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수리검이 있는 곳
오늘 무슨 날인가.
80층에서 안내를 받아 내려온 회의실.
회의실엔 낯익은 사람들이 있었다.
“오랜만이군.”
구룡산에서 봤던 기태랑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떡하지.
나도 손을 흔들어야 되나.
잠시 찾아온 혼란을 뒤로 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 저희가 백운 님을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 아침부터 오셨더군요.
소피아가 떠나는 나를 배웅하며 했던 말이었다.
“고문 당하거나 그러진 않은 거 같네.”
기태랑 옆에 함께 앉아 있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광산 안에서 봤던 은갈치 정장의 남자, 비광.
정신이 없긴 없었나 보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일까.
아무리 정신이 없다 해도 비광을 못 알아보다니.
기태랑만큼 영상에 자주 등장하진 않지만 비광 역시 화려한 전투 방식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헌터였다.
“하하…. 고문 같은 거는 안 당했습니다.”
“위에서 워낙 쪼아대서 말이야. 대산이 우리 병아리 헌터 죽이기 전에 데려오라고.”
그래서 달려온 듯했다.
이미지가 박살난 대산이 나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서.
70층에서는 그런 분위기긴 했지.
최리아를 중심으로 날 둘러싸고 있던 수십의 대산 헌터들.
집단 린치를 당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 우스운 가면은 언제까지 쓰고 있을 거냐?”
비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 얼굴을 바라봤다.
아, 맞다.
1층에 기자들이 깔려있을 거란 아티라의 말에 가면을 쓰고 내려왔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필요 없지.
어차피 기태랑과 비광은 내가 무기왕인 걸 알고 있으니까.
슥.
“미안한데 다시 써라.”
!?
엄청난 태세변환을 보이는 비광.
내 생긴 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걸까.
“밑에 기자들 있어서 말이야. 깜빡했네.”
“아… 네.”
호다닥 가면을 다시 장착하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1급 헌터 두 명이 날 데리러 오다니.
뭐지, 이 기분은.
나도 모르게 어깨가 하늘로 승천하고 콧김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전 어디로 가는 건가요?”
“어디 안 가는데?”
“네…?”
어디 헌터 중앙청이라던가 대통령실이라던가 가는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집 데려다주고 우린 갈 거야.”
“집 데려다주러 두 분이 오셨다고요?”
눈이 커진 채 묻자 비광이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내 말이 말이다.”
“보여주기다. 국가는 소속된 헌터를 이렇게 아낀다 뭐 그런?”
기태랑의 말을 들으니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영웅적 행동을 한 뒤 멋지게 악당 대기업에 끌려간 국가 헌터.
밖에서 대중들이 날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가만히 놔두면 욕먹었겠지.
국가에 소속된 헌터를 방치한다, 영웅을 악덕 기업의 손에 죽게 내 버려둔다 등등 여러 말이 나왔을 터.
그래서 기태랑과 비광이라는 1급 헌터 두 명을 대산으로 보낸 것이었다.
국가는 대기업 따위에 굴하지 않고 소속된 헌터를 챙깁니다! 라는 메세지와 쇼가 아닌 진심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보여주기식이어도 영광이네요.”
“고럼, 그래야지. 장관급 말고는 이런 호위 받아본 적 없을걸.”
비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으로 걸어나갔다.
“집은 어디야? 어쨌든 데려다줘야 하니까.”
“….”
기태랑의 물음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나 집 없는데.
잠시 잊고 있었다.
집 구해야 했는데.
음… 거기로 가자.
스윽.
집을 묻는 기태랑에게 바싹 몸을 밀착시켰다.
“여기로 좀 부탁드립니다.”
* * *
“너 스님이야?”
도착한 장소에 어리둥절 해하는 비광과 기태랑.
집 어디냐고 물어봤더니 커다란 절이 있는 산으로 가달라 했으니.
삐빅.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스님은 아니고. 좀 볼 일이 있어서요.”
“허….”
볼 일이 있단 말에 비광이 고개를 내저었다.
“너 몸은 괜찮은 거냐?”
팔과 목을 돌리며 몸 여기저기를 더듬어봤다.
칼에 베이고 찔린 곳들이 욱씬거리긴 했지만 멀쩡한 것 같았다.
역시 대기업 의사야.
속으로 공짜 치료를 해준 대산 의료실에 감사 인사를 건넸다.
“완전 멀쩡해요.”
“대단하네.”
비광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날 응시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얼굴.
“왜… 왜 그러세요?”
내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비광이 고개를 저었다.
“됐다. 어쨌든 우린 잘 데려다준 거다.”
“감사합니다. 여기서부턴 제가 갈게요.”
운전석에 있던 기태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또 보자고.”
가벼운 인사 후 떠나려는 기태랑.
“잠시만요!”
잊을 뻔했다.
“?”
“싸… 싸인 좀….”
* * *
기태랑의 차 안.
“싸인이라니, 재밌는 친구네.”
비광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불러 세우길래 무슨 부탁을 하려고 하나 했는데, 싸인을 해달라니.
“종잡을 수가 없는 친구야.”
기태랑도 웃음을 터뜨렸다.
낮은 급수의 헌터들은 1급 헌터를 보는 순간 얼음이 되는 게 보통이었다.
여러 테스트와 시험을 통해 국가에 소속되는 순간, 1급이 얼마나 아득한 위치인지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진짜 국가 헌터는 왜 지원한 거지? 의문이네. 할 거면 더 높은 급수를 하던가.”
“어디에 소속되는 게 싫다고 하던데. 10급 한 거는 최소한의 밥벌이 때문이고.”
“허…?”
어이없어하는 비광에 기태랑도 동의한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구룡산을 내려오며 들었을 땐 어이가 없긴 했다.
돈은 벌고 싶은데 어딘가에는 소속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10급을 지원했다니.
아마 이런 어이없는 이유는 백운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았다.
“이상한 놈이네.”
백운에 대한 한 줄 평을 내린 비광이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래서, 어때?”
기태랑이 그런 비광에게 질문을 건넸다.
“….”
대답 전에 무언가를 생각하는 비광.
사실 비광까지 오늘 동행할 필요는 없었다.
실제로 강태황의 지시를 받은 건 기태랑이었기 때문이다.
- 같이 가자.
혼자 가려는 기태랑에게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 비광이었다.
- 한 번 봐야겠어.
전화가 왔을 땐 의외였다.
어디에 나서거나 눈에 띄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복장은 엄청 튀게 입고 다니는 이상한 놈.
자기와 마찬가지로 귀찮은 건 딱 질색하는 녀석이 비광이었다.
그런 비광이 먼저 전화를 해 같이 가자고 제안을 하다니.
“그냥 봤을 땐 상상이 잘 안 가네.”
“동영상 말하는 거지?”
비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안 믿겨. 그 영상을 찍고 있던 1인칭 시점의 주인공이 저 녀석이라는 게.”
처음엔 광산 안에 있던 데몬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었다.
대산의 헌터들을 썰어버리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산의 헌터들이 약해서 그런 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상을 보고 나니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뭔가 움직임이 어색하긴 했지만, 그 데몬 움직임이 엄청났어.”
듣고 있던 기태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국으로 퍼진 백운의 액션 캠 영상.
보통의 사람들은 백운이 데몬을 처치하고 모두를 구했다! 라는 것에 집중했지만, 기태랑과 비광은 달랐다.
“경계에 있었을 거야.”
죽음의 경계.
데몬과 백운은 그 경계를 두고 서로에게 칼을 휘둘렀다.
작은 실수 하나만으로도 목숨이 사라질 수 있는 아찔한 경계.
“그 경계를 두고 싸웠던 놈이 저렇게 멀쩡하다니. 실력은 둘째 치고 멘탈 하나는 미쳤네.”
보통은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몸을 단련하고 강한 힘을 가졌다 하더라도 죽음 직전까지 가는 경험을 한다면 말이다.
“멘탈이 무너져 다시는 싸움을 할 수 없게 되거나, 평생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가 생겼을 텐데.”
“나도 너무 멀쩡해서 놀랐다.”
백운은 멀쩡해도 너무 멀쩡했다.
마치 지난 일은 다 새까맣게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리고 분명히.”
비광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동영상을 보며 가장 이해 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입에 단검을 문 채 백운의 목을 향해 달려들던 데몬.
“죽었어야 했다.”
* * *
댕--- 댕---
귓가로 들려오는 풍경 소리.
좋구먼.
감성 부족으로 그다지 자연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구룡산의 옹달샘부터 지금 들리는 평화로운 종소리까지.
어쩌면 자연 친화형 인간이었을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찰을 바라봤다.
부적의 기억에서 스님들이 모여있던 거대한 사찰이었다.
진짜 오래됐나 보다.
여기저기가 허물어지고 낡아 있는 사찰.
자세히 보지 않아도 세월의 흔적이 물씬 느껴지고 있었다.
위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지었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올라오는 입구를 제외하곤 사방이 거대한 산으로 막혀 있는 사찰.
사찰 앞에 서 있자니 뭔가 거대한 요람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여기겠지.
부적의 기억에서 스님들은 수리검을 회수해 어딘가로 향했었다.
그걸로 기억은 끝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수리검이 있다면 바로 이곳일 거라는 걸.
저벅.
천천히 사찰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와우.
입구의 양옆에 서 있는 거대한 조각상들.
오만상을 찌푸려 난 무서운 존재라는 걸 한껏 뽐내고 있는 조각상이었다.
밤에 왔으면 좀 무서웠겠네.
지금이야 밝은 낮이라 자연을 거닐며 풍경 소리를 즐기고 있었지만.
캄캄한 밤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 같았다.
으스스했겠어.
그나저나 버려진 사찰인 걸까.
안을 둘러보고 있는데도 사람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우왁!”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스님이 평온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뭘 하러 왔다고 해야 하나 약간 고민됐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애초에 수리검이 있다고 해서 강제로 훔치거나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달라붙어서 달라고 조르긴 하겠지만.
“수리검을 찾으러 왔습니다.”
“!”
평온하던 얼굴에 잠시 파도가 이는 노승의 얼굴.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스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오시죠.”
이렇게 순순히?
사찰의 보물이라며 거절하면 어떡하지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문전박대당하는 분위기는 아니라 다행이긴 하지만 너무 순탄한 게 오히려 더 당황스러웠다.
저벅.
스님을 따라 사찰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에 사찰에 새겨진 다양한 그림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새겨 놓은 듯한 그림이었다.
!!
낯익은 모습들이 보였다.
벽에 새겨져 있는 그림이다 보니 얼굴까진 자세히 알아볼 순 없었지만.
입고 있는 옷이나 분위기를 봤을 땐 분명해 보였다.
피렌조와 도윤.
싸우고 있는 둘의 모습이 여기저기에 그려져 있었다.
“익숙한 그림인가요?”
멍하니 그림을 보고 있는 내 모습에 스님이 미소를 지었다.
질문이지만 정말 궁금하여 묻는 뉘앙스가 아니었다.
당연히 넌 본 적이 있을 거라는 듯한 확신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사찰 안으로 얼마나 들어왔을까.
문이 굳게 닫혀 있는 낡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
그 안에서 문틈을 통해 흘러나오는 황금색 빛.
철컹.
스님이 가지고 있던 열쇠로 문을 연 뒤 옆으로 비켜섰다.
동시에 모습을 나타낸 비전 수리검.
방으로 들어가기 전, 비켜 서 있는 스님을 바라봤다.
내가 손을 대는 순간 수리검은 사라진다.
스님은 그걸 알고 있을까?
“저 스님.”
사실대로 말하려는 찰나.
스님이 인자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가십시오.”
“!”
“자격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