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토벌전 (2)
오… 더럽게 크네.
날이 밝기 무섭게 안내를 받아 도착한 3번 도어.
도어들은 안에 있는 데몬을 못 나오게 함과 동시에 토벌전에 참가하는 헌터들을 분리하는데 사용되는 듯했다.
나눈다고 해봐야 세 개의 도어가 끝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니 그런데 이거 너무 노골적이게 나눠 놓은 거 아닌가.
1번 도어엔 대산의 헌터들이, 2번 도어엔 초대된 게스트 헌터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3번 도어에 배정된 건 나 혼자.
아주 날 골로 보내려는 심산이구만.
개인전이다 보니 여러 명이 함께 있다고 해서 유리할 건 없었다.
오히려 같이 있으면 점수를 나눠 먹어 오히려 불리하다면 불리한 조건.
그럼에도 날 홀로 둔 이유는 명확했다.
사북에 도착하기 무섭게 암시를 걸었던 최리아.
아마 3번 도어에 날 배치한 것도 최리아의 생각일 게 분명했다.
외부에서 보기엔 대산이 참 배려심 넘치게 보일 거야.
대놓고 내가 점수를 획득하기 쉬운 환경을 준 것이니 말이다.
위이잉.
고개를 들어 위에 있는 카메라들을 쳐다봤다.
카메라가 분산되는 다른 도어와는 달리 모든 카메라가 나에게 집중되어있는 상황.
이런 다 갖춰진 환경에서 데몬을 잡긴커녕 이리저리 도망만 다닌다면?
거기서 무기왕은 끝이었다.
카메라를 통해 중계되는 영상은 전국으로 나가고 있을 테니까.
생각할수록 무서운 년이야.
최리아를 생각하니 다시 한번 고개가 내저어졌다.
어째서 나한테 최리아의 능력이 통하지 않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국적으로 대치욕을 당할 뻔했는데 다행이다.
툭툭.
도어로 다가가 한 번 두드려 보았다.
전혀 안 울리는 걸 보니 엄청 두꺼운 철로 만들어진 모양이다.
대산이 돈이 많긴 많아.
토벌전을 위해 급조한 문일텐데도 이런 디테일이라니.
데몬의 할아버지가 와도 이 문은 안 뚫릴 것 같았다.
흠… 그나저나 어떻게 찾아야 되나.
어젯밤 대화에 의하면 광산 안에는 분명 뭔가 있었다.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르지만 말이다.
여기저기 최대한 돌아다녀 볼까.
원래라면 의심을 샀을 것이다.
데몬을 처치하며 목표 지점으로 달려가긴커녕 다른 곳을 들쑤신다니.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최리아의 암시에 정상적으로 걸렸었다면 데몬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게 정상인 상황.
지금이라면 내가 다른 길로 세더라도 최소한 최리아에겐 큰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오히려 잘됐어.
거기다, 난 알 수 있으니까.
대산의 직원들조차 광산에서 뭘 찾아야 하는지 모르고 있지만, 난 근처로 가기만 있다면 빛을 통해 파악이 가능하다.
# 토벌전을 시작하겠습니다. 도어 개방 10초 전.
잠시 후면 토벌전이 시작된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후우…!”
마음은 온통 혹시나 있을 무기의 흔적으로 가 있었지만.
막상 시작한다고 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쩔 수 없나.
전국 생방송.
강철 심장이 와도 이건 떨릴 수밖에 없었다.
# 개방 3초 전.
어느덧 개방 직전.
# 2초 전.
우두둑.
# 1초 전.
가볼까.
# 개방.
* * *
“키라라!”
“크아아!”
우글우글.
더럽게 많네.
쫓아오는 데몬들을 피해 열심히 내달렸다.
눈에 보이는 공간이란 공간은 다 들어가고 있는 상태.
하도 들쑤시고 다녀서인지 뒤에 붙은 데몬들의 수 역시 엄청났다.
그래도 다행이야, 광산이라고 해서 골렘이나 철덩이 같은 게 나오나 했는데.
그런 류의 데몬이었다면 조금 곤란할 뻔했다.
어찌 됐든 내 주력 무기는 쿨타임이 존재하지 않는 면도칼.
면도칼이 들어가지 않는 적이면 전투에 많은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 당장 싸울 일은 없지만.
뒤에서 우글거리며 쫓아오는 데몬을 돌아봤다.
면도칼을 꺼내지 않아도 충분히 잡히지 않을 수 있는 스피드.
어차피 지금은 최리아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으니 좀 더 몰고 다니며 공간을 탐색할 생각이었다.
고개를 들어 홀로그램으로 떠 있는 시간과 점수를 확인했다.
남은 시간은 두 시간, 김대석과 다른 헌터들의 점수가 열심히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 빠르진 않네.
조금은 걱정했었다.
대산의 헌터들이 김대석 주인공 만들기를 위해 꼼수를 쓰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러진 않는 모양이었다.
찍고 있는 카메라가 있기도 했고, 대산 외 헌터들의 점수 올라가는 속도가 무척 느렸기 때문이다.
애초에 난 0점이고.
대산의 가장 큰 목적은 개미굴에서 무기왕에게 뺏겼던 대중의 관심을 다시 돌려놓는 것.
그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굳이 김대석을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더라도 대산 헌터들의 힘을 보여주면 되었다.
내가 점수를 바짝 쫓아오기라도 했다면 어느 정도 꼼수를 써서라도 몰아주기를 했겠지만 말이다.
내가 0점이라 낙오한 줄 알겠지만.
고개를 돌려 우글거리는 데몬들을 바라봤다.
미친건가, 왜 적립해놓은 마일리지처럼 보이지.
고개를 흔들며 앞에 보이는 샛길을 향해 달려갔다.
금빛이든 보랏빛이든 발견하는 순간,
연기는 끝이다.
* * *
# 아… 무기왕은 어째서 도망다니기만 하는 걸까요? 개미굴과 구룡산에서 보여줬던 그의 화력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걸까요?
중계되는 해설을 들으며 최리아가 미소를 머금었다.
사용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내 명령은 절대적이니까.’
눈을 마주친 상대에게 무조건 이행할 수밖에 없는 암시를 거는 것.
최리아가 개방한 능력이었다.
자신보다 높다고 인지하는 대상이나, 인지하진 못하더라도 실제로 사용자보다 높은 존재가 아니라면 필연적으로 걸리게 되는 능력.
최리아는 백운이 자신보다 한참 아래라고 생각하기에 능력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두 시간 동안 그렇게 도망 다니세요. 죽을 위기에라도 처하면 구해주긴 할 테니까.’
백운의 뒤를 쫓는 데몬의 수를 보니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저렇게 달리다가 발이라도 삐끗하는 순간 그대로 데몬 밥 행일 테니 말이다.
# 무기왕과 달리 김대석을 포함한 대산의 헌터들은 막힘이 없습니다! 개인전인 토벌전의 규칙을 지켜가며 각자가 맡은 데몬을 시원하게 처치하고 있는 모습! 역시 대산입니다!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무기왕에게 쏠려 있던 카메라들 마저 지금은 대산의 헌터들에게 거의 다 옮겨 간 상태.
무기왕을 찍고 있는 건 CBC의 카메라 한 대 뿐이었다.
‘게스트들도 딱 자기 역할만 해주고 있네.’
애초에 게스트 헌터들은 대중들의 관심을 끌 겸 대산의 헌터들과 비교하기 편하라고 넣어둔 전투력 측정기 역할이었다.
‘그나저나 저곳에 뭐가 있다는 걸까.’
- 사북의 광산을 정리 부탁드립니다.
대산의 용병단으로 온 탐사실의 지원 요청.
최리아는 용병단으로부터 그 지원 요청을 전해 듣고 토벌전을 계획했다.
‘뭐가 있는지는 내가 알 바 아니긴 하니까.’
계획대로 진행되는 일에 미소를 짓는 최리아.
최리아가 노곤한 몸을 의자에 기대는 순간.
# 무… 무슨 일일까요! 무기왕이 방향을 틀어 데몬에게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
# 어… 어! 데몬 무리가 있는 옆으로 슬라이딩!!
달리다 말고 뒤를 돌아 우글거리는 데몬 쪽으로 슬라이딩해버리는 백운.
자리에서 일어난 최리아의 얼굴로 당혹감이 그려졌다.
“뭐… 뭐하는 거야!?”
당황한 건 최리아만이 아니었다.
홀로 중개하던 CBC의 송유빈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
# 아아 데몬들이 무기왕에게!! 어…!?
데몬들이 슬라이딩한 백운에게 덮쳐지려는 찰나,
스악!
백운이 말도 안 되는 움직임으로 데몬 무리를 벗어났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빠르고 유연한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데몬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백운.
철컥.
“푸읍!”
최리아가 마시던 차를 내뿜었다.
“말….”
어느새 백운의 양손에 들려있는 두 자루의 권총.
백운이 모여있는 데몬들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말도 안돼!!”
* * *
[앤 보니& 메리 리드]
망설임 없이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위험하다…!
조금 전, 옆 벽을 허물며 나타난 근육질의 데몬.
데몬의 등장에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반짝.
데몬의 어깨에 달라붙은 채 영롱한 보랏빛을 뿜어내고 있는 오래된 부적.
끼이이익!
너무 놀라 달리던 중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몸을 회전시켰다.
부적은 딱 봐도 오래되어 위태위태한 상태.
저대로 데몬 무리에 섞이게 뒀다간 찢어지거나 가루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어차피 공명의 순간엔 시간이 멈춘다.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린 후 녀석에게 달려가 몸을 날렸다.
그리고 부적과의 공명을 통해 보게 된 오래전의 기억.
무기에 대한 흔적이었다.
그것도 비전 수리검에 대한 기억을 보게 됐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철컥.
데몬들에게 리볼버를 조준했다.
흔적을 찾아서도 있지만 지금은 최리아의 장단에 맞춰 주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최대한 빨리 가야 한다.
[빛의 구원]
지금까지 몰이가 된 엄청난 수의 데몬에게 리볼버의 탄환이 퍼부어졌다.
* * *
# 드디어 나왔습니다! 무기왕의 전매특허! 포격에 가까운 탄환 세례!
# 지금까지 모여 있었던 데몬들이 순식간에 쓸려나갑니다! 무기왕이 돌아왔습니다!
쾅!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하이톤으로 팡팡 터지는 송유빈의 목소리에 최리아가 책상을 내리쳤다.
백운은 토벌전이 끝날 때까지 도망만 다녔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대체 뭐란 말인가.
# 아 점수가… 점수가아아아! 순식간에 대산 헌터들의 점수를 훌쩍 넘겨버립니다!
무기왕의 귀환에 대산의 헌터들을 찍고 있던 카메라들마저 백운에게 가버린 상황.
# 전부 계획이었나요! 일부러 데몬을 잡지 않고 몰아서 다른 도어에 있을 헌터들을 방심하게 한 뒤! 한 번에 점수를 끌어올리는 전략! 엄청납니다! 쏟아지는 탄환만큼이나 눈부신 전략입니다!
보고 있던 여러 개의 모니터에서 쉴새 없이 무기왕의 이름이 외쳐졌다.
# 대산의 헌터들! 순식간에 올라가는 무기왕의 점수에 당황한 것 같습니다!
# 김대석 헌터! 당황한 게 얼굴에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아, 저희도 무기왕에게 가보겠습니다!
‘김대석 저 멍청이가!!’
열심히 표정 관리를 해도 모자를 판에 저딴 얼굴을 하다니.
‘전국으로 보여지고 있단 말이야!’
꾸욱.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 지끈거리다 못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왜 내 능력이 통하지 않은 거지?’
‘애초에 통하지 않았다면 왜 데몬을 피해 다닌 거지?’
‘갑자기 슬라이딩은 왜 했고!!’
이해되지 않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슬라이딩을 하고 다시 빠져 나오는데 까지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찰나에 행해진 동작.
‘….’
어떤 일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항상 차가운 평정심을 유지해왔던 최리아.
지금 그런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풀리지 않는 여러 의문들과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들.
이것들이 가리키는 건 하나였기 때문이다.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