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스이카의 주인
이제 낯설지도 않구만.
빛에 손을 대는 순간 옮겨지는 공간.
몇 번 겪어봤다고 이젠 적응이 좀 되는 느낌이다.
자리에 서 주변을 둘러봤다.
옮겨질 때마다 워낙 특색이 있어 처음 도착하면 둘러보는 게 습관이 됐다.
전쟁… 터인가.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주인 없는 무기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분위기 봐라.
스산한 바람과 일몰의 옅은 햇빛이 주인 없는 무기를 비추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귀신님은 어디에 계시지.
고개를 휙휙 돌려봐도 기억에서 봤던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비쥬얼만 봤을 땐 귀신도 울고 갈 느낌이었는데.
진짜 귀신은 아니겠….
“날 찾는 건가?”
“기에엑!”
쿵.
바로 귓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렸을 때부터 깜짝깜짝 놀래키는 거엔 몹시 나약한 나였다.
“거 좀!”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좀 일반적이게 나오면 안 되냐고 따지려고 했는데.
“….”
무심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남자.
기억에서 봤던 백발이었다.
바람에 흩날리기까지 하니 전에 봤던 것 보다 훨씬 음산한 느낌이었다.
조용히 있어야겠다.
깨갱하며 아무 말 않는 남자를 살폈다.
의외네.
기억에서 미카이의 시점으로 봤을 땐 긴 백발을 제외하곤 생김새를 잘 보지 못했었는데.
귀신과는 거리가 몹시 먼 생김새였다.
시원시원하게 뻗은 찐한 눈썹과 날카로운 코까지.
귀신형보다는 미남형에 훨씬 가까운 얼굴이었다.
오.
특히 눈이 놀라웠다.
워낙 많은 피를 뿌렸다보니 엄청 차갑고 무미건조한 눈일 거라 생각했는데.
정반대였다.
왠지 모르게 따뜻하고 장난기가 가득한 선한 눈이었다.
“옛날부터 잘 생겼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으니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
무심한 듯 건네는 농담까지.
농담의 내용이 좀 재수 없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니 넘어가 주자.
스윽.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차고 있는 스이카에 손을 얹었다.
움찔.
미카이의 기억으로 한 차례 봐서인지 손을 얹는 동작만으로도 몸이 움찔거렸다.
“통성명은 나중에 하고.”
고개를 든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일단 저것들부터 같이 처리 좀 하지.”
저것들?
남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허.
분명 버려진 무기들만이 가득했던 땅이었는데.
어느새 그 땅 위엔 무기의 주인으로 보이는 것들이 잔뜩 나타나 있었다.
해골… 아니지, 좀비인가.
인간이라 부르기엔 힘든 모양새였다.
해골이라 하기엔 살점이 남아있고, 사람이라고 하기엔 몸 여기저기가 너무 떨어져 나가 있었다.
“저건 뭐죠?”
익숙한 듯한 표정을 보니 남자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뭐… 망령 정도로 부를 수 있겠군.”
망령이라, 나쁘지 않은 호칭이다.
그나저나 조금 전까진 없었는데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걸까.
“몇천… 아니지. 몇만은 될 거 같은데 갑자기 왜 나타난 거죠?”
“내가 나타났으니까.”
“?”
그러고 보니 같은 타이밍이었다.
귀신이라도 끌고 다니는 피리 부는 사나이인 걸까.
“내가 죽인 자들이다.”
“….”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니라 그냥 많이 죽인 사람이었구먼.
“동기는 충분하네요.”
크어어어어---!
꽂혀있던 각자의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망령들.
살해당했으니 저건 달려들어도 무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쨌든.
공간에서는 아무런 제약도 없으니.
[잭 더 리퍼 - 동기화]
“호오…?”
몸이 시뻘겋게 물들어가자 남자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살인마 같구나.”
뜨끔.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나도 모르게 뜨끔하고 말았다.
“예리하시네요.”
점점 시야를 침투해오는 핏빛에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스으으!”
달려드는 망령들을 향해 면도칼을 휘둘러갔다.
뭔가 혈관 같은 게 없는 듯 했지만 풍화되어서인지 칼이 닿기 무섭게 뼈가 우수수 부서져 나갔다.
그냥 비늘이나 리볼버로 쓸어버릴 걸 그랬나.
무기를 바꿀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우웅.
익숙한 기운과 함께 발밑으로 푸른 원의 경계가 그려졌다.
응?
날 충분히 포함 시키고도 남아 더 앞으로 뻗어 나가는 경계.
불길한 기운에 남자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 저기요.”
철컥.
오른발을 한 발 뒤로 빼며 자세를 낮추는 백발의 남자.
남자의 손은 스이카의 손잡이에 얹어져 있었다.
“저… 여기 안에 있거든요.”
부정할 수 없는 발도의 자세였다.
경계 안에 있던 모든 걸 베어버렸던 발도.
심지어 보이지도 않아 피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스으으,”
“아니 잠깐만, 호흡하지 말고.”
진짜 휘두를 것 같은 남자에 경계를 벗어나려는 순간.
끼아아아아아아악-----!!
남자의 검집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 *
후웅! 후웅!
한 소년이 열심히 목도를 휘두르고 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간이 날 때마다 목도를 휘두르는 소년.
목도를 쥐고 있는 소년의 양손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윽!”
목도를 놓친 소년이 왼손을 움켜쥐었다.
너무 많이 휘둘러 살갗이 몽땅 벗겨져 있는 왼손.
왼손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
잠시 피가 흐르는 손을 바라보고 있던 소년이 놓쳤던 목도를 집어 들었다.
후웅!
입술을 깨문 소년이 계속해서 목도를 휘둘렀다.
양손에서 미칠 듯한 고통이 올라왔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았다.
‘쉴 시간 따윈 없다.’
후웅!
‘귀신처럼 강해져서!’
후웅!
‘세상에 내 이름을 알려주마!’
소년에겐 꿈이 있었다.
* * *
10년 뒤.
“죽여라!”
“이 괴물 자식!”
달려드는 괴한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끼아아아아아악---!
남자의 검집에서 터져 나오는 소름 끼치는 비명.
나라의 최고 대장장이가 남자를 위해 만들어 준 검, 스이카였다.
투둑.
기세 좋게 달려들던 괴한들의 머리가 땅바닥을 뒹굴었다.
“으… 으아아! 귀신이다!!”
간신히 검의 범위 밖에 있어 살아남은 괴한이 산 아래로 도망쳤다.
굳이 쫓지 않으며 그런 괴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백발의 남자.
“하.”
귀신이란 호칭에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심한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수련을 해서일까.
언젠가부터 하얗게 세어버리고만 머리.
“귀신처럼 강해지기는 했는데.”
남자는 10년 전의 바람처럼 엄청난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그저 귀신처럼 강해지고 싶다는 의미였는데.
실제로 귀신이 사용할 것 같은 기술에만 특화된 무사가 되어버렸다.
“진짜 귀신이 되어버렸군.”
슥.
고개를 내린 남자가 들고 있는 검을 바라봤다.
사람의 핏줄이 퍼져 있는 듯한 검의 생김새.
그 대장장이를 만난 건 정말 우연이었다.
남자의 검술을 보더니 영감이 떠올랐다며 검을 하나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귀신의 검.’
세간에서 스이카를 두고 부르는 이름이었다.
생김새도 생김새였지만 검집에서 뽑는 순간의 소리가 가장 큰 이유였다.
남자가 가장 많은 재능을 가지고 개량한 기술은 발도.
발도 속도만으로는 세상 그 누구도 남자를 따라갈 수 없었다.
‘검집이라도 바꿔야 하나.’
특이한 검과 검집의 모양 때문에 스이카는 검집에서 나오는 순간 귀신 울음소리를 냈다.
원래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였지만 여기에 남자의 순속급 발도가 더해지니 귀를 째는 비명소리가 된 것이었다.
“하아.”
앞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머리를 보자니 한숨이 나왔다.
시체를 봐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다른 이의 죽음에 무뎌져 버렸다.
그만큼 베고 베고 또 베며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내 이름을 아는 이가… 한 명은 있을까?’
10년 전의 바람처럼 강해졌지만.
10년 전의 꿈은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세상 모두에게 이름을 알리는 것.
닥치는 대로 베어 넘기면 저절로 이름이 떨쳐질 거라 생각했는데.
남자의 이름을 아는 이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 입 닥쳐! 이 귀신아!
- 이 괴물새끼!!
- 죽어라 이 귀신아!
가서 이름을 알리라고 일부러 살려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퍼지는 건 남자의 이름이 아닌 백발의 귀신이란 이명 뿐이었다.
‘기가 차네.’
이쯤 되니 억울하기보단 허탈함이 느껴졌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꿈에서 멀어지는 꼴이라니.
이렇게 아이러니한 일이 또 있을까.
투두둑.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공허함을 함께 슬퍼해주려는 듯한 비였다.
‘이름을 귀신이라고 개명해야 되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시원한 비를 맞이했다.
얼굴과 몸에 묻은 피를 씻으며 내려가는 참으로 상쾌한 비였다.
그렇게 남자가 비를 즐기고 있을 때.
찰박.
“응…?”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남자가 있는 곳은 깊은 산골짜기.
거기에 비까지 이렇게 오는데 누군 걸까?
“누구냐?”
고개를 돌린 곳.
그곳에 서 있는 건 한 명이 아니었다.
말을 탄 최소 수백의 병력이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 때문에 못 들은 건가.’
잠시 응시하고 있자 병력의 중앙에서 귀한 집안 자제처럼 생긴 남자가 등장했다.
병력이 길을 터주는 걸로 보아 무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 듯했다.
“안녕하십니까, 제 이름은 히라이 테즈카.”
예의 바르게 자기소개를 한 테즈카가 고개를 숙였다.
“이 산에 귀신의 검을 다루는 자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테즈카가 남자의 발밑에서 굴러다니는 몇 개의 머리를 응시했다.
“당신인 것 같군요. 그 귀신이.”
귀신이란 단어에 남자가 혀를 찼다.
‘쯧, 이놈이나 저놈이나.’
“가라. 오늘은 더 안 죽이고 싶으니까.”
손을 휘휘 저으며 남자가 몸을 돌렸다.
비까지 와서인지 오늘따라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그 검, 절 위해서 휘두르지 않겠습니까?”
“뭐?”
걸음을 멈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란 말인가.
얼굴에 비웃음을 머금은 남자가 테즈카를 응시했다.
“어디 부잣집 도련님이 심심해서 찾아온 거 같은데…. 난 그런 장난에 어울려 줄 생각 없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가라.”
마지막 경고를 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훨씬 차가워져 있었다.
“장난이 아니라면요?”
“…?”
멈춰있던 테즈카가 남자를 향해 발자국을 내디뎠다.
“테즈카님!”
그런 테즈카를 말리려는 병사에,
슥.
테즈카가 물러나라는 듯 손을 들었다.
저벅 저벅 저벅.
바로 앞까지 다가온 테즈카에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귀신인 줄 알면서도 당당하게 다가오다니.
배짱 하나는 인정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소개하죠. 제 이름은 히라이 테즈카. 히메지 성의 주인입니다.”
“!”
스윽.
테즈카가 남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전 성주로 생을 끝낼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 세상에 칼을 들이댈 예정입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
테즈카를 응시하던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와 함께 간다면, 난 뭐를 얻을 수 있지?”
부와 권력 따위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었다.
남자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뿐이었다.
“역사에 이름을 새겨드리죠.”
“!!”
“역사에 새겨진 당신의 이름은 이번 세대를 넘어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 다음 다음 세대까지. 영원히 전해질 겁니다.”
두근.
남자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테즈카를 응시하던 남자가 천천히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다.
“좋다, 그대의 적. 내가 모조리 베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