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일본으로
풀썩.
“하아아아아!”
따듯한 물로 목욕을 때린 후 침대에 몸을 눕혔다.
포옥 파이며 날 감싸 안는 고급 침대의 부드러운 감촉.
“이게 행복이다.”
행복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 서울로 돌아가는 차량입니다. 가실 분 있으면 같이 가시죠.
마운티거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서울에서 지원을 왔던 국가 소속 헌터들.
헌터들은 같은 국가 소속이라는 이유로 날 서울행 차에 태워줬었다.
착한 사람들이야.
이 첩첩산중에 또 어딜 가서 자야 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착한 이들 덕분에 무사히 서울까지 와 호텔에 입성할 수 있었다.
호텔 이거 맛 들리겄네.
처음엔 나도 모르게 값싼 찜질방으로 가려 했지만, 문득 계좌에 있는 3000만원 상당의 잔액이 떠올랐고, 거의 동시에 방향을 틀어 가까운 호텔로 뛰어들었다.
이 정도는 나를 위한 선물로 줘야지.
암! 그렇고말고.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자기 합리화를 했다.
잔고도 잔고지만 오늘은 너무 고생을 해버렸다.
산을 부수다니.
이 정도면 일주일 내내 호캉스를 즐겨도 무죄였다.
게다가.
호다닥.
금고 앞으로 달려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넣어뒀던 나의 소중한 산삼.
아직 몇 년 산인지 알 수는 없지만 풍겨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히히.”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웃음이 터졌다.
산삼이라니.
내일 날이 밝자마자 헌터 전용 프라이빗 은행에 맡길 생각이었다.
믿을만한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숨겨놔야지.
당장에라도 달려가 감정을 맡기고 싶었지만 이곳은 서울.
눈 깜짝하면 코 베어가는 곳이 아니던가.
내 만년삼을 백년삼으로 눈탱이 쳐 빼앗아 갈지도 몰랐다.
안되지, 안돼.
어떻게 구한 산삼인데.
전문가가 나타날 때까진 보류다.
산삼이 무사함을 확인한 후 금고에 들어있던 헌터증을 꺼냈다.
참 좋은 세상이야.
여권이 없어도 헌터증만 있으면 해외로 나갈 수 있다니.
헌터가 되기 전까지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비행기 예약도 했고.
처음 해보는 비행기 예약이다 보니 영문 이름과 시간을 얼마나 많이 확인했는지 모른다.
볼 때마다 닳았다면 이미 호텔 컴퓨터의 모니터는 터지고도 남았을 정도.
PM 9:00, FIRST.
흐뭇.
티켓을 보고 있자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예약한 건 무려 퍼스트 클래스.
처음엔 이코노미를 골랐지만 두어 시간의 갈등 후 퍼스트로 바꿔버렸다.
의미 있는 첫 비행인데 퍼스트는 타줘야지.
산삼을 주워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도 같았지만 어쩌겠는가.
첫 비행을 의미 있게 남기고 싶은 것을.
아마 일본을 퍼스트 클래스 타는 건 나밖에 없겠지.
내일 목적지는 오사카의 간사이 국제공항.
더 디테일하게는 효고현의 히메지 성이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한 건 바로 성 찾기.
메모장에 그려진 성을 찾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명한 성 1페이지에 나와 있는 히메지 성.
기억에서 봤던 것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구조나 외형을 봤을 땐 이곳이었다.
지금까지는 아주 순조로워.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대산이 개고생하며 찾았다길래 대체 무슨 고생을 한 걸까란 걱정.
지금은 쉽지만 4년 뒤에 고난이도가 됐을 수도 있지.
애써 희망회로를 돌리며 다시 침대에 몸을 묻었다.
삑.
앞에 놓여있는 액션 캠의 영상을 돌려봤다.
- 콰아아아앙!!
“크으…!”
내가 했지만 취할 것 같은 장면이었다.
푸른 비늘을 감싼 채 마운티거에게 부딪히는 순간.
부딪힌 곳을 중심으로 마운티거에게 엄청난 균열이 생겨나는 장관이었다.
이거 후원금 터지는 거 아니야?
영상 알못인 내가 봐도 이건 크럭커 보다 한 수 위였다.
스케일부터 따라올 수 없는 수준.
크럭커가 일반 액션 영화였다면 이건 블록버스터였다.
“히힉.”
이초희가 나온 장면을 포함, 산삼을 득하는 순간을 깔끔하게 삭제한 후.
업로드.
업로드 버튼을 눌렀다.
들어와라! 후원금아!
* * *
백운이 업로드 버튼을 누르고 잠들어버린 새벽.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CBC 긴급 생방송입니다. 송유빈 리포터가 자리에 함께 나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CBC 방송의 송유빈입니다.”
곡성에서 들려온 소식에 CBC의 긴급 생방송이 편성됐다.
- 졸려 죽겠는데 무슨 일이에요?
한참 달콤한 잠을 자던 중 회사의 전화를 받은 송유빈.
송유빈은 일어나자마자 걸려온 전화에 짜증을 내뱉었었다.
- 긴급 생방송이야! 빨리 와!
- 아 왜 저에요! 다른 리포터도 있잖아요!
- 무기왕인데?
- 지금 갈게요.
어느 새부턴가 송유빈은 무기왕에게 꽂혀버리고 말았다.
물론, 처음부터 꽂혔던 건 아니었다.
처음 시작은 괘씸함이었다.
이름이라도 알려달라고 힘들게 따라갔음에도 끝까지 지독하게 도망가버린 무기왕.
오기가 생겨서라도 누군지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 아가리 벌려라, 탄 들어간다.
크럭커의 동영상에선 괘씸함이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무기왕에겐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
그리고 이런 호기심에 불을 지르다 못해 빠져들게 만든 것이 바로 대산의 토벌전이었다.
안에서 있었던 모든 사실을 시원하게 카메라 앞에서 까발린 무기왕.
아무렇지 않다는 듯 카메라에 동영상을 들이댄 순간부터 송유빈은 무기왕에게 푹 빠져들고 말았다.
“조금 전 곡성에서 마운티거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 마… 마운티거? 그 산 데몬?
@ 그렇게 크진 않다고 하던데?
@ 안 커도 산은 산임.
“그리고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마운티거를 잡은 게 무기왕이란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송유빈 리포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송유빈의 선배이자 진행자인 김창수가 마이크를 넘겼다.
회사 내에서도 무기왕 덕후로 소문이 난 송유빈.
알려진 대로 송유빈은 무척이나 상기되어 있는 얼굴이었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장 근처에서 무기왕의 탄을 봤다는 목격자가 한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에이, 그거 쐈다고 무기왕이 마운티거 잡은 건 아니지.
@ 맞아 애초에 마운티거를 잡은 건 그 탄이 아니라고 하던데?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댓글에 송유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기왕이 잡았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아직은 증거가 부족했다.
@ 애초에 자기가 잡았으면 동영상 올렸겠지. 포상금 걸려 있을 텐데.
@ 맞네, 무기왕이 아니니까 못 올리는 거겠지.
댓글을 지켜보던 김창수가 입을 열었다.
“일각에선 무기왕의 활동이 끝났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국가가 손을 써 무기왕을 빼오긴 했지만 상대가 대산인 만큼 분명 대가를 치뤘을 거란 관점이죠.”
송유빈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었다.
대기업 대산의 외압.
광산에서 동영상을 까버린 건 엄청난 행동이었지만, 동시에 위험한 행동이기도 했다.
아무리 국가가 나서 무기왕을 지지했을지언정 국가 역시 대기업과는 공생하는 관계.
대산을 완전히 무시한 채 그런 행동을 하진 못했을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무언가 거래를 했을 터.
‘그 거래가 무기왕의 활동을 제한하는 거라면.’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는 무기왕은 더 이상 없을 수도 있었다.
“무기왕을 응원하는 대중의 입장에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기왕은 뭔가 지금까지의 헌터들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엔 대기업에 굴복하고만 것이니까요.”
‘….’
생방송이다 보니 티는 못 내고 있지만 김창수의 말을 듣는 송유빈은 잔뜩 시무룩해져 있었다.
반박하고 싶지만 다 맞는 말이었다.
@ 결국 무기왕도 어쩔 수 없는 거지.
@ 아무리 새로운 영웅이니 뭐니 해도 개인이 대기업을 이길 순 없으니까.
@ 좀 아쉽네. 무기왕은 다를 줄 알았는데.
@ 무기왕도 사람인데 뭘 어쩌겠음.
그렇게 무기왕은 이제 끝났다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을 때.
진행을 맡고 있던 김창수의 이어폰으로 무언가 들려왔다.
“…!!”
‘뭐지?’
놀란 얼굴의 김창수에 송유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정보가 들어왔길래 저런 걸까.
“조금 전 한튜브로 영상 하나가 올라왔다고 합니다! 마운티거를 잡은 헌터의 동영상입니다!”
@ 뭐? 누구야?
@ 한튜브면 국가 소속 헌터였나 본데? 누가 그런 거지?
@ 그래서 누구 동영상인데!?
“무기왕… 무기왕입니다! 국가 소속 10급 헌터 무기왕이 올린 동영상입니다! 무기왕이 마운티거를 잡았습니다!!”
화악.
김창수의 외침에 시무룩했던 송유빈의 얼굴에 빛이 드리워졌다.
쾅!
생방송이든 뭐든 책상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난 송유빈.
“여러분!”
지금까지 답답하게 묵혀뒀던 것들.
그것들을 한꺼번에 밖으로 쏟아냈다.
“무기왕이 돌아왔습니다아!!!”
* * *
“하!”
사북의 카지노.
핸드폰을 바라보던 비광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CBC의 방송은 그야먈로 난리가 나 있었다.
# 무기왕입니다! 무기왕이 돌아왔습니다!
@ 와….
@ 미쳤다…. 산을 부순다고?
“손님, 패 오픈해주시기 바랍니다.”
카드를 치다 말고 핸드폰에 정신이 팔린 비광.
“빨리 좀 칩시다! 바빠 죽겠는데.”
“아니 카드 하다 말고 무슨 방송이야?”
그런 비광에게 딜러와 옆자리의 사람들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옆에서 그러든 말든 비광은 핸드폰에 정신이 뺏긴 상태였다.
보다 못한 딜러가 입을 열었다.
“손님! 카드 오픈하세요!”
“거참 시끄럽네.”
딜러에게 시선조차 안 준 비광이 들고 있던 카드를 오픈했다.
“!!”
“!!”
스페이드 A의 포카드.
자리에 앉은 그 누구보다 높은 패였다.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사람들에게 비광이 고개를 돌렸다.
“이번 판 무효로 해줄 테니까.”
싱긋.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비광.
“조용히 좀 해. 우리 신입 활약 좀 보게. 오케이?”
“오… 오케이!”
* * *
“쓰으읍… 하아!”
여기가 공항이란 곳이구만!
강남역에서 공항 리무진을 타고 도착한 인천공항.
공항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 뒤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가 밝은 얼굴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두근.
다들 왜 이렇게 밝은 얼굴인지 알 것 같았다.
그냥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가는 것뿐인데도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드르륵.
새로 장만한 캐리어를 끌고 신나게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일본까지 가야 된다는 사실에 생겨났던 귀차니즘.
공항에 도착하자 그 귀차니즘이 깨끗하게 씻겨 내려가 버렸다.
“좋구만, 좋아. 다 모르는 사람들 뿐이니 마음도 편하네.”
보기 싫은 인간들의 얼굴을 한 명씩 떠올렸다.
어딘가로 사라져버려 조금 불쌍하지만 재수 없는 김대석과 독사 그 자체인 최리아.
다시는 보지 맙시다.
영영 한국을 떠나는 건 아니었지만,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약소하게 기도를 올렸다.
자, 이제 산뜻하게 출발.
!!
호다닥!
어째서일까.
기도를 한 게 역효과가 난 걸까?
빼꼼 고개를 내밀어 내가 가야 하는 체크인 카운터를 바라봤다.
저 인간이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저… 저… 숭헌 것이 왜!
체크인을 해야 하는 카운터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조금 전 다시는 보지 말기를 바랐던 사람 중 한 명.
대산의 홍보 실장, 최리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