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토벌전
“무기왕 님.”
난 당신이 무기왕인 걸 알고 있다!
라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을 건네는 전수희.
전수희의 기대에 부응해줘야겠다.
“!?”
“놀라실 필요 없어요. 저도 굳이 백운 님이 무기왕이란 걸 떠벌릴 생각은 없으니까요.”
당연히 없으시겠지.
대산이 날 찾고 있었던 걸 보면 다른 기업에서도 무기왕을 찾고 있을 터.
내가 무기왕이란 걸 알고 있는 대산이 굳이 우위에 있는 정보를 풀 리가 없었다.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 제 사무실로 가시죠.”
“알… 알겠습니다.”
커피를 든 전수희가 이대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대현 님, 협조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도와드리기도 전에 만나버리셨으니… 제가 한 게 없네요.”
이대현과 전수희가 만난 이유는 나인 듯 했다.
전수희가 혼자 힘으로는 찾을 수 없으니 안면이 있는 이대현을 불러낸 것.
전국현 그 인간은 없네.
회사 내에서도 실속 없는 인간이란 게 알려져 있는 모양이었다.
나 같아도 똘똘한 대현 님만 부른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현 님, 나중에 또 봬요.”
“네 백운 님. 또 뵐게요.”
이대현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전수희를 따라나섰다.
나를 찾아서인지 발걸음이 유독 통통 튀는 전수희.
아 신난다.
신이 난 건 전수희 뿐만이 아니었다.
대산 본사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던 조금 전.
어떻게 해야 대산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중이었다.
무기왕 이름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했지만 유일하게 확률이 있는 방법이었다.
무명이었던 헌터도 동영상이 터지는 순간 기업의 스카웃 대상이 되기에 허무맹랑한 생각은 아닌 셈.
아 제의 왔으면 좋겠다.
대산을 바라보며 알아서 제의가 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타난 전수희.
뜻밖의 행운.
평생 바란 적 없던 행운이 제 발로 걸어 와줬다.
그저 회사 쳐다보면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있었을 뿐인데.
자… 얼른 제의해주세요! 준비가 되었습니다!
대산으로의 침투를 시작한다.
* * *
태어나 처음 들어와 보는 대기업 본사 건물.
사람들이 왜 대기업 대기업 하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전에 방문했던 헌터 지사나 등록소도 일하기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곳에 와보니 눈이 확 높아지는 느낌이다.
몇 층까지 있는 거여.
철저한 보안을 거친 뒤 탑승한 엘리베이터.
오른쪽에 나열된 숫자를 보고 입이 벌어졌다.
80층이라니.
오래전부터 있던 63빌딩조차 안 가봤었는데, 그것보다 더 높은 건물에 와볼 줄은.
보안을 위해 엘리베이터에 카드를 찍는 전수희.
전수희가 70층 버튼을 눌렀다.
“높은 곳에서 일하시네요.”
자신을 대산의 홍보실 팀장이라고 소개한 전수희.
대기업 팀장 정도 되면 이런 큰 건물의 70층에서 일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아, 제 사무실로 가는 거 아니에요.”
“…?”
슥.
전수희가 손을 들어 45층을 가리켰다.
“제 사무실은 여기고요. 70층은 저희 실장님이 근무하시는 곳이에요.”
“실장님요?”
“네, 백운 님을 찾으신 게 저희 실장님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열심히 찾았던 거고요.”
이건 예상외였다.
전수희만 하더라도 홍보실 팀장이라니 처음부터 제의가 제대로 오는구나 싶었는데.
홍보 실장이라니.
두근두근하구만.
두근두근하면서도 한 편으론 살짝 걱정이 됐다.
내가 원하는 건 수리검의 정보를 찾을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접근인데 날 찾은 게 실장이라니.
적당한 접근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음… 아니지, 애초에 적당한 접근으론 부족했을지도.
비전 수리검에 대한 정보.
인터넷에서도 철저히 관리하고 있는 걸 보면 대산 내에서도 쉽게 접근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만약 그렇다면 적당한 접근이 아닌 더 깊이 관여하고 침투해야 흔적에 도달할 수도 있는 일.
띵동.
“다 왔네요, 내리시죠.”
어느새 도착한 엘리베이터.
좋은 건물의 엘리베이터는 올라가는 속도도 엄청난 것 같았다.
오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무섭게 등장하는 거대한 문.
단순한 사무실이 아니었다.
층 하나를 통째로 쓰고 있는 듯한 구조.
“홍보실에서 일하는 분들이 많은가 보네요. 층 하나를 통째로 쓰다니.”
“…?”
앞서가던 전수희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는 실장님 한 분만 계세요.”
와우.
머릿속에 있는 대기업 실장에 대한 이미지를 좀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실의 책임을 지고 있어 한순간도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강제 워커 홀릭.
동시에 남들 다 밥 먹는 순간에도 혼자 난 괜찮다며 손을 흔드는 그런 부서의 가장 역할을 생각했었는데.
아니구만.
이런 거대한 건물의 한 층이 개인 사무실이라니.
실장이라… 나도 하고 싶다.
나도 모르게 권력에 대한 욕심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후우!”
문 앞에선 전수희가 심호흡을 한 차례 한 뒤 옷을 단정히 여미고 있었다.
조금도 까일 구석을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행동이다.
사람 좋게 생긴 아저씨였던 거 같은데 은근히 깐깐하나?
대기업 대산의 홍보 실장.
유물관에서도 종종 봤던 기억이 났다.
대기업에서 사회 환원 차원으로 종종 하는 유물 증정 행사.
그런 행사에는 항상 홍보 실장이란 사람이 동행했었다.
그냥 똑같은 아저씨구나.
가지고 있는 돈이나 명예는 천지 차이였지만, 행사에 나온 실장을 보며 떠올린 생각이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반명….
똑똑.
“들어와요.”
!?
걸쭉한 아저씨 목소리가 들릴 거라 생각했었는데.
문 너머에서 들려온 건 낮게 깔린 여자 목소리였다.
개방한 능력이 목소리를 차갑게 만드는 건가 싶을 정도로 냉기가 느껴지는 음성.
전수희가 저렇게 바짝 쪼는 이유가 있었구만.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순 없지만, 왠지 모르게 엄청 깐깐하고 사람을 쥐 잡듯이 잡을 듯 했다.
긴장해야겠어.
끼익.
문을 열기 무섭게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전수희.
“실장님, 아침에 말씀하신….”
“백운 님이군요.”
단번에 내 이름을 맞추는 홍보실 실장.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물관에서 봤던 오십 대 아저씨를 떠올렸는데.
“처음 뵙겠습니다. 전 대산의 홍보실 실장, 최리아입니다.”
자신을 실장이라 소개하는 최리아는 내 머릿속의 사람이 아니었다.
차가운 목소리에는 잘 매칭되지 않는 따듯한 에메랄드 색의 머리와 눈동자.
그리고 많이 쳐도 삼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나이까지.
그 사이에 실장이 바뀌었었나 보네.
다녀본 적은 없지만 대기업 일수록 인사 이동이 잦다고 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전수희 팀장.”
“네… 넵!”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으니 별로 혼날 일이 없을 텐데도 전수희는 땀을 뻘뻘 흘려대고 있었다.
많이 시달렸구먼.
“잘했어요, 내려가서 일 봐요.”
“네!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90도로 인사를 하고 몸을 돌리는 전수희.
올 때도 신이 나 있었지만 최리아의 칭찬을 들은 전수희는 거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이었다.
“그럼 수고하세요, 백운 님.”
탁.
살짝 고개를 숙인 전수희가 문을 닫으며 퇴장했다.
….
이 넓은 층 안에 존재하는 건 실장 최리아와 나 둘 뿐.
“이쪽으로 앉으세요.”
최리아가 바로 앞에 있는 의자로 날 안내했다.
“차는 어떤 걸로 드실래요?”
“저는 괜찮습니다. 조금 전 커피 마시고 왔거든요.”
최리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를 통해 처음 느꼈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최리아가 옆에 있는 모니터를 내 쪽으로 회전시켰다.
모니터 안에서 재생되고 있는 건 역시나 무기왕으로 올린 구룡산의 동영상.
“백운 님이 무기왕이냐는 질문은 넘어가도 되겠죠?”
“하하… 네.”
서랍을 연 최리아가 A4 용지 크기의 종이를 내밀었다.
빼곡히 무언가 써져 있는 것이 무언가의 지원서 혹은 계약서인 것 같았다.
“저는 백운 님이 저희 대산의 토벌전에 참가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찾은 거고요.”
일단 나이스고… 토벌전이라.
토벌전.
다른 세상 이야기라 크게 관심은 두지 않았었지만, 매년 특정 시즌이 되면 많은 동영상들이 올라왔기에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특정 기업이 상금을 걸고 이름 있는 헌터들을 모아 경쟁시키는 것이 토벌전의 주요 내용.
얼핏 보면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한 로마 시대 콜로세움과도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데몬 토벌.
경쟁이라고 해서 헌터끼리 싸우는 게 아니었다.
어느 정도의 방해가 있을 순 있지만 기본적으로 토벌전에서 점수를 획득하는 방식은 데몬 처치였기 때문이다.
“강원도 사북의 탄광로. 그곳에 엄청난 수의 데몬이 있습니다.”
토벌전을 위해 필수적인 준비물이 있다면 많은 수의 데몬이었다.
사람들이 토벌전에 열광하기 위해선 참가한 헌터들의 멋진 활약이 필요했고, 활약을 하기 위해선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통상 토벌전이 열리는 장소는 비정상적으로 데몬이 많아 던전이 형성된 곳이었다.
“이번에 대산에서는 그 탄광촌 던전을 중심으로 토벌전을 열 생각이고, 게스트로 유명한 외부 헌터 몇 분을 더 모시려는 중이거든요.”
유명이라니.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인 건 알았지만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단어였다.
토벌전 게스트라.
어찌 됐든 2년 뒤에 비전 수리검을 찾는 건 대산이었다.
무슨 방법을 쓰든 대산과의 커넥션을 만든 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여기서 활약해서 이름값이 높아지면 날 잡아두려고 하겠지.
그렇게 되면 충분히 무언가를 더 알아낼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당장 가장 빠른 게 2년 뒤의 비전 수리검이지, 그 이후로도 대산은 많은 유물들을 발견해나갔다.
그걸 고려해봤을 때 대산과 좋은 커넥션을 유지하는 건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닐 터.
“좋습니다. 그런데 제가 10급이긴 하지만 국가에 소속된 상태….”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슥.
최리아가 또 다른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이번엔 동의서였다.
언제 받아 놓은지는 모르겠지만, 목적이 데몬 처치라는 사회 공여라면 10급 헌터 백운이 타조직에 ‘임시’ 파견을 허락한다는 헌터 중앙처의 내용.
임시라는 단어에 강하게 마크되어 있긴 하지만… 역시 대기업이구만.
그리고 최리아의 자신감 역시 엿 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직 날 찾지도 못한 상황에서 미리 이런 것까지 다 받아놓다니.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국엔 날 찾을 것이고, 동시에 내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는 상황을 확신하고 있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최리아가 여유로운 눈으로 입을 열었다.
“토벌전에는 백운이 아닌 무기왕의 이름으로 참가해주셨으면 합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대산이, 최리아가 원하는 건 토벌전의 흥행.
그 흥행을 위해 게스트를 데리고 왔으니 뜬금없는 백운이란 이름보단 현재 뜨거운 감자인 무기왕이란 이름을 쓰는 게 옳았다.
이건 내가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해보시죠.”
“무기왕이 저라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 어차피 필요하신 건 무기왕일 테니 어려운 부탁이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싱긋.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려 보이는 최리아.
스윽.
자리에서 일어난 최리아가 오른손을 뻗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백운… 아니죠, 무기왕님.”
꽈악.
“잘 부탁드립니다.”
대산으로의 침투.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