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조건말고 약속
이게 머선 일이고.
갑자기 최리아의 방으로 난입한 대산의 회장.
아니지, 회장이면 자기 건물이니까 난입은 아니고.
어쨌든 갑작스럽게 등장한 대산의 회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애가 대산의 회장이라고?
내가 아무리 대기업이나 데몬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었다지만.
TV는 보며 살았기에 대산의 회장이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완전 할아버지였는데.
내가 한참 개방하겠다며 돌아다니느라 세상에 관심이 없었을 때가 있었으니.
그때 회장이 바뀐 걸 수도 있지만 말이다.
회장이 보통 바뀌나?
회장 밑의 대표나 이사들이 바뀌는 경우는 종종 봤었는데.
죽었을 때를 제외하고 회장이 바뀌는 일은 본 적이 없었다.
아니면 무언가에 책임을 지고 사퇴… 를 했다고 보기에도 힘들었다.
내가 아는 한 대산은 항상 승승장구했었는데.
심지어 종말의 날 이후에도 대산의 권력은 그대로였다.
종말의 날.
많은 게 달라졌지만 변하지 않은 게 한 가지 있었다.
대한민국을 주름잡던 대기업들의 위상.
서울 외의 지역을 잃으며 약해질 법도 했지만 기업들의 힘은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강해졌다.
동맹.
기존부터 물밑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손에 꼽는 대기업들이 종말의 날과 동시에 동맹을 맺었다.
그 뒤부턴?
- 일정 구역은 저희가 담당하겠습니다. 국가에서는 상관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기업 동맹의 힘은 하늘을 찔렀다.
종말의 날 전투로 전력의 대부분을 잃었던 국가.
이와 달리 기업들은 서로 눈치 싸움을 해가며 전력을 아꼈었다.
그러다 보니 종말의 날 이후 힘의 균형은 자연스럽게 국가에서 기업들의 동맹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었다.
“대산의 회장, 소피아에요.”
계단에서와 마찬가지로 소피이가 격식 있는 인사를 건네왔다.
“아… 안녕하세요.”
나도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화사한 백금발과 맑은 물색 눈동자의 외국인 소녀.
그런 소녀가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기업의 회장이라니 아직도 잘 믿기지 않았다.
분명 할아버지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회귀한 뒤로 대산의 회장은 단 한 번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회귀 전에 봤던 건 전용 바지사장이었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천천히 걸음을 옮긴 소피아가 최리아에게 다가갔다.
지나치면서 눈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인사성 밝은 애… 가 아니고 회장님이구만.
“최리아 실장님, 백운 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제가 좀 모셔 가도 될까요?.”
“예… 알겠습니다.”
최리아한테도 저런 모습이 있구만.
최리아는 회장의 등장에 나보다 더 놀라고 있었다.
허리를 숙인 채 펼 생각을 하지 못하는 상태.
잘된 건지 더 나빠진 건지 감이 안 잡히네.
스릴러 영화에서 단골로 나오는 장면이 있었다.
악당 팀장을 거느리고 있는 기업의 회장.
초반엔 사람 좋은 모습으로 나오지만, 그런 모습은 많이 가봐야 중반까지였다.
후반으로 돌입하는 순간 악당 팀장도 안 했던 잔인한 짓을 서슴없이 하며 찐 보스의 포스를 폭발시키기 때문이다.
부디 찐 보스가 아니시길.
내가 관상에 관련된 능력을 타고 난 건 아니지만.
소피아의 얼굴이나 평온한 말투만 봤을 때 찐 보스의 향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백운 님, 아티라가 제 방까지 안내해드릴 테니 먼저 가 계세요.”
저벅.
찐한 흑색 머리를 위로 올려 묶은 아티라가 내게 걸어왔다.
뭔가 비서다.
당연히 소피아의 비서겠지만.
단정한 머리와 복장, 커다랗고 지적인 안경까지.
아티라는 길가에서 봐도 어 비서다! 할 것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네.”
소피아와 단둘이 남겨질 최리아를 뒤로 하고.
또각. 또각.
천천히 문으로 향하는 아티라를 따라갔다.
* * *
아티라를 따라 도착한 건물의 최고 층.
얼레.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드러난 방의 모습에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대산의 본사 건물은 외관부터 내부까지 삐까뻔쩍한 현대풍 건물이었는데, 지금 도착한 80층은 달랐다.
고딕한 취미신가.
들어가자마자 풍기는 오래된 나무의 향기와 은은하게 주변을 밝히고 있는 불빛까지.
80층은 회장실이라기보단 앤티크한 서재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그래도 뭔가… 좋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전까지 회장실이라 하면 깔끔하고 딱딱하고 인간미 없는 이미지를 상상했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스르르.
은은한 빛 때문이었을까.
의자에 앉아 있기라도 했다면 잠이 들고 말았을 따스함이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선 사람을 긴장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느낌보단, 편안히 있을 수 있는 안정감과 푸근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띵.
잠시 후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소피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평화로운 얼굴로 웃고 있는 모습.
“이쪽으로 앉으세요.”
소피아의 안내를 따라 책이 쌓여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뒤이어 비서인 아티라가 내오는 향긋한 차까지.
오.
대기업의 회장실에 끌려왔음에도 마음이 편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백운 님은 얼굴이 평온하시네요.”
나도 모르게 회장실의 분위기에 마음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오해의 소지가 있군.
절대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아니었다.
머릿속에선 나름 여러 가지 의문이 바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소피아는 왜 나를 데려왔을까, 날 먼저 올려보낸 뒤 최리아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앞으로 나에겐 어떤 보복이 되돌아오는 걸까 같은 의문들이었다.
역시 탈주뿐이다.
의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내리고 거기에 이어질 가능성까지 생각해봤지만.
야반도주 후 잠잠해진 뒤 돌아오는 방법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깜짝 놀랐어요.”
소피아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회장마저 놀라게 한 건가.
물론 나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나보다 어려 보이는 소녀가 대산의 회장이라고 나타났으니까 말이다.
너무 어린데.
아무리 개방과 동시에 나이가 멈춘다고 해도 대기업의 회장을 하기에 소피아는 너무 어렸다.
그리고 기업의 회장이 비상계단 이용이라니.
애초에 회장은 맞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의심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대산의 회장이 맞으니까요.”
“!!”
개방한 능력이 독심술인가 의심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산은 백운 님에 대한 어떠한 고소나 보복성 조치도 취하지 않을 거니까요.”
…!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최리아가 쏟아부었던 것들이 실제로 행해졌다면 정말 배를 탈 생각이었었다.
“가… 감사합니다.”
일단 회장 파워로 최리아의 독기를 눌러 준 거니 감사를 표했다.
“아뇨,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운 님에게 선처를 하거나 베풀기 위해서가 아닌, 회사를 위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니까요.”
합리적인 선택이라니.
당연히 대인배의 자비로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끌려오셨으니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밖은 백운 님 이야기로 난리가 났거든요. 정확히는 무기왕이지만요.”
난리라.
굳이 밖을 보지 않았더라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개미굴과 구룡산 영상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었는데 광산에서 그렇게 해버렸으니.
“대산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깔려 버렸지만 백운 님은 그 반대입니다. 광산에서의 일로 새로운 영웅의 탄생이라 불리고 있으니까요.”
영웅이란 단어를 들으니 귀가 간지러웠다.
인터넷에서나 보던 낯선 단어였는데 내가 그 단어를 받고 있다니.
“그런 상태에서 저희가 백운 님에게 소송을 건다거나 그러면.”
소피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최리아의 냉정함과는 달랐다.
살면서 화를 내거나 흥분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평온한 어투와 목소리.
동시에 메세지가 귀로 잘 전달되는 묘한 느낌의 목소리였다.
“난리가 나겠죠. 반성하고 사과하기는커녕 자기들의 영웅을 건드리냐고.”
영웅이라.
좀 과분하지만 그런 여론으로 인해 대산에서 저렇게 나오게 됐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그나저나 대산이라면 이런 여론 정도는 무시하고도 보복을 해올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소피아 님.”
옆에 서 있던 아티라가 시계를 보더니 소피아를 조용히 불렀다.
회장과 비서의 관계임에도 보다 더 친근해 보이는 두 사람.
“알겠습니다. 5분이면 돼요.”
5분?
“인기가 하도 많으셔서 여유롭게 대화도 못 하겠군요. 시간이 없으니 제가 백운 님을 모셔온 이유를 말하겠습니다.”
꼴깍.
드디어 본론이란 생각에 괜한 긴장이 됐다.
대기업 회장이 날 부른 이유는 뭘까.
“이번에 대산이 백운 님께 한 행동에 대한 사과로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선물이라면…?”
걱정하던 내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
“백운 님이 대산에게 바라는 것을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소피아가 물색의 깊은 눈으로 날 응시했다.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신비로운 눈이었다.
“무언가에 대한 정보가 될 수도 있겠죠.”
!!
내가 무기를 찾고 있다는 걸 알리는 없겠지만.
어째서일까.
저 눈을 보고 있자니 소피아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되네.
달달한 제안이었다.
애초에 내가 토벌전에 참가한 이유 역시 대산이 가지고 있을 무기의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비전 수리검은 됐고.
도윤과 피렌조의 전투 후에 수리검을 회수했던 스님들.
수리검이 어디에 있을지는 대충 짐작이 되고 있었다.
그 외 한 가지라.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대산과 가까이 지낼 수도 없게 되었다.
좀 미뤄지더라도 다른 방법을 통해 손에 넣으려고 했었는데, 알려주겠다니.
뭘 고를까.
미간을 찌푸린 채 기억력을 총동원했다.
한 가지 밖에 못 고르는데 무기고에도 못 넣을 걸 고르는 순간 완전 꽝이었다.
“원하신다면 정보를 두 개 더 드리겠습니다.”
!?
내 고민하는 모습을 보던 소피아의 파격적인 제안.
원 플러스 원도 아니고 원 플러스 투라고?
“하지만 이건 저와 한 가지를 약속해 주시면 드리겠습니다.”
일단 들어 봐야겠지만 정보를 세 개나 주겠다니.
이미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다.
끄덕.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소피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나중에 딱 한 번.”
소피아의 투명한 눈에 묘한 기운이 어렸다.
“저를 위해 싸워 주셨으면 합니다.”
* * *
조금 전, 백운이 회장실로 간 뒤의 70층.
소피아가 최리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최리아 실장님, 대산은 백운 님에 대한 어떠한 보복성 행위도 하지 않을 겁니다.”
“!”
대외적으로는 물론이고 회사 내에서조차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손에 꼽는 회장, 소피아.
소피아의 말에 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겠습니다.”
솔직히 묻고 싶었다.
어째서냐고.
회사의 이미지를 박살 낸 백운을 저대로 두면 대산을 무서워하던 이들마저 느슨해질 수도 있는데, 어째서?
“회사의 이미지는 중요합니다. 실추됐다면 반드시 원래대로 돌려놔야 하며 그것에 손상을 입힌 자는 정당한 대가를 치루어야겠죠.”
“…?”
최리아의 얼굴에 물음표가 생겼다.
그런데 왜?
“하지만, 수지 타산이 안 맞거든요.”
말끝을 흐린 소피아가 조금 전 백운이 나간 문을 바라봤다.
“왕이 될 사람을 적수로 돌리는 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