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기회
“다시 살고 싶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튀어나왔다.
이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대답은 시원해서 좋구나. 이유는?”
이유를 묻는 카이안에 수십 년간 쌓여 왔던 것들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개방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바닥에서 무능력자로 살아온 인생.
어떻게든 강해져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그리고,
- 운아,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내가 다 무찌르고 올 테니까.
- 백운 님,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니까요. 싸우는 건 제 역할입니다.
- 내가 지켜줄게.
바닥 인생이기에, 무능력자이기에 어쩔 수 없다 여겨왔던 것들.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들.
난 무능력자잖아, 뭘 할 수 있겠어.
싸움 같은 게 불가능하잖아, 숨어있을 수밖에 없어.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꽈악.
어쩔 수 없다는 속 편한 말로 외면하고 잊으려 했던 모든 것들.
잊으려 했지만,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후회되니까요.”
세상을 종말의 날로부터 구하겠다거나 그런 거창한 걸 하겠다는 게 아니었다.
그저,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외면했던 일들에 최선을 다 해보고 싶었다.
다시는 후회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걸 위해 강해지고 싶었다.
강해질 수 있는 끝까지 말이다.
“다시 살면 후회 안 할 자신은 있고?”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개방을 함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고, 지금보다 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삶이 기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확신할 순 없지만, 아직 살아보지 않았다는 건 적어도 후회를 안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거니까요.”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대답의 이유는 충분했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던 카이안이 입을 열었다.
“나는 어떨 거 같으냐?”
“네…?”
“억겁의 시간을 살아온 나는… 과연 지나온 삶을 후회할까, 아니면 만족하며 행복해할까?”
“이 정도의 무기들을 모으며 왕이 되셨으니 행복하실 것… 같지만.”
“같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휘황찬란한 보물급 무기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차가운 달빛과 무기 사이에 홀로 앉아있는 카이안에게선 짙은 고독과 외로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대답을 망설이는 내 모습에 카이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됐다. 대답하지 않아도 알 것 같군. 그래서, 다시 주어진 삶에선 어떻게 살 생각이지?”
“위로 올라갈 겁니다.”
올라가고 올라가 손이 닿을 수 있는 극한까지 올라가서.
후회로 남아 있는 것들을 바꾸고 싶었다.
“단순해서 좋군. 그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카이안이 손을 들어 올렸다.
카이안의 손으로 날아드는 푸른 검 한 자루.
“아까도 말했다시피 난 뛰어난 무기를 모은다. 그리고, 내 손에 들어온 무기를 사용할 수 있지. 여기서 사용은…”
“!!”
카이안이 든 검으로 퍼져 있던 달빛이 모여들었다.
“단순히 휘두르는 것이 아닌, 각 무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사악!
카이안이 하늘을 향해 검을 크게 휘둘러 보였다.
콰아아아!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하늘에서 이따금씩 달과 별을 가리던 구름들.
그 구름들이 카이안이 휘두른 결대로 갈라져 버렸다.
“그리고 또 하나의 능력은 계승.”
스윽.
왕좌에서 일어난 카이안이 느긋한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왔다.
“나의 능력을 그대로 전해줄 수 있지. 물론, 계승이란 능력 자체는 제외하고 말이다.”
다가온 카이안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조용히 자신의 능력을 말해주고 있는 카이안.
지금 내게 계승을 해주겠다는 의미일까?
“넌 아직 모르겠지만, 네 녀석의 능력과 나의 능력은 좋은 합을 이룰 수 있겠지. 이미 세월이 지나 바스러져 내가 손에 넣지 못한 것들까지, 넌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훤칠한 키로 내려다보고 있는 카이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어떠냐? 내 능력, 받아 볼 테냐?”
“!!”
왕의 엄청난 제안에 눈이 커져 갔다.
이렇게 눈이 커진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어째서 제게…?”
만난 지 이제 갓 한 시간 정도가 되었을 뿐이다.
정확히 카이안이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주겠다니.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거라. 동의한다면, 아까 말했던 대로 기회도 주마.”
이유를 말해줄 것 같지 않은 카이안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하늘을 가르던 힘과 다시 살 수 있는 기회.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좋다.”
카이안이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렸다.
잠시 후 카이안의 손으로 다가오는 황금색의 검.
푸욱.
너무 갑작스러웠다.
“!!”
고개를 내려 심장에 꽂혀진 검을 바라봤다.
신음조차 나오지 않은 건 너무 놀라서는 아니었다.
심장에서 느껴지는 건 뭔가 날붙이에 꿰뚫린 것이 아닌, 따듯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어디 한 번 잘 살아 보거라.”
사아아아….
심장에 검이 꽂힘과 동시에 공간 전체가 빛의 입자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카이안의 몸과 함께.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공간과 함께 카이안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놀랄 필요 없다. 왕은 두 명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니까.”
“어… 어째서!”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사라지면서까지 처음 보는 나에게 왜?
“글쎄.”
싱긋.
흩어져 가는 카이안에게 그려지는 미소.
아까의 미소와는 달랐다.
왠지 모르게 서글프면서도 지친 듯한 미소였다.
“그냥… 왕의 변덕이니라. 그리고, 이왕 올라갈 거라면 끝까지 가거라. 힘의 한계 때문에 무언가를 놓치지 않도록 말이다.”
목 위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빛의 입자가 되어버린 카이안.
카이안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왕이 되거라.”
* * *
사방이 캄캄했다.
동시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기도, 소리도, 빛도.
어느 것 하나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달빛으로 가득 채워졌던 공간에 있었는데.
설마 꿈은 아니겠지.
아니면 정신이 나가버렸던가.
그래선 안 된다며 열심히 부정을 하던 중.
사아아…!
점점 앞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
언제 그랬냐는 듯 사방이 밝아져 있었다.
살을 간지럽히는 따듯한 햇빛.
밖…?
손끝으로 느껴지는 까끌거림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 너무 급하게 일어나면 허리가
“…?”
멀쩡했다.
오랜 시간 날 괴롭혔던 허리의 통증.
그 통증이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 다시 한번 살 수 있다면.
그제야 카이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삶의 기회.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깨져 있는 유리가 보였다.
덥석.
손이 베이든 말든 일단 집어 들어 얼굴을 비춰보았다.
“하…”
탄성을 내뱉는 거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유리 속에 비추어진 나의 모습은 더 이상 자글자글한 주름을 기본으로 삶의 의지마저 박탈되어버렸던 처참한 몰골이 아니었다.
말끔.
왁스를 발라 깔끔하게 넘겨진 머리와 주름은커녕 잡티 하나 존재하지 않는 깨끗한 피부까지.
하도 오래되어 기억에서조차 퇴색됐던 젊었을 적 나의 얼굴이었다.
“하하….”
유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게 가능하다니.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마음 같아선 미친놈처럼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크르르.”
“…?”
크르르?
그렇게 자아도취 상태로 유리를 바라보고 있던 중.
등 뒤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윽.
천천히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
너무 놀라 육성으로 나올 뻔했지만, 눈앞에 있는 놈들을 자극할까 간신히 참아냈다.
날카로운 이빨과 거대한 몸체.
개의 형상으로 침을 줄줄 흘리고 있는 데몬들이 몇 발자국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저 녀석들이 있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서울이 아니구나.
그리고 서울이 아니라면, 아직 장벽이 쳐지기 전이라는 것.
하운드라는 이름을 가진 데몬들.
무리를 지어 다니며 발견한 사람이나 동물을 무차별적으로 뜯어 먹는 녀석이었다.
- 왕이 되어라.
꼭 카이안이 시켜서는 아니었다.
그저, 이왕 올라갈 거라면 힘의 부족으로 무언가를 잃지 않아도 되는 최고까지 가볼 생각이었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 왕이 되는 걸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하운드라니.
아직 무기 하나 모으지도 못했는데 하운드라니.
설마 여기서 죽는다고?
돌아온 지 5분도 안 지났는데?
안될 말이었다.
“….”
하운드 무리와 나 사이로 찾아온 정적.
셋에 뛴다.
하나.
팟!
셋까지 세고 있을 여유 따윈 없었다.
“크르르! 컹컹! 컹!”
얌전한 척 하던 먹이가 튀어서인지 하운드 놈들은 잔뜩 화가 난 모양이었다.
지성이 있는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해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
너네도 내 입장이면 억울해서라도 도망칠 테니까.
“컹! 컹! 컹!”
쫓아오며 무서운 소리를 뱉어내는 녀석들.
소리로 거리를 가늠하며 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장벽이 쳐지기 전이라면 각 지역을 지키는 가드들이 있을 터였다.
훼엥.
말 그대로 거리가 휑했다.
설마 버려진 도시?
불길한 생각이 엄습해왔다.
장벽이 쳐지기 전에도 데몬이 너무 자주 출몰하거나 하는 장소는 전력의 부족으로 버려지기 일쑤였다.
여기가 그런 곳이라면 지금 날 구해 줄 사람은 없다고 보는 게 현실적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사람 찾기는 포기.
하지만 삶은 포기할 수 없다.
빠르게 고개를 돌려 무기가 될만한 걸 탐색했다.
우우웅.
눈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 무너진 건물 사이로 은은한 황금빛이 새어 나왔다.
타닥!
저 빛이 날 죽음으로 이끌지도 모르지만, 일단 내달렸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라아!”
조금 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소리.
점점 따라잡히고 있었다.
눈썹 흩날리게 뛰던 중, 건물이 무너지며 떨어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영국 런던 거리를 완벽히 재구성! 인천 속의 런던을 즐기세요.]
더럽게 긴 문구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조졌다.
그것도 완전히 조졌다.
빛이 새어 나오길래 뛰어왔더니 런던 거리라니.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있을까 싶어 달려왔는데 거리 전시회라니!
삶이 아니라 죽음으로 이끄는 빛이었단 말인가.
“커어어어엉!”
귀 바로 뒤까지 들리는 소리에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우당탕! 쿵!
“아으….”
데굴데굴 구르다 무언가에 머리를 부딪혔다.
쓰려오는 머리를 어루만지는 사이,
“크르르…!”
“크르르르릉!”
여러 마리의 하운드가 날 포위하며 다가왔다.
뒤에는 막다른 길.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했는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하운드들.
오반데.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이런 단어를 써본 게.
젊어진 몸에 반응한 건지 이맘때쯤 쓰던 단어가 튀어나왔다.
어쨌거나.
기가 찼다.
새로운 삶을 살며 예상하지 못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건 알았지만.
지금은 좀 아니지 않은가.
아직 아무것도 못 했단 말이다.
우웅.
!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빛을 뿜어내고 있는 무언가.
곁눈질을 해 빛을 살폈다.
면도칼…?
하마터면 욕지기가 튀어나올 뻔했다.
빛을 뿜어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면도칼.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조막만 한 건 아니었다.
나름 손잡이가 있고 사각형의 칼날이 과도 정도는 되는 크기.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난 과일 깎아 먹을 칼이 아니라 앞에 있는 괴물을 죽일 게 필요한데.
면도칼 옆에는 작은 푯말이 떨어져 있었다.
[런던 거리 어느 미용사가 사용했던 면도칼]
미용사가 거대한 대도로 머리를 잘랐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크르르르!!”
이제 먹을 때가 됐다 생각했는지 맨 앞에 있던 하운드가 내게 달려들었다.
이에 질세라 연달아서 도약하는 하운드 무리.
죽기 전에는 주마등이 보인다 했던가.
왠지 모르게 하운드가 느릿하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잠시 느릿하게 다가오는 하운드를 보고 있던 중.
죽을 땐 죽더라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손보단….
빛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낫겠지!!
떨어져 있는 면도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