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인사
백운이 최리아의 방을 떠난 직후.
똑똑.
“김대석입니다.”
“들어오세요.”
대산의 용병대 1팀 팀장, 김대석.
김대석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김대석 팀장님.”
그런 김대석을 최리아가 해맑은 미소로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실장님.”
“잠시 앉아 계시죠, 차 한 잔 드릴 테니.”
“영광이군요, 알겠습니다.”
형식적인 인사가 오간 후 최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층을 개인 사무실로 받으며 다른 실장들보다도 월등히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지만, 최리아는 굳이 비서를 두지 않고 있었다.
개인 공간에 대한 사랑.
비서가 됐든 누가 됐든 최리아는 혼자 있는 공간을 필요로 했고, 그렇기에 손님이 왔을 때 차를 내오는 역할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다.
탁.
각종 과자와 차들이 놓여 있는 다과실.
최리아가 수많은 차 종류 중에서도 가장 맛없고 품질이 떨어지는 찻잎을 집어 들었다.
‘침 뱉고 싶네.’
김대석을 위해 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몹시 불쾌했다.
실장이 더 낮은 직급인 팀장을 위해 차를 준비해야 돼서?
그런 유치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싫었다.
우선은 대산의 용병단.
아닌 사람도 있었지만 용병단의 대부분이 싸움과 명예, 돈에 미친 짐승들이었다.
특히 1팀의 팀장을 맡고 있는 저 인간, 김대석.
가장 상종하기 싫은 류의 인간이었다.
‘후우.’
지난번 김대석으로 인해 물 먹었던 개미굴만 해도 아직 화가 덜 가라앉은 상태.
‘도움이 안 되는 인간.’
그때의 일 한 번만이 아니었다.
기업의 이미지와 명예를 높이기 위해 발 벗고 뛰는 부서.
그것이 홍보실이었다.
‘쌓으면 깎아 먹고, 쌓으면 깎아 먹고. 치우면 싸고, 치우면 싸고.’
최리아가 용병단과 김대석을 혐오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자기들이 사고를 치더라도 홍보실에서 처리해줄 걸 알기에 조심하긴커녕 더 마음 놓고 활개 치고 다니는 인간들.
그 속마음과 마음가짐이 훤히 보였기에 싫어하는 것이었다.
저벅.
“이탈리아에서 직접 가져온 차입니다. 드셔보세요.”
“잘 마시겠습니다.”
후룹.
차를 한 모금 마신 김대석이 깜짝 놀랐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향이 정말 좋네요. 이렇게 비싼 걸 내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최리아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참 웃음이 터질 뻔한 위기를 넘긴 뒤, 최리아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거 먼저 보시죠.”
“이건…?”
최리아가 건넨 종이를 확인하는 김대석.
김대석의 눈이 커져 갔다.
“무기왕…!”
“잘 알고 계시겠죠. 개미굴에서 제대로 물 드셨으니까요.”
빠득.
아픈 곳을 서슴없이 찌르는 최리아에 김대석이 인상을 찡그렸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그 날 백운이란 놈한테 빼앗긴 스포트라이트를 생각하면 지금도 잠을 설칠 지경인데.
“그 무기왕의 지원서가 여기에 있다는 건….”
“제가 찾아서 불러왔습니다. 무기왕의 구룡산 동영상… 터진 거 알고 계시죠?”
“예, 봤습니다.”
“터진 지 얼마 안 돼서 무기왕에게 쏠려 있는 관심이 엄청납니다.”
최리아가 백운을 불러온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백운 정도 되는 인기의 헌터는 지천에 깔려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백운을 데려온 이유.
“용병단과 김대석 팀장님을 위해서 준비한 거니… 잘 드셔야 합니다.”
전화위복.
회사 이미지를 위해 많은 예산을 쏟아부었던 개미굴.
개미굴에서는 그야말로 물을 오지게 먹어버렸다.
공들인 음식을 그대로 백운의 입에 떠먹여 준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떠먹여 살을 찌운 백운을 다시 잡아먹을 수만 있다면?
기업의 이미지 회복에 더 효과적인 영양소가 될 수도 있었다.
꿀꺽.
최리아의 말을 이해한 김대석.
김대석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기회다.’
기회였다.
개미굴에서의 복수이자 가로채기 당했던 것들을 모조리 되찾아올 수 있는 기회.
최리아의 말대로 이번에 백운을 밟을 수만 있다면 조회수가 터지고 있는 구룡산 동영상은 배 아파할 대상아 아닌, 잡아먹기 전의 영양도 높은 먹이 정도로 생각할 수 있었다.
‘쯧.’
이미 흔들리고 있는 눈동자에서부터 김대석이 얼마나 흥분한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단순하고 뻔한 인간.’
아마 저 인간은 구룡산 동영상을 보면서도 배만 아파했을 것이다.
그 동영상이 기회인줄도 모르고 말이다.
‘이번에도 내가 치워 주는구나.’
준비를 했으면서도 용병단과 김대석이 명성을 얻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들이 명성을 얻어야 그 뒤에 있는 대산의 이미지도 더 올라갈 텐데.
“하실 수 있겠죠?”
꽈악.
백운의 지원서를 움켜 쥔 김대석이 여유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죠. 아주 개박살 내버리겠습니다. 운만 타고 난 초짜 헌터놈, 이 세계가 만만치 않다는 걸 이번 기회에 교육해주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최리아 실장님.”
자신감 넘치는 김대석의 말에 최리아의 얼굴로 미소가 그려졌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면서도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김대석.
‘고맙다면서도 끝까지 눈은 안 마주치네.’
“그나저나 팀장님이랑 눈 마주치고 대화 나눈지도 오래된 거 같은데요. 이제 절 믿어 주실 때도 되지 않았나요?”
“하하하하!”
최리아의 말에 김대석이 다시 한번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일이 잘 끝나면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의미심장한 말투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김대석.
“전과가 있으시지 않습니까, 이해 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하하, 전과라… 한 번 해본 말입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겁쟁이 새끼.’
‘여우 같은 년.’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웃음이 오가고 있었다.
* * *
터벅. 터벅.
끝이 없는 계단을 열심히 내려갔다.
언제 다 내려가냐.
최리아의 방을 나온 뒤 엘리베이터의 진입까진 순조로웠다.
문제는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려면 대산의 카드키가 필요한데, 나한텐 없다는 것.
허술하구만, 대산.
끝이 안 보이는 계단을 내려가자니 저절로 혀가 차졌다.
물론 카드 좀 찍어 달라고 최리아의 방으로 다시 들어가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하하 호호하며 굽신굽신 간신히 방을 빠져나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드는 최리아를 또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쉽지 않아, 분명 더 있을 거야.
사실 토벌전의 흥행 말고도 뒤에 다른 생각들이 있을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최리아에게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과 불쾌함이 느껴졌었다.
뭔가 있는데,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최리아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받았던 묘한 느낌.
알 수 없는 힘이 계속해서 내게 접근하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냥 실장이 된 건 아닐 거야.
대산이란 대기업에서 저 자리까지 오르려면 분명 특출난 무언가가 있을 터였다.
그게 일 처리 능력이나 뛰어난 두뇌 등이 될 수도 있겠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특출난 능력을 개방한 케이스일 가능성도 컸다.
조심해야지.
그런 기분을 몇 번 느낀 후부터는 의도적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으니 별일 있겠냐만은.
다음에 또 만나게 되더라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 미친 계단은 언제 끝나는 거지.
- 전수희 팀장이 앞으로 일정을 안내해드릴 거예요.
25층만 내려가면 되니 천천히 생각이나 하면서 가자 했는데.
생각보다 25층이란 높이는 더럽게 높은 듯 했다.
탁.
…?
내려가다 보니 나와 같은 신세, 아니지.
올라오고 있으니까 나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 한 명 더 보였다.
금발이라니 외국인인가.
인위적으로 염색한 것 같지도 않은 색깔.
지금은 윗통수만 보여서 외국인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저벅.
난 내려가고 저 사람은 올라오는 상황.
“…!”
잠시 후 마주치게 되었다.
역시 외국인이었구만.
160이 안되어 보이는 키와 푸르렀던 구룡산의 옹달샘을 떠올리게 만드는 물색 눈동자.
이국적이어도 너무 이국적이게 생긴 소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날 빤히 쳐다보는 걸까?
“안… 안녕하세요.”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싱긋.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건지 조용히 웃어 보이는 소녀.
보기 드문 분위기를 풍기는 소녀였다.
만국 공통 인사라도 건네자.
어색하게 손을 들어 흔들자,
스륵.
소녀가 천천히 격식 가득한 인사를 건네왔다.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몹시 부담스러울 정도의 인사.
“하… 하하… 떙큐, 바이.”
더 이상 의사소통은 불가능할 것 같아서 엄지를 치켜세운 뒤 속도를 올렸다.
후다닥.
또 말 걸기 전에 45층까지 전력질주다.
* * *
후다닥!
백운이 빠르게 계단을 내려간 후.
여전히 계단에 멈춰 서 있는 소녀.
“황금빛이 쏟아져 나오길래 와봤는데….”
싱긋.
소녀가 백운이 내려간 방향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다르네요.”
비상구로 들어온 목적을 달성한 소녀.
소녀가 옆문을 통해 비상구를 빠져나갔다.
* * *
“진짜 죄송해요!”
드디어 만난 전수희가 두 손을 모았다.
“제가 너무 신이 나서 그만….”
날 챙겨 갔어야 했는데 까먹고 호다닥 내려가 버린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운동도 하고 좋았어요.”
계속해서 사과를 하는 전수희에 괜찮다며 손을 내저어 보였다.
“이… 이쪽으로 오세요.”
안내하는 전수희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작은 소음 하나조차 없던 70층과 달리 흡사 전쟁터를 떠올리게 만드는 45층.
홍보팀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바쁘게 전화를 받으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아 안된다니까요! 약속 하셨잖아요! 보도 안 하기로!”
“이번에 또 약속 어기시면 다음부터 대산 광고는 못 받을 줄 아세요!”
오우야.
이것이 범죄 스릴러 영화에서나 보던 언론 탄압인가.
역시 대기업은 무서워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실장님께 연락받기로는 지내실 곳이 필요하다고 들었어요.”
슥.
전수희가 황금색 카드를 건네왔다.
“바로 앞에 있는 대산 호텔 카드에요. 스위트룸이고요.”
“스… 스위트룸요…?”
“원래 게스트 분들은 보통 디럭스에서 묵으시는데… 실장님이 스위트로 드리라고 해서요.”
홍보 실장님 최고!
“어쨌든 이 카드를 카운터에 보여 주시면 안내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토벌전 장소로 출발은 언제인가요?”
“내일이고 대산의 차량으로 같이 이동할 거예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게스트 분들도 계셔서요. 그리고….”
전수희가 들고 있던 두꺼운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토벌전에 대한 가이드에요. 매년 열리긴 하지만 장소나 시기에 따라 룰이 조금씩 달라지니 숙지 부탁드릴게요.”
단순히 헌터들이 경쟁을 해 데몬을 잡는 행사… 가 내가 토벌전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기에 전수희의 말대로 한 번 읽어봐야 할 것 같았다.
“자, 그럼 제가 전달 드릴 건 여기까지고요. 내일부턴 담당자들이 안내를 도와드릴 거예요.”
“아, 네. 알겠습니다.”
용무가 끝난 건지 전수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45층엔 안내 인원이 있으니 엘리베이터 타시면 돼요. 수고하셨습니다.”
최리아와 달리 무언가를 숨기거나 하는 거 없이 솔직해 보이는 전수희.
전수희에 맞춰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토벌전 출발까지 D-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