찬란한 빛.
군대에 있을 때 당한 눈뽕이 떠오를 정도로 빛은 강렬했다.
달…?
어떤 놈이 눈앞에 후레쉬를 비추고 있나 했는데, 인위적인 빛이 아니었다.
슈퍼문이란 단어로도 한참 부족해 보이는 거대한 달.
체감상 조금만 걸어가도 닿을 듯한 크기의 달이 공간 전체를 빛으로 밝히고 있었다.
밤이구나.
달빛 때문에 잠시 헷갈렸지만 주변은 밤이었다.
밤이라니.
하늘을 보고 있자니 어안이 벙벙했다.
진짜 밤.
서울에서 밤과 낮이란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데몬을 막기 위해 하늘까지 뒤덮여 버린 장벽 때문이었다.
현재 서울에서 낮과 밤이란 개념이 존재할 수 있는 건 인공 태양과 인공 달 덕분인 것.
이렇게 진짜 밤과 달을 보는 건 몇십 년만인지 모르겠다.
“후웁.”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와.”
간단하지만 강렬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상쾌한 공기라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닌 자연 그대로의 공기였다.
대체 여기는 어디기에 이런 게 가능한 걸까?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공간.
“…!”
공간에 있는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
아, 사람은 혼자지만.
주변엔 처음 보는, 처음 보지만 딱 봐도 엄청난 가치가 있을 듯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가득.
단어 그대로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물건들.
자세히 살펴보니 물건들은 모두 한 가지 계열이었다.
무기.
검과 도, 창, 도끼, 활, 단검 등 갖가지 무기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 중엔 사용법을 알 수 없는 구슬과 지팡이도 보였지만, 어찌 됐든 무기로 사용이 될 것 같았다.
저벅.
가장 가까이에 꽂혀 있는 수리검으로 다가갔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오던 거대 수리검.
이런 건 실제로 던지려면 힘과 관련된 능력자거나 거인이어야 할 것 같았다.
반짝.
영롱하게 반짝이는 청록색의 수리검.
나도 모르게 빛에 이끌려 수리검으로 손을 내뻗었다.
손으로 수리검의 감촉이 느껴지기 직전,
“손대지 말거라.”
“!!”
분명 아무도 없었던 공간으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목소리에 색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만약에 있다면 묵직하면서도 기품 넘치는 찬란한 황금색일 것 같았다.
“나의 것이니라.”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
분명 조금 전까진 없었는데?
찬란한 달의 아래.
거대한 황금색 왕좌가 솟아있었다.
왕좌… 맞겠지.
그리고 그 왕좌 위에서 턱을 괸 채 날 바라보고 있는 남자.
왕좌에 잘 어울리는 황금색 머리와 눈동자,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까지.
지금까지 봐 오던 어떤 연예인보다도 눈부신 생김새였다.
그리고,
남자는 아직 자신에 대해 어떤 소개도 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어떤 왕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남자는 최소 왕이라는 것을.
“너 뭐냐?”
“네…?”
다짜고짜 뭐냐고 물어오는 남자에 말문이 막혔다.
“저… 전 백운이라고 합니다.”
“이름 말고 뭐하는 놈이길래 나의 공간에 들어왔냐는 거다.”
그건 나도 알고 싶은 부분이다.
내가 한 거라곤 그냥 묵혀두고 있던 창고에 들어와 처음 보는 검을 만졌을 뿐이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창고에 있던 검에 손을 뻗었더니 이곳으로 와졌거든요.”
“창고에 검…? 아.”
남자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신살도를 말하는 거군.”
신살도…?
그런 거창한 이름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거야 자기 마음이지만 내가 봤던 부러진 검에겐 과분한 이름이었다.
너무 녹슬고 낡아서 당근조차 베지 못할 것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과분한 이름이라 생각하는가?”
“…! 아… 아닙니다.”
독심술이라도 쓰는 건가.
“무리도 아니지. 그 모양이 되어버렸으니.”
그나저나 이 남자는 창고에 처박혀 있는 검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신살도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단지 베어야 할 것을 베지 못하고 방치된 탓이지.”
창고에서 했던 생각이 옳은 듯했다.
지금은 녹슬고 낡아 반으로 부러져 버렸지만, 다른 상황이었다면 신살도란 이름에 걸맞은 모습이었을 수도 있었다.
“넌 그런데… 왜 그렇게 늙은 거지?”
“….”
참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는 왕이다.
유교 사상의 장유유서나 어른 공경 같은 건 모르는 건가.
아, 물론 저 왕이 생김새는 젊더라도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주름이 많고 세월을 정통으로 맞았다곤 하나, 40살은 늙은 나이가 아닌데.
새삼스레 억울함이 느껴졌다.
“네 녀석이 온 곳에서 인간은 수명이란 한계를 넘어섰을 텐데?”
“…!”
창고의 검에 이어 능력과 개방까지.
세상 밖 물정은 하나도 모를 것 같았는데 의외였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나의 무기들. 그 보물들이 나의 눈이며 귀다. 그러니 어떻게 아는 건지 궁금해할 필요 없느니라.”
“혹시… 독심술도 가능하신 건가요?”
“너의 표정이 너무 뻔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
잊을 만하면 표정 똑바로 하고 다니라던 김덕만의 충고가 떠올랐다.
괜히 괴롭히고 싶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닌 모양이다.
“흐음.”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너, 설마 이제 서야 개방을 한 게냐?”
잠시 잊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면서 나도 모르게 떠올렸던 단어, 개방.
남자의 말에 비쳐 보건대 난 개방을 한 것 같았다.
“그… 그런 거 같은데요.”
“풉… 하하하하하!!”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공간이 울릴 정도로 커다란 웃음소리.
뭐가 저렇게 웃긴 걸까.
“하하… 하….”
한참을 웃다 간신히 그친 남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우매한 녀석이로다. 빨리 개방했으면 영원한 젊음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빠직.
남자와 나 사이엔 절대 편하게 대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지만, 예민한 부분을 건드려서일까,
나도 모르게 불만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저라고 안 하고 싶어서 안 했겠습니까. 조건을 몰랐으니까 못한 거지.”
사실 내가 평소와 다르게 한 행동은 딱히 없었다.
처음 보는 검을 만졌던 것뿐이었다.
그다지 대단하다고 볼 수 없는 행동.
“나의 신살도를 만진 것. 그것이 네놈의 개방 조건이었구나.”
“…”
말문이 제대로 막혔다.
남자가 몇 초에 걸리지 않아 말한 나의 개방 조건.
정말 간단한 행동이었다.
난 그런 간단한 걸 못해서….
자책하려다 고개를 내저었다.
결과론적인 생각이었다.
지금 듣고 나니 간단한 거지 내가 어디 가서 저 남자가 귀하다 말하는 물건을 만질 수 있었겠는가.
난 수십 년을 일한 유물관의 유물조차 한 번 만져보지 못한 바닥 인생인데 말이다.
그래도 억울하긴 하네.
차라리 마지막까지 안되는 게 나았을 텐데.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있었다.
개방의 조건을 찾는 걸 포기한 지도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시점.
어느 순간부터 난 개방을 포기하고 있었고, 현재의 바닥 인생을 현실이라 생각하며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개방이라니.
허리는 조금만 움직여도 뼈 소리와 함께 고통이 밀려왔고, 팔과 다리 역시 시도 때도 없이 저려올 정도로 내 몸은 고장 나 있었다.
조금이라도 부피가 있는 물건은 힘이 딸려 들지도 못하는 최악의 몸.
이런 몸으로 이제 와서 영생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개방된 능력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느냐?”
“…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서 궁금해 하는 게 의미가 있는 건지.”
남자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날 응시했다.
모든 걸 꿰뚫어 볼 것 같은 황금색 눈동자.
“개방된 능력 덕분이구나. 나의 공간에 들어와 있는 건.”
자세히 보니 알겠다는 듯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공간에 침투하는 게 내 능력인 걸까?
“그리고 어찌 보면 나와 같기도 하구나.”
“…?”
물음표를 띄는 내 표정에 남자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알 리가.
“난 모든 무기의 왕.”
남자의 엄격하고도 근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근.
동시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대체 누구길래 저런 근엄한 얼굴로 뜸을 들이는 걸까?
혹시나 신!?
제우스? 헤라클레스? 아니면 비슈누?
기대감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두근두근두근.
“카이안.”
“?”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라고?
카이안?
“뭐지? 그 얼굴은.”
카이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어떤 표정을 지어야 되는 거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헉! 또는 우와! 하며 놀라야 하는 걸까.
“모르는 이름이어서 그런가? 알 리가 있겠느냐. 모든 무기의 왕이었지만, 이곳으로 들어온 지는 꽤 됐으니. 지금 살아있는 인간들은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그… 그렇군요.”
“….”
아무 대답이 없는 카이안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왕임을 밝혔으니 고개를 조아리거나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는 걸까.
지금 허리 상태로 고개를 조아렸다간 바로 요단강 행일 텐데 말이다.
무리해서라도 무릎을 꿇어야겠다 생각한 순간, 카이안이 미소를 머금었다.
“뭐 어쨌든. 네 녀석이 나의 공간에 들어온 첫 인간이다. 영광으로 알거라.”
“가… 감사합니다.”
“네 녀석의 능력은 뭔지 파악했느냐?”
개방이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능력을 깨닫는다고 했었다.
그리고 나 또한,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능력에 대해 깨달아 가고 있었다.
“공명.”
싱긋.
나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미가 있는 사연, 역사 혹은 신화가 담겨있는 물건을 건드렸을 때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네 능력이다.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것도 그 능력 덕분이고.”
기분이 이상했다.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개방을 했는데도 기쁘다기보단 묘한 기분.
능력이 마음에 안 들어서일까?
아니면 이미 늦어버려서일까.
아무 말 없는 날 잠시 바라보던 카이안.
“늦었다고 생각하느냐?”
“….”
카이안이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된 능력이 몸의 시간을 되돌리는 게 아닌 이상,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아픈 부분을 골고루 잘 때리는 무기의 왕, 카이안.
정확했다.
공명이란 능력을 얻었다 한들 거동도 불편한 몸을 가지고 뭘 하겠는가.
내가 만질 수 있는 유물은 전시관의 것들이 다였고, 아마 룰을 어기고 만지는 순간 바닥 인생에서 지하로 내버려질 것이었다.
“만약.”
“…?”
카이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가볍게 말을 건네던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다시 한번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
잠시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공간의 중앙에 있는 왕좌로 찬란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어떻게 하겠느냐?”
어떻게 할 거냐는 카이안의 질문.
예상외로 머리가 복잡해지거나 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