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두 명의 해적
“스으으..”
황금빛 입자가 손으로 모여들었다.
꽈악.
손으로 느껴지는 면도칼의 감촉.
짜릿한 몸의 감각을 살리며 개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길지 않은 지속 시간.
망설이고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난 미친놈이다.
다시 한번 자아성찰한 후 개미떼에게 달려들었다.
서걱 서걱 서걱!
길을 통째로 막고 있을 만큼 엄청난 숫자의 개미들.
닥치는 대로 베기 시작했다.
숫자가 많은 만큼 더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것들이 계속해서 얼굴로 날아들었지만,
슥.
문제는 없었다.
잭 더 리퍼의 움직임은 개미들의 더듬이에 닿을 정도로 느리지 않았다.
대체 사람을 어떻게 죽였길래 이런 움직임이 가능한 걸까.
새삼스레 감탄하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반짝.
서거걱!
앞에 있는 녀석들을 순식간에 도륙한 후.
옆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텁.
몸을 날리기 무섭게 손에 잡히는 상자.
상자에선 쉼 없이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자 구하러 왔다.”
상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물론 대답을 바라고 한 건 아니었다.
아직 그 정도로 미치진 않았으니까.
사사사삭--!
샛길 밖에선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개미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면도칼은 시간을 다 하고 이미 사라져 버린 상태.
내 손에 있는 건 아까 이대현에게 건네받은 작은 단검뿐이었다.
“구하러 왔으니까.”
손을 뻗어 상자를 열어젖혔다.
이곳에 도달한 결과가 단순히 유리병을 얻는 거라면?
나도 유리병 쪽지에 글을 적어야 했다.
- 유리병을 위해 개미 밥이 된 남자, 여기 잠들다. -
빛을 뿜고 있는 유리병이 눈에 들어왔다.
“부디 나 좀 구해줘라.”
유리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 * *
철썩. 철썩.
뺨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 뺨을 때리는 거지?
좀 먼 곳에서 느껴지는데.
누가 뺨을 때리고 있고 누가 맞고 있는 걸까.
“일어났어?”
눈을 뜨기 무섭게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힘이 담겨있는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목소리를 향해 몸을 일으켰다.
“안녕?”
“안녕하세요.”
사방이 막혀 있는 좁은 방.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침대에서 한 여자가 인사를 건넸다.
허리까지 오는 붉은 곱슬머리에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를 가진 여자.
“저 백운이라고 합니다. 누구시고 여긴 어디죠?”
묻기 전에 먼저 이름을 밝혔다.
“난 보니. 여기는 감옥이야.”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감옥이라니.
아주 작은 창문과 창살을 통과해 들어오는 달빛이 다인 좁은 장소.
“환영해, 여긴 죽어야 나갈 수 있는 감옥, 알트리지야.”
“….”
죽어야 된다고 말하면서 환영한다니.
그나저나 보니라.
누군지 파악이 필요했다.
“혹시 무슨 잘못 하셨어요?”
“나? 그냥 배 타고 다니면서 남에 보물 좀 훔쳤지.”
해적이시고.
해적과 보니.
앤 보니구나.
유명한 여성 해적을 논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앤 보니.
유명세에 비하면 빨리 잡혀서 오랫동안 해적을 하진 못했지만, 짧은 시간 동안의 행보가 워낙 엄청난 이름을 떨친 해적이었다.
스르르.
창가로 스며든 달빛이 보니를 비추었다.
“!!”
몸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는 깊은 상처들.
상처를 입은 뒤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서인지 곯아 터져 진물이 나고 있었다.
“징그럽지? 내가 너무 상대를 안 가리고 털어 버렸나봐. 잡히자마자 그냥은 안 죽일 기세더라고.”
고통이 엄청날 텐데도 해맑게 웃은 보니가 창가를 바라봤다.
“여기도 나름대로의 장점은 있어. 들리지?”
철썩. 철썩.
뺨 쳐올리는 소….
“파도 소리에 이 정도로 집중할 수 있는 장소는 없을 거야.”
파도 소리구나.
알고 보니 참 파도 소리 같은데 정신 상태가 어떻게 된 걸까.
고민도 없이 뺨 때리는 소리라고 인식하다니.
“다시 한번 반가워. 나의 세계와 공명할 수 있는 사람아.”
“…!”
날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물건을 통해 세계로 들어올 수 있는 내 능력을 알고 있었다.
“몸이 썩어 죽는 순간까지도 혼자였는데, 이렇게 옆에 누가 있으니 좋네.”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지만.
현실에서의 자신이 죽었다는 건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넌 어떻게 여기로 온 거야? 매개체가 필요했을 텐데.”
“유리병을 발견했어요. 읽어보진 못했지만 쪽지가 들어있던 유리병.”
“!!”
눈을 크게 뜬 보니의 얼굴로 작은 경련이 일어났다.
“푸하하하!”
잠시 후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보니.
“진짜 유리병이라고? 하하하!”
“네… 네. 바다에서 주웠다고 하던데요.”
“우와, 정확히 어디 바다인지는 몰라도 먼 곳일텐데. 그게 거기까지 갔단 말이야?”
어떤 추억을 떠올린 건지 보니의 얼굴에 아련한 빛이 어렸다.
“쪽지에는 뭐가 쓰여져 있나요?”
내 물음에 보니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직접 봐봐.”
“네….”
밖에 절 먹으려는 개미들이 우글거려서요.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꼭 보겠습니다.
슥.
몸을 구부린 보니가 내 눈을 응시했다.
“자. 그럼 내 세계로 들어온 백운 씨. 들어온 김에 나 좀 도와줄래?”
이제 나가서 개미들을 죽여! 라며 무기를 던져 주는 날먹까진 바라지 않았었다.
심지어 어떤 무기일지도 모르는 상황.
면도칼을 손에 쥐고 시작했던 잭 더 리퍼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도와드릴게요.”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좋았어! 그럴 줄 알았다니깐.”
주먹을 움켜쥔 보니가 방을 막고 있는 정면의 쇠창살을 바라봤다.
“내 힘으론 여기서 나갈 수 없거든. 그런데, 넌 가능할 거야. 날 데리고 나가줘.”
“탈옥 시켜드리면 되는 건가요?”
“풉.”
작게 웃음을 터뜨린 보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었는데 이제 와서 무슨 탈옥. 그건 아니고, 날 끝에 있는 방까지 데려다줘.”
보니가 힘겹게 팔을 들어 왼쪽을 가리켰다.
“내 반쪽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줘.”
반쪽…?
아.
잠시 잊고 있었다.
해적 보니는 홀로 유명해진 게 아니었다.
앤 보니 & 메리 리드.
악명 높았던 해적을 부를 땐 항상 두 명의 이름이 언급됐다.
보니와 그의 연인 리드.
둘은 죽는 순간까지도 함께 했다고 들었는데, 아닌 모양이다.
“저들은 우릴 괴롭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떨어뜨려 놓은 듯했다.
항상 둘이었던 보니와 리드가 각자 쓸쓸히 죽어가도록 말이다.
어쨌든.
어려운 부탁이 아니다.
같은 층의 끝까지만 데려다주면 되는 일.
“가시죠. 리드 님한테 데려다 드릴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보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어떻게 리드의 이름을 알아?”
“두 분 유명하니까요.”
저벅.
“후우!”
뭔가 단단해 보이는 쇠창살이지만.
왠지 모르게 지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쇠창살을 향해 발을 뻗으려는 찰나,
덥썩.
“!!”
보니가 내 손을 붙잡았다.
손을 타고 올라오는 온기가 느껴졌다.
온기라니.
사람끼리 손을 잡았으니 따듯한 게 당연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보니를 허구의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세계가 어떤 원리로 펼쳐질 수 있는지, 죽었던 사람이 어떻게 내 앞에서 말할 수 있는지는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눈앞에 있는 보니는 따듯한 온기를 가진, 진짜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가볼까?”
몸은 죽어가고 있지만 생글생글 웃고 있는 보니.
보니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갑니다요!”
쾅!
* * *
보니의 손을 잡고 열심히 내달렸다.
그리고, 앞을 가로막는 검은 연기 모양을 한 사람 형체들.
서걱.
잭의 면도칼을 휘둘러 형체들을 베어냈다.
모든 세계가 그런진 모르겠지만,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이곳에선 조금 전 사용했던 면도칼을 다시 꺼내 들 수 있으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해제되지 않는단 것이다.
“저기 앞이야!”
복도 끝을 가리키는 보니에 속도를 올렸다.
무슨 달리기의 저주라도 받은 걸까.
돌아온 직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달려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서걱! 서걱!
마지막 놈들을 베어내며 목표했던 방 앞에 도달했다.
도달하기 무섭게 쇠창살로 달라붙는 보니.
“리드!”
“보니!”
얼레?
남자일 거라 생각했던 리드는 여자였다.
그리고 둘의 모습.
보니와 리드는 연인 사이로 알려져 있었는데, 둘은 연인이라고 보기엔 너무… 닮아있었다.
아니, 닮은 걸 넘어 완전 똑같이 생겼다.
“보고 싶었어. 나의 반쪽.”
“나도…!”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흐느끼는 보니와 리드.
보니 혼자서는 쇠창살을 통과할 수 없다.
내 세계도 아닌데 왜 난 통과되고 보니는 안되는 걸까?
작은 의문을 뒤로하고 보니의 등에 손을 가져갔다.
스르르.
그제야 쇠창살을 통과해 리드를 껴안은 보니.
리드의 몸도 보니와 마찬가지로 만신창이였다.
“언니, 괜찮아?”
보니를 부르는 리드의 호칭에 둘이 닮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쌍둥이 자매.
“난 괜찮아. 리드, 힘들었지?”
서로를 누구보다 끔찍이 아꼈지만, 한 번 헤어진 뒤엔 죽는 순간까지 만나지 못했던 자매.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야 자매는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좋구먼.
둘을 보고 있자니 코가 찡해져 버렸다.
조금 있으면 개미한테 씹힐 수도 있는데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슥.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동시에 고개를 돌리는 보니와 리드.
“정말 고마워.”
마치 한 명이 말한 듯 둘의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사아아!
둘의 모습과 함께 공간이 빛의 입자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백운, 네 덕분이야. 우리가 다시 함께할 수 있게 된 건.”
서로의 두 손을 맞잡은 두 사람.
두 사람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의 이름은 앤 보니와 메리 리드. 이번엔 우리가….”
황금색 빛의 입자로 공간이 완전히 사라지고.
둘의 마지막 목소리만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널 구해 줄게.”
* * *
천천히 눈을 떠 앞에 있는 유리병을 챙겼다.
사사사삭--!
밖에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
조금 전 면도칼에 잔뜩 썰려서인지 녀석들은 쉽사리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후우….”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스윽.
와우.
고개를 돌리니 탄성이 나왔다.
지휘자가 있어서인지 내가 올라가야 하는 길을 새까맣게 채우고 있는 개미들.
가장 뒤엔 다른 개미들에 비해 덩치가 큰, 여왕 개미로 보이는 녀석이 시시식 거리며 지휘를 하고 있었다.
몸을 돌려 개미 부대와 마주 섰다.
[앤 보니 & 메리 리드]
사아아아!
머릿속으로 둘의 이름을 떠올리자 양손으로 차가운 쇠의 감촉이 느껴졌다.
리볼버.
옛날에 사용했다고 하기엔 세련된, 자동 권총 같은 생김새의 리볼버였다.
보니의 붉은 색과 리드의 파란 색이 들어가 있는 두 자루의 권총.
권총을 들어 올려 정면의 개미들을 조준했다.
자, 보니와 리드 님.
양손 검지 끝으로 방아쇠의 무게가 느껴졌다.
부디, 절 구하소서.
[빛의 구원]
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