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음주 전투
비행기의 비상구 앞.
승무원 이다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봤다.
“저…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엄지를 치켜세웠다.
안 괜찮지만.
솔직히 기장실에서의 방송이 나온 후에도 한동안은 조용히 앉아있었다.
공중전이라니.
난 불가능이지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던 것.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기장실로 향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없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안 나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런.
시간은 흐르고 데몬은 점점 비행기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비행기 안의 승객들은 술렁임과 동시에 패닉에 빠지기 직전인 상황.
처음엔 데몬을 보고도 항공사 측에서 처리하겠지 하고 있었는데 기장의 방송 이후 위급 상황이란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생각해보자.
취기를 누르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공중전이야 수리검이 있으니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추락한다고 해도 수리검을 먼저 던져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
일단 이론상 공중전 가능.
조금 더 편한 방법 없나?
보니와 리드의 리볼버를 떠올렸지만.
내가 무기왕이요 광고할 게 아니라면 최대한 보류해야 했다.
또 쓴다고 해서 다 제거도 못 할 거고.
도번이 도시의 비둘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비행 속도가 무척이나 빠르다는 것이었다.
어딘가 발을 디디고 쏴야 하는 리볼버를 밖에 있는 녀석들이 그대로 다 맞아 줄 리가 없었다.
어차피 리볼버로 다 잡을 수 없다면 안 꺼내는 게 나아.
리볼버 사용을 보류한 뒤 수리검으로의 전투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던지고 비전하고 던지고 비전하고.
오케이.
역시 답은 수리검 뿐이었다.
마운티거의 전투에서 사용하긴 했지만 워낙 순식간에 집어 던지다 보니 수리검의 모습이 캠에 제대로 잡힌 적은 없었다.
특징이라 하면 비전하면서 생기는 금색 빛이었지만 영상 때와 달리 지금은 환한 대낮.
눈앞에서 비전을 하더라도 금빛을 알아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준비되셨나요?”
이다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음주 전투 관련한 처벌은 없겠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뒤에 있던 헌터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신호하시면 바로 당겨오겠습니다.”
사전에 연결해둔 실로 사람을 당길 수 있는 능력.
전투가 끝나면 바로 당겨달라고 미리 부탁해놨었다.
꼬옥.
다시 한번 헌터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꼭… 꼬옥! 잘 당겨 주셔야 합니다.”
다시 돌아오자고 이 무거운 수리검을 비행기로 던질 수도 없는 노릇.
누군가 당겨 주는 게 아니라면 되돌아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까지 비전으로 갈 순 없어!
아직도 약 사오십 분이 남은 상황.
꽤나 먼 거리를 계속 수리검을 던지며 나아갈 순 없었다.
분명 중간에 힘이 빠져 바다로 추락할 터.
끄덕.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자 이다혜가 비상구로 손을 뻗었다.
기내에 있는 승객들은 모두 안전벨트를 단단히 하고 있는 상황.
비상구 앞에 있는 사람들은 만약을 대비해 헌터의 실이 연결되어 있었다.
“열겠습니다.”
철컥.
후우우우우우우웅!!
비상구가 열리기 무섭게 엄청난 바람이 날 반겼다.
취소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문을 닫고 안락한 자리로 복귀하고 싶었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해 본 공중에서의 전투.
이론과 실전은 천지 차이라고 했던가.
막상 엄청난 바람을 느끼고 있자니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기권 좀 하겠….
“조심하셔야 합니다!”
“비행기에 탄 이백 명의 승객들과 승무원들이 응원하고 있습니다!”
기권하겠다 하면 얼마나 실망할지 감도 안 왔다.
펄럭 펄럭.
열심히 날개를 휘저으며 다가오고 있는 도번들.
비둘기 쉨.
왜 하필 이번 비행기에 나타나 나의 꿀 같은 퍼스트 클래스 여정을 망친단 말인가.
스윽.
고개를 돌려 실로 연결되어 있는 헌터를 바라봤다.
끄덕.
난 당신을 믿는다는 메세지를 눈빛으로 보낸 뒤 다시 도번으로 눈을 돌렸다.
이왕 가는 거 멋진 포즈와 대사를 하며 가볼 생각이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러 가는 영웅의 표정을 지은 뒤.
비장하게 첫 발자국을 내디뎠….
삐끗.
응?
“어…?”
이래서 뭘 하든 음주는 위험하다.
첫 발자국을 뻗기 무섭게 발을 헛디뎌버리다니.
그리고 지금 발을 헛디뎠다는 건.
“끄아아아아아!”
몸이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 * *
“끄아아아아아!”
비장한 얼굴로 비상구를 나서던 백운.
백운이 첫 발자국에 헛디디면서 아래로 추락해버렸다.
“다… 당기세요!”
다급해진 이다혜가 실을 연결한 헌터를 바라봤지만.
“안 당겨져요! 너무 멀어졌어요!”
헌터 이재훈의 능력엔 사정거리가 존재했다.
사정거리 안에는 있어야 당길 수 있는데 준비도 하기 전에 너무 갑작스럽게 떨어져 버렸다.
“아아….”
이다혜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처음부터 불안했었다.
짧은 시간에 양주를 두 병이나 들이키고 싸우러 나가겠다니.
다른 방도가 없어 비상구를 열긴 했지만 끝까지 말렸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비상 착륙을 시도했어야 했는데.”
만 미터 상공에서 떨어져 확정형 죽음을 맞이해버린 백운.
싸움을 택한 건 너무 무모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펄럭!
어느새 도번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잠시 후면 창을 앞세우고 비행기를 향해 돌진할 기세였다.
“다혜 님, 일단 문을!”
이재훈의 말에 이다혜가 입술을 깨물며 손을 뻗었다.
후회해도 늦은 상황이었다.
지금은 비상구를 닫고 기장실로 가 상황을 알려야 했다.
‘백운 님, 죄송합니다.’
말리지 않았다는 죄책감을 느끼며 비상구를 닫으려는 찰나.
콰득!
“?”
순식간에 지나간 무언가에 의해 도번 한 마리가 사라져 버렸다.
“바… 방금 뭐가…?”
콰득!
생각할 새도 없이 이번엔 위에서 거대한 수리검이 날아들었다.
얼마나 강한 위력을 가진 건지 사람보다 두 배는 큰 도번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꾸륵…!?”
당황한 건 이다혜와 이재훈만이 아니었다.
여유롭게 비행기로 다가오던 도번들도 뜻밖의 상황에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기 힘든 정도의 속도였다.
콰직!
다시 한번 아래에서 날아든 수리검에 도번 한 마리가 삭제당하고.
“야이 비둘기 새끼야아!”
어떻게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 아래로 추락했던 백운.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백운이 거대한 수리검을 들고 도번의 머리를 내리찍고 있었다.
* * *
콰직.
“꾸르륵.”
머리를 부순 도번의 몸에 발을 디뎠다.
와 존나 무섭다.
취기에 발을 헛디뎌 추락한 순간.
아 이렇게 죽는구나.
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정신줄 안 잡았으면 진짜 죽을 뻔했네.
점점 멀어져 가는 비행기를 보며 이렇게 가는구나 생각이 든 찰나.
정신을 차리고 수리검을 꺼내 위로 냅다 집어 던졌다.
끄덕.
도번 위에 선 잠시의 틈을 이용해 비상구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전 괜찮습니다, 여러분.
잠시 본 표정을 봤을 땐 이미 날 포기한 모양이었다.
이다혜의 손 위치를 봤을 때 비상구를 닫으려고 한 듯했다.
절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문 닫으시면 안 돼요.
눈빛으로 많은 말을 전달한 후.
“꾸르르르!!”
퍼덕이며 위에서 날아드는 도번들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모습조차 못 본 비둘기 자식들.
잠시 모습을 보여줬다고 달려드는 꼴이라니.
마치 설사약이 든 빵 부스러기를 향해 달려드는 비둘기 녀석들 같구나.
그렇다고 내가 설사약인 건 아니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휘이이이이!!
아래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바람이 느껴졌다.
하루 만에 또 이런 바람을 느끼게 되다니.
절레.
인생에 바람 질 날이 없다고 하더니.
진짜 쉬지 않고 바람을 만나고 있었다.
스윽.
아래쪽으로 쇄도하고 있는 도번 무리를 향해 수리검을 집어 던졌다.
제아무리 사람보다 두 배 큰 덩치였지만 수리검의 무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콰득!!
수리검의 속도를 조금도 지체시키지 못한 채 그대로 함께 날아 가버리는 도번.
동족이 죽어서인지 남은 도번들이 눈깔을 뒤집은 채 빠르게 하강하고 있었다.
역시 새대가리야.
조금 전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배우는 게 없는 쉨들이었다.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내가 반복하고 있는 공격이었다.
밑으로 열심히 내려와 봐야 의미 없는 짓.
“꾸르르르륵!!!!”
엄청난 울음소리를 내며 도번들이 창을 치켜들었다.
우매한 놈들.
시야에서 수리검을 놓치지 않으며 나도 도번을 향해 무언가를 치켜 들어줬다.
엿 드시고.
시원하게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준 후.
얄미운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계시고.
[비전]
* * *
“당겨요오오오오!!”
도번을 다 정리한 후.
비상구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 뒤 이재훈을 향해 소리 질렀다.
팽팽!
이재훈이 손을 뻗기 무섭게 무언가 내 몸을 당기기 시작했다.
오… 좋은데.
그대로 당겨져 가 비상구로 몸이 골인되었다.
쿵!
“끄어.”
당기는 속도에 조절은 불가능한 건지 그대로 비행기 벽에 머리를 박아버렸다.
도번을 죽일 때도 멀쩡했던 머리가 깨지는 느낌이었다.
데굴데굴.
그렇게 몇 바퀴를 굴러다닌 후.
왠지 모르게 조용한 주변에 눈을 떠보았다.
“….”
어느새 닫힌 비상구.
비상구 주변으로 퍼스트 클래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몰려 나와 있었다.
동물원의 물개가 이런 느낌이었나.
멍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는 여러 명의 사람들.
아.
그 중엔 아는 얼굴들이 섞여 있었다.
술 취한 상태로 도번 잡는다고 잠시 잊고 있었다.
“배… 백운 님?”
* * *
비행기 내부의 의료실.
앞에 앉은 치유계 능력자가 혹이 난 이마에 손을 얹었다.
“정말 깜짝 놀랐네요.”
여전히 토끼 같은 눈을 가진 찹쌀떡.
굳이 의료실까지 따라온 전수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해외여행 가시는 거라구요?”
“하하. 네.”
전수희의 눈에 엄청난 불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긴 어제까지만 해도 곡성에서 마운티거 잡고 있었는데.
뜬금 해외여행이라니 의심할 만했다.
“그래도 백운 님 덕분에 아무 일도 없이 끝났네요. 대산의 경호 헌터들도 있었지만 공중전이 가능한 인원은 없었거든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어요.”
경호원이라니.
어디로 가길래 경호원이 따라다니는 건가 의문이 생겼다.
“수희 님은 어디 가시는 거예요? 그 독… 아니, 실장님이랑.”
“일본의 높은 분과 회담이 있어서요. 실장님이 대산 측 대표 대리인으로 참가하게 됐어요.”
대… 대표 대리?!
역시 독하게 살아야 하나보다.
실장이 대표를 대리해서 외국으로 가고 있다니.
소피아 님은 공식석상에 안 나선다고 했었지.
소피아는 어지간히도 최리아를 믿는 모양이었다.
저번 토벌전에선 나 때문에 제대로 물을 먹긴 했지만, 최리아는 객관적으로 봐도 일을 잘하는 타입이긴 했다.
“그런데 보통 경호원들이 함께 가나요? 일본이면 해외여행으로도 편하게 가는 곳이잖아요.”
“음….”
내 질문에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전수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보가 들어왔거든요.”
“정보요?”
전수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회담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누군가가… 공격해 올 거라는 정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