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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31화 (31/473)

31화. 명령

다음 날 아침.

뽀득뽀득.

스위트룸에서 자서일까.

한층 매끈매끈해진 얼굴에 놀라며 호텔을 나섰다.

다시 한번 느껴버렸다.

좋은 걸 먹고, 좋은 곳에서 자는 것의 중요함을.

우글우글.

저건 뭐하는 사람들… 허.

호텔을 나오기 무섭게 보이는 엄청난 인파.

뭐하는 사람들인가 했더니 대산으로 벌때처럼 모인 기자들과 구경꾼들이었다.

그 사이를 뚫고 천천히 대산의 수송차로 탑승하고 있는 헌터들.

복장이 다 동일한 걸로 보아 대산 소속의 헌터들인 것 같았다.

“김대석 팀장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어떤 각오로 이번 토벌전에 임하시는 건가요?”

대산의 이름 있는 헌터 중 한 명인 김대석.

오늘도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긴 김대석이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시작했다.

“일단 대산을 응원해주시는 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방송 체질인 갑네.

개미굴에서 김대석과 대산의 헌터들이 기자들을 기다리느라 진입하지 않았다고 김소연과 김희연에게 들었었다.

이야기를 들었을 당시에는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는 척을 했지만.

괘씸한 놈들.

속으론 무척이나 괘씸해 했었다.

리볼버를 얻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개미 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지들 인기몰이 좀 해보겠다고 한참을 안 들어오다니.

“누구보다 빨리, 최적의 효율로 데몬을 처치하겠습니다. 토벌전 같은 경우에 상금이나 순위 같은 게 있긴 하지만, 저희 대산에겐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산에게 중요한 건 딱 하나, 시민들을 위협하는 데몬을 처치하는 것입니다.”

저 저 저 뱀 같은 혓바닥 보소.

그런 새끼가 시민 죽어 가는데 기자 기다리느라고 안 들어와?

안 봐도 비디오였다.

말은 저렇게 뻔뻔스럽게 하지만 물불 안 가리고 일등을 노리겠지.

“김대석 팀장님! 이번 토벌전에는 지금 핫한 무기왕도 참가한다고 들었는데요, 어디에 있나요?”

“개미굴에서는 무기왕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뺏겼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와우.

“….”

표정 관리는 잘하네.

애써 웃고 있지만 순간 말을 잃은 김대석.

누가 저렇게 멋진 질문을 했나 봤더니, 역시나.

“CBC 방송 송유빈입니다! 대답 좀 해주시죠!”

보면 볼수록 시원시원한 기자님이다.

기자님 파이팅.

잠시 입맛을 다신 김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만나본 적은 없지만, 지금 무기왕님은 무척 부담스러운 상태일 겁니다. 단 한 번의 활약에 기연이 겹치면서 그렇게 뉴스를 타버렸으니까요. 그래서 개미굴에서도 도망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 새끼 봐라.

“하지만 무기왕은 구룡산에서도 크럭커를 처치 했는데요! 그것도 우연인가요?”

“음… 크럭커는 화력만 갖춰진다면 웬만한 헌터들도 다 잡을 수 있는 데몬입니다.”

“무기왕의 활약이 과대평가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김대석이 껄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무기왕님은 10급 헌터입니다. 10급 헌터가 그런 활약을 한다는 건 엄청난 거죠. 전 오히려 칭찬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번 토벌전에선 너무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잡아 오던 것들과는 다를 테니까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후 차로 탑승하는 김대석.

마지막 말의 의도는 뻔했다.

무기왕이 아무리 날고 기더라도 결국 10급 헌터이며, 대단하다는 범주는 10급 헌터의 기준 내에서라는 것.

거기다 칭찬해주고 싶다는 건방진 소리까지.

완전히 깔보였구만.

이번 토벌전 참가 목적은 두 가지.

대산과의 커넥션을 만드는 것과 가능하다면 비전 수리검의 정보를 얻는 것.

하지만, 조금 전.

세 번째 목적이 생겼다.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김대석의 콧대를 박살내는 것.

기다려라, 대석아.

깐족거림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기회만 된다면 확실히 갚아주리라 다짐을 마친 후.

여전히 바글거리는 기자들을 쳐다봤다.

“무기왕은 어디에 있는 거지!”

“다른 게스트 버스 아니야? 저 뒤에 찾아봐!”

어떻게 가지?

가긴 가야 하는데 지금 저곳으로 갔다간 카메라의 집중 표적이 되고 만다.

어디 샛길이….

끼이이익!

“우왁!”

두리번거리던 내 앞으로 나타난 파란색 스포츠카 한 대.

“저기로 가는 건 좀 무리죠? 타세요.”

운전석엔 어제 봤던 최리아가 타 있었다.

묘한 기분 때문에 최대한 안 마주쳐야지 했었는데.

시간상으론 하루도 안 돼서 다시 마주치고 말았다.

철컥.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누가 볼 새라 호다닥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사북까지 같이 가시죠. 저도 볼일이 있으니까요.”

부웅!

최리아의 스포츠카가 시원한 배기음과 함께 앞으로 뻗어 나갔다.

* * *

사북으로 향하는 길.

기자들 사이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단 타긴 했는데.

더럽게 불편하다.

좋은 차라 그런지 몸이 불편한 건 아니었다.

그저 출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이 침묵이 몹시 불편했다.

기차 타고 간다 그럴걸.

이럴 줄 알았으면 고생스럽더라도 혼자 가는 게 나았을 뻔했다.

“백운 님, 거기 조수석 박스 열어보세요.”

…?

뜬금없이 조수석을 열어보라는 최리아.

딸칵.

가면?

박스 안에는 오페라의 유령이나 쓸 법한 흰색 가면이 놓여져 있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백운 님이 무기왕이란 걸 들키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 그렇죠.”

들키면 절대 안 된다까지는 아니지만.

굳이 사방팔방으로 얼굴과 이름을 알리고 싶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가져가세요. 진행되는 동안에는 전국에 생중계가 될 거라 필요할 거예요.”

“오… 감사합니다.”

이런 세심한 배려라니.

슥.

슬쩍 고개를 돌려 운전 중인 최리아를 바라봤다.

어딜 가든 눈에 띌 외모를 가진 최리아.

이렇게 보면 배려심 깊고 착한 사람인 것 같은데, 말을 시작하면 항상 뒤에 숨겨진 가시가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묘한 감각도 그렇고.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느껴지는 묘한 찝찝함.

뭐라고 설명할 순 없지만 눈을 마주치는 게 꺼려지는 느낌이었다.

“어제 전수희 팀장이 토벌전 가이드 드렸죠?”

“네, 어제 받아서 읽어봤습니다. 생각보다 룰이 어렵진 않더라고요.”

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할 것도 없죠. 쉽게 생각하면 데몬이 모여있는 던전을 정리한다… 가 토벌전이니까요.”

가이드에 적힌 점수 룰은 간단했다.

하나의 던전이지만 각각 다른 입구에서 시작하게 되는 토벌전.

시작한 이후에는 일정 시간 동안 데몬을 잡을 때마다 점수가 카운트된다.

잡은 데몬 급수마다 얻는 점수가 달라지며 누군가와 함께 잡았을 경우엔 점수를 나눠 가지는 시스템.

오히려 잘됐어.

만나는 족족 잡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룰이 복잡해서 누군가와 협동을 해야 한다거나 하면 훨씬 귀찮았을 것이다.

사북에 내가 아는 사람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토벌전에서는 철저히 혼자인 상황.

“이제 사북이네요.”

최리아의 말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울에선 보기 힘든 푸른 숲과 논밭.

그리고 곳곳에 놓여 있는 옛 탄광의 흔적들까지.

“대산이 토벌전을 이런 비수도권 지역에서 하는 이유를 아시나요? 접근성도 떨어지고 편의 시설도 없는데 말이죠.”

“음… 국가로부터 소외된 지역을 챙기는 기업, 대산! 이런 느낌을 위해서 아닌가요?”

“풉.”

너무 직구로 말해서일까.

최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완전 차가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도 웃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해요. 한 가지가 빠지긴 했지만요.”

“한 가지…?”

잠시 뜸을 들인 최리아가 입을 열었다.

“기업의 힘을 보여주기 위함이죠. 백운 님은 가장 경쟁이 치열한 분야가 어디라고 생각하시나요?”

“인재 확보… 아닌가요? 강한 헌터를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가려고 한다고 들었거든요.”

“맞아요. 옛날엔 그저 기업의 영업이익이 얼마고, 그에 따른 시가총액이 얼마고를 따지며 순위를 매겼지만. 이젠 세상이 변했어요.”

삑.

최리아가 버튼을 누르자 전방 창으로 기사 하나가 나타났다.

# 암살에 특화된 헌터를 고용해 적대 기업 일가를 몰살시킨 기업 A.

“그런 시대인 거죠.”

극단적인 케이스겠지만 최리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았다.

돈이 많을수록 좋은 헌터를 고용할 확률은 높아지긴 하지만, 만약 돈만 많고 기업을 지킬 수 있는 헌터가 없다면?

기사에 나온 일이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삑.

다시 한번 버튼이 눌리고,

# 어려운 이웃을 돕던 헌터, 싸이코패스 살인마로 돌변.

얼마 전 일어났던 살인사건이 창에 나타났다.

헌터에 의해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

데몬에 의해 죽는 사람의 수와 헌터 사건에 휘말며 죽는 사람의 수에 그리 큰 차이가 없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었다.

“강력한 능력을 가진 헌터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면 기업들은 모두 긴장해요. 언제 비수가 되어 자신들한테 돌아올지 모르니까요. 그래서예요. 비수가 되기 전에 자신의 칼로 만들기 위해 영입하려는 거죠. 그만큼 지금 기업에 있어서 헌터는 가장 중요한 인력이에요.”

굳이 돈을 퍼부어 가며 토벌전을 개최하는 이유가 있었구만.

대산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방송을 통해 전국에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대산엔 이런 헌터가 있다.

그렇기에 이렇게 강하다.

기어오를 거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봐라.

어쩐지… 게스트라고 온 사람들도 다 애매하더라.

처음엔 너무 유명하거나 강한 헌터들은 섭외에 실패한 건가 싶었는데.

아닌 모양이다.

토벌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가장 빛나야 하는 헌터.

그건 어디까지나 대산의 헌터여야만 했다.

괜히 쎈 헌터를 불렀다간 큰돈들인 게 도루묵을 넘어 역효과를 일으킬 테니.

….

그래서 날 부른 거였어.

긴가민가했었는데 이제야 확신이 들었다.

개미굴부터 구룡산의 동영상까지.

나에게 넘어와 있는 스포트라이트를 한방에 뺏어 가겠다는 심산이었다.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난 2년 후에 발견될 무기를 가로채려고 대산을 이용하고, 대산은 스포트라이트를 끌어오기 위해 날 이용하는구만.

내 목적을 위해 대산을 이용하려면 어쩔 수 없이 대산에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

이거… 의욕이 더 불타오르는데?

단순히 이용당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만약 이번 토벌전에서 대산이 내 스포트라이트를 뺏어 가는데 성공한다면?

이제 찬밥 신세지.

다시는 내가 대산 건물의 70층에 올라가는 일 따윈 없을 터였다.

안되지, 안돼.

내 목적을 다 이룰 때까지는 안될 말이지!

끼이익.

저 앞으로 먼저 출발했던 수송 차량들이 보였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백운 님.”

옆에서 들려오는 최리아의 목소리.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네?”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돌린 순간.

덥썩.

최리아가 양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았다.

“!!”

내 눈과 마주쳐 있는 최리아의 눈.

에메랄드색이었던 눈이 서서히 연분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마.”

“…?”

“넌 아무것도 아닌 들러리일 뿐이니까.”

“….”

“주제를 알고… 아무것도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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