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개미굴의 남자
늦은 시각, 기업 대산의 본사 건물.
똑똑.
“들어와요.”
어디서 찬바람이 불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냉랭한 목소리.
귀가 얼어붙는 목소리에 문을 두들긴 대산의 홍보팀장, 전수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난 죽었다.’
들어가야 하는데,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밖에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무서운데 어떻게 이 문을 열 수 있단 말인가.
‘도망치고 싶다.’
뒤에 있는 비상계단을 바라봤다.
조금만 걸어가면 닿을 수 있는 거리지만, 진짜로 갈 순 없었다.
갔다간 지금까지 인내하며 쌓아온 모든 게 무너진다.
‘김대석 개새끼.’
낮에 홍보팀으로 연락했던 김대석이 원망스러웠다.
대산의 이미지를 높일 건수가 생겼다며 신이 나 전화했던 김대석.
그냥 끊어버렸어야 했다.
‘이 연예인 병 걸린 놈 때문….’
벌컥!
“헙.”
전수희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어났다.
문을 열고 눈앞에 나타난 여자.
길게 늘어뜨린 에메랄드색 머리와 머리색에 걸맞은 눈동자와 눈썹까지.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여자의 이름은 최리아, 대산 홍보실의 실장이다.
“뭐해요? 안 들어오고.”
“네… 넵!”
키까지 우월한 최리아가 바짝 얼어있는 전수희를 내려다봤다.
목소리만큼이나 얼음장 같은 눈빛.
조금만 마주치고 있으면 심장까지 얼어붙을 것 같았다.
탁.
문이 닫히고.
또각. 또각.
자리로 되돌아간 최리아가 의자에 몸을 앉혔다.
“뭐해요? 안 앉고. 수희 님은 하나하나 말해줘야만 하는 건가요?”
“아… 아닙니다!”
깜짝 놀란 전수희가 호다닥 책상 앞 의자로 몸을 날렸다.
그런 전수희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최리아.
“항상 말하지만 수희 님은 너무 수동적이에요. 상사가 문도 열어줘야 하고, 앉으라고 말까지 해줘야 하고.”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전수희의 안에서 작은 희망이 불타올랐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 최리아.
어쩌면 혼나지 않고 넘어갈 수….
“참 수동적인데… 능동적이면 안되는 곳에서만 적극적이란 말이죠.”
착각이었다.
“죄….”
“죄송합니다란 말 그만 해요, 맨날 하니까 진심으로 안 들리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는 전수희.
“수희 님, 취미가 요리라고 했었나요?”
“네… 네!”
“수희 님은 요리 참 잘할 거 같아요.”
“…?”
“어쩜 그렇게 죽을 잘 쒀서 떠 먹여버리지.”
대답하느라 잠시 들었던 고개를 원위치 시켰다.
말투 자체는 나긋나긋 하지만 차가운 목소리를 앞세워 전수희를 압사시키고 있는 최리아.
‘제발.’
전수희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부디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이 또한 지나가기를!
“오늘 낮에 일로 홍보실 예산이 얼마나 날라갔는지 아세요?”
“그….”
“모르겠지. 모르는 거 고민한다고 생각나요? 시간 끌지 말고 모른다고 대답해요.”
“모… 모릅니다.”
한숨을 내쉰 최리아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톡. 톡.
그 소리를 듣는 전수희는 죽을 맛이었다.
방송사와 헬기, 유명한 스트리머를 동원하느라 많은 비용을 소비해버렸다.
시원하게 돈을 쓸 때까지만 해도 대산의 이미지를 높인 공으로 칭찬 받는 꿈을 꿨었는데.
완전 망해버렸다.
- 두두두두두두!!
“허… 참나.”
인터넷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버린 개미굴 영상.
미간을 찌푸린 최리아가 최대 사운드로 영상을 틀었다.
‘죽고 싶다.’
죽 쒀서 개 준다.
오늘 대산이 한 일이었다.
김대석을 포함한 헌터 팀을 통해 기업의 인지도를 올리려 했건만.
[개미굴의 남자]
[정체불명의 헌터]
[개미굴의 영웅]
어느 영상에도 대산의 디귿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흐음.”
영상을 보던 최리아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이미 엎질러진 일은 엎질러진 일이고.
대체 이 인간은 누구란 말인가?
‘어느 수준에 다다른 헌터라면 개미굴은 그리 위험한 곳이 아니야. 그런데….’
기자들을 발견하자마자 냅다 반대쪽으로 튀어버린 남자, 백운.
도망가버린 탓에 영상에는 제대로 찍히지 않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저런 화력을 쏟아내다니?
“쯧.”
댓글창으로 눈을 돌린 최리아가 혀를 찼다.
@ 이펙트 미쳤네요.
@ 탄환 하늘까지 치솟는 거 보여요?
@ 그런데 아까 무슨 대산? 있지 않았나요?
@ 있었나? 잘 모르겠는데.
@ 들러리 아니었나?
달린 댓글들이 최리아의 속을 더 긁어내고 있었다.
이미지를 올리긴커녕 오히려 들러리 취급이라니.
마음 같아선 홍보팀으로 연락한 김대석을 찾아가 성이 풀릴 때까지 뺨을 갈기고 싶었다.
스윽.
고개를 들어 오돌오돌 떨고 있는 전수희를 바라봤다.
꽤 먼 학번 차이지만, 같은 학교 선후배이자 벌써 5년이 넘는 시간을 홍보실에서 함께 일해온 전수희.
“수희야.”
“네… 넵!”
“하아아….”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쉰 최리아가 입을 열었다.
“잘 좀 하자.”
“네….”
끼익.
의자에 몸을 기댄 최리아가 이마를 짚었다.
‘백운이라….’
대산에 제대로 엿을 먹인 남자, 백운.
‘뭐하는 놈이지?’
* * *
- 아앗! 도망가고 있습니다! 어째서죠!
- 쫓아가! 놓치면 안돼!
“푸하하하!”
끼익.
샤워실에서 나온 김희연이 침대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김소연을 바라봤다.
“또 보는 거야?”
“응! 너무 재밌어.”
가까이 다가간 김희연이 모니터로 다가갔다.
“풉.”
웃기긴 웃겼다.
개미굴을 나오자마자 냅다 달리기 시작한 백운과 그런 백운을 기를 쓰며 쫓아가는 기자들.
경찰과 도둑 비슷한 이 추격전은 백운의 승리로 끝났다.
기자들을 모조리 따돌린 뒤 다시 김소연과 김희연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백운.
- 카메라 울렁증이라서요.
머리를 긁적이며 백운이 말한 도망친 이유였다.
“그나저나 백운 님 이렇게 잘 달릴 수 있었구나.”
“그러게….”
카메라에서 점점 멀어지는 백운을 보며 김소연이 말끝을 흐렸다.
달리기가 좀 빠른 정도가 아니었다.
마이크나 카메라를 들고 있다 해도 기를 쓰고 쫓는 다수의 사람들을 가볍게 따돌려버리는 스피드.
이렇게 뛸 수 있는 백운이 목숨이 위험했던 개미굴에선 자신들과 맞춰 뛰어 준 것도 모자라 마지막엔 홀로 남기까지 해버렸다.
“조금 있다 야식 먹을 때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해야겠어.”
김소연의 말에 김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
김희연이 낮에 일을 떠올렸다.
가파른 오르막 때문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순간.
이대로라면 다 잡히겠단 생각에 걸음을 멈추고 뒤돌기 직전이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김소연은 올려보내야 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
- 먼저 올라가세요.
하지만, 먼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린 건 백운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남는 걸 선택한 백운.
‘그때 같이 남아서 싸웠어야 했는데….’
김희연은 지금도 마음에 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김소연을 위해 남겠다는 결정을 내린 후에도, 정작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었다.
‘무서웠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서웠다.
머리로는 결정했지만, 김희연의 몸은 살고자 하는 본능에 따라 계속해서 위를 향해 달리고 말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다행이라 생각해버렸다.
김소연이 살았고, 자신도 무사하다는 사실에 말이다.
- 죄송합니다.
백운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건 김희연뿐만이 아니었다.
대산의 인원들과 기자들을 피해 조용히 서울까지 태워다 준 이대현.
이대현은 세 사람이 지낼 수 있도록 호텔까지 예약해 준 뒤 자리를 떠났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남긴 채로.
“와….”
인터넷 여기저기를 서핑하던 김소연이 입을 벌렸다.
사방이 백운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기사의 제목과 인기 검색어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다.
[개미굴의 남자]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백운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대산에선 백운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공개하지 않았고, 그 덕에 생겨난 호칭이 개미굴의 남자였다.
“아깝다, 백운 님 완전 슈퍼스타 될 수 있었는데.”
카메라 울렁증이라며 튀지만 않았다면 얼굴까지 전국으로 알려질 수 있었는데 아쉬웠다.
띠링.
컴퓨터를 하던 김소연이 옆에 있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각자 씻은 후 야식을 먹자고 했었는데.
삐--- 삐---
백운과의 연락이 두절 되어버렸다.
“아직도 안 받아?”
김소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잠 들었나봐.”
김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하운드에게 쫓기고 오늘은 개미들에게 쫓겼다.
거기다 마지막에 그런 엄청난 전투까지.
안 피곤하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흠.”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김희연이 턱을 문질렀다.
“소연아.”
“응?”
“백운 님 어제 하운드들한테 쫓겼다고 했잖아.”
“응, 그랬지.”
턱을 문지르던 김희연이 김소연과 눈을 마주쳤다.
“거짓말이겠지?”
“당연하지.”
김소연이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강한데 쫓아갔으면 쫓아갔지, 쫓기다니. 말이 안 되지!”
꼬로록.
배에서 나는 소리에 김소연이 다시 한번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진짜 잠든 건가? 백운 님 뭐하고 있는 거야.”
* * *
“후우우우!”
커다란 욕조에 몸을 담궜다.
미쳤다.
완전 미쳐버렸다.
미쳤다는 단어 말고는 이 느낌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제일 먼저 닿은 발끝을 타고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물의 기분 좋은 뜨끈함.
치익!
냉장고에서 갓 꺼내온 캔맥주를 뜯었다.
귀를 간지럽히다 못해 착한 폭행을 해버리는 시원한 사운드.
벌컥! 벌컥! 벌컥!
탁!
목이 찢어질 것 같은 캔맥주를 원샷한 후.
“키아아아아아아아!!!”
단전에서부터 올라온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먹어보는 맥주란 말인가.
십수 년간 체증이 확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극락이다.”
천국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여기가 천국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하아… 행복이라.”
정말이지 오랜만에 말해보는 단어였다.
말하는 걸 넘어 완전히 잊고 살았던 단어, 행복.
지금은 그 행복이란 단어가 뜨신 물의 힘으로 온몸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 기다리세요! 도망가지 마세요! 기다리라고! 이름이라도 말해주고 가!!
피식.
뒤에서 쫓아오던 기자, 송유빈을 떠올렸다.
단정한 모습과는 달리 악을 쓰며 끝까지 쫓아왔던 송유빈.
송유빈의 이름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CBC의 미녀 리포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너무 열심히 쫓아오던 송유빈에 멈춰줄까도 싶었지만, 안될 말이었다.
안되지, 안돼.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명확했다.
어느 정도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후, 무기를 모으는 것.
분명 국가의 유물도 섞여 있을 것이기에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게 될 수도 있었다.
얼굴이 팔리는 건 좋지 않지, 암! 그렇고말고.
옳은 선택이었다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 후,
“흠.”
개미굴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겁대가리를 상실했던 걸까.
거기서 뛰는 걸 멈추고 뒤를 돌다니.
“풉.”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 순간을 자아성찰 하거나 반성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나 자신을 너무 칭찬하고 싶었다.
왜냐고?
매우 옳은 선택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다란 이유로 보니와 리드를 포기해버렸다면, 아직까지 후회하고 있었을 터였다.
싱긋.
얼굴로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잘했다.”
턱 아래까지 욕조로 밀어 넣으며 따듯한 온기를 즐겼다.
“나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