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문의 열쇠
퍽! 쾅! 푸찍!
시무의 뿔을 따라 얼마나 이동했을까.
누가 지들 서식지 아니랄까 봐 몇 발자국 갈 때마다 우덴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대체 이 동굴에 얼마나 있는 거야.
어느 정도는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등장 중인 우덴의 숫자는 그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주섬주섬.
우덴을 잡을 때마다 무언가를 가방에 챙기는 히리의 일행들.
우덴마다 딱 하나씩만 달려있다는 잎사귀였다.
약으로 쓰인다더니 잘 줍네.
골방에 처박혀 봤던 데몬에 관련된 책.
그곳에서 가장 재밌는 카테고리는 데몬 별 획득 가능한 물품이었다.
책 출판 당시의 물품 가격까지 나와 있다 보니 보는 재미가 쏠쏠했던 것.
- 돈이 필요한 초급 헌터라면 우덴 잎사귀 모으기를 추천합니다.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책답게 초급 헌터를 위한 목차도 있었다.
초급 헌터로 살아남는 법부터 중급 헌터로 나아가기 위해선 어떤 장비와 자격을 갖춰야 하는지 등을 써놓은 목차였다.
초급으론 안 보이는데 돈 되는 건 다 줍나 보네.
이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히리를 제외한 전원이 전방에 나서 우덴을 잡고 있었다.
방패를 든 인원이 전방에서 적을 막았고 그 뒤에서 나머지가 무기를 찔러 넣고 있는 모양새.
개개인이 강하거나 화려한 전투는 아니지만 합이 잘 맞는 걸 보니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듯했다.
그나저나 겁나 편하네.
우덴이 나타났을 때의 내 위치는 전방이 아니었다.
비전투 인원답게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는 히리.
내 자리는 그런 히리의 옆이었다.
기대감이 없다는 건 이럴 때 참 좋아.
가만히 서 있어도 알아서 데몬을 잡아주다니.
옛날 게임처럼 쩔을 받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쩌억!
앞에서 튀어나온 우덴을 마무리하는 사이.
동굴 곳곳에 뻗어있는 넝쿨을 바라봤다.
으음… 넝쿨 아닌 거 같은데.
동굴의 입구서부터 뻗어있던 넝쿨.
조금 깊게 들어오니 살짝 굵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몹시 얇아 넝쿨로 보이지만 왠지 모르게 나무의 줄기 같은 모양새.
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많은 수의 우덴까지.
이거 우덴킹 각… 아니겠지.
초급 헌터를 위한 가이드에도 쓰여 있었다.
우덴 잎사귀를 모으는 걸 추천은 하되 이와 비슷한 낌새가 있으면 도망쳐 나와야 한단 말이었다.
첫째는 우덴이 비정상적으로 많은 장소였다.
어미 곰이 있는 곳에 새끼 곰이 출몰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였다.
우덴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우덴킹이 있는 건 아니지만, 비정상적으로 개체 수가 많은 곳은 우덴킹이 함께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우덴킹의 줄기가 뻗어있는 곳.
물론 이건 파악하기 힘든 요소였다.
우덴킹의 줄기는 땅 밑으로 뻗어있기에 땅을 파보지 않는 이상 알기 힘들었다.
우덴이 많이 나오는 건 첫 번째와 일치하지만.
만지작.
동굴에 뻗어있는 넝쿨을 우덴킹의 줄기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여러 도감을 읽었어도 우덴킹의 줄기가 땅 아래가 아닌 벽을 타고 뻗어있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우덴킹이 나오면 조금 애매하긴 한데.
우덴킹이라고 해서 우덴과 별다른 공격을 하는 건 아니지만.
한 번에 쏘아내는 줄기가 너무 많았다.
우덴이 하나를 뻗는다면 우덴킹은 수십 개를 쏘아대니까.
거기다 미친 재생력이 문제였다.
뿌리까지 싸그리 태우지 않는 이상 잘려도 잘려도 줄기를 계속 재생해댔다.
항상 느끼지만 불 지를 수 있는 무기가 하나 필요하단 말이야.
마운티거 때도 어찌어찌 휘발유랑 가스통으로 불을 만들어 내긴 했지만.
언제까지 외부적인 우연에 기댈 순 없었다.
당장 지금만 해도 딱히 강한 공격을 하지 않는 우덴킹이 나올까 우려되는 건 불이 없어서였다.
불만 스스로 지를 수 있으면 우덴킹 백 마리가 나와도 안 무서울 텐데.
나무 따위에 무기력한 스스로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반짝.
응?
시무의 뿔 방향이 변경되었다.
“…?”
당황한 건 히리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길이 아닌 막다른 길을 가리키고 있는 뿔.
“지금 벽을 가리키는 건가요?”
“…?”
나한테 묻는 히리에 눈을 크게 떠보았다.
내가 어떻게 알아 이것아.
메세지가 제대로 전달된 건지 잠시 고민하던 히리가 입을 열었다.
“벽을 뚫죠.”
뭘 뚫어…?
내 의아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뭘 저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왔나 했는데.
가방 속에서 속속 출몰하는 다이너마이트와 기폭 장치들.
“저거 터뜨린다고요?”
“어쩔 수 있나요? 길이 막혔잖아요.”
잠시 두리번거리다 입을 열었다.
“좀 더 돌아서 가보죠.”
원래라면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든 머리 위로 수류탄을 뿌리든 별 상관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쎄했다.
옆에 뻗어있는 게 넝쿨이 아니라 우덴킹일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아무리 우덴킹이 줄기를 땅 밑으로만 뻗는다지만.
동굴의 시작보다 넝쿨은 두꺼워져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조금 더 들어가면서 줄기인지 넝쿨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히리에게 뻗어있는 넝쿨을 가리켰다.
“이거 처음보다 더 두꺼워진 거 같지 않아요? 조금 더 들어가면서 확인해보….”
툭!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날 툭 밀치더니 벽으로 걸어가는 히리의 일행들.
“뒤에서 편하게 있으니까 싸우는 게 쉬운 일로 보이시나 보네.”
“돌아서 가면 얼마나 더 많은 우덴과 싸워야 하는데… 하.”
“우덴킹의 뿌리는 땅 아래로만 뻗는다. 초급 헌터 상식인데 모르세요?”
이 새끼야 너네보다 10년은 더 일찍 알았다.
어느 정도 깊숙이 들어와서일까.
히리의 일행들은 조금씩이지만 이빨을 보이고 있었다.
엔간히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의견 한 번 제시했을 뿐인데 저러다니.
시무를 안 돌려준 것부터 뒤에서 놀고 있는 꼬라지까지.
하나같이 전부 눈엣가시인 모양이다.
“그… 그러세요.”
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흠 안되겠지…?
잠시지만 지금 호다닥 처리해버리고 시무랑 둘이 계속 갈까 했지만.
애매한 상황이었다.
아직 내게 완전히 칼을 들이댄 것도 아니었고, 이놈들이 시무에게서 무얼 본 건지 역시 알지 못했다.
만약 이게 넝쿨이 아니라 우덴킹의 줄기라면?
고개를 돌려 동굴의 크기를 가늠했다.
이런 좁은 곳에서 줄기들이 날아드니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수리검으로 째야지.
당장 불이 없으니 최후의 수단이었다.
철컥.
나만의 탈출 루트를 정리하는 것도 잠시.
도굴단인가.
많이 해본 솜씨였다.
순식간에 벽면 여기저기에 다이너마이트와 기폭 장치를 연결한 후 뒤로 걸어 나오는 숙련된 모습.
“좀 물러나죠.”
히리를 따라 벽면 뒤에 바싹 엎드린 뒤 시무를 감쌌다.
부디.
“폭파.”
우덴킹이 안 나오기를.
딸깍.
* * *
이런 시발.
불운의 아이콘인 걸까.
퓩 퓩 푹 퓩.
뒤에서 무서운 속도로 따라오고 있는 나무 줄기들.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항상 현실이 되는 걸까.
“달려!!”
뒤에서 쫓아오는 줄기들에 뒤져라 달리는 히리와 일행들.
사사사삭!
더 최악인 건 우덴킹의 명령 때문인지 엄청난 수의 우덴까지 따라붙었다는 것이다.
벽이 뚫리며 길이 나왔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둘러싸였을 터였다.
“끄앙!”
덜컹거리는 속에서도 날 꼭 잡고 있는 시무.
우리 시무는 직선 길밖에 모르는구나.
대충 뛰며 주변을 둘러보니 돌아왔어도 충분히 올 수 있는 장소였다.
귀여우니까 됐어.
체념하며 열심히 발을 놀렸다.
물론, 히리와의 속도는 맞추면서 말이다.
다른 놈들도 꿈뻑 죽는 거 보니 애가 브레인이야.
그래서 옆을 지키며 달리고 있었다.
시무의 무언가를 보고 판단을 내린 것 역시 히리일 터.
다른 애들은 버리더라도 히리는 데려가야 했다.
그나저나 이건 또 왜 안 움직여, 불안하게.
고개를 돌려 여전히 벽면에 달라붙어 있는 줄기를 바라봤다.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줄기와 같은 놈이었다면 뒤에서 쫓아올 필요 없이 벽면에 있는 줄기가 우릴 덮쳤을 것이다.
그런데도 벽면에 있는 줄기는 여전히 고요한 상태였다.
마치 뒤에서 쫓는 녀석과는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
다다다다다.
그렇게 우덴킹의 공격을 피해 달리기를 한참.
허.
눈앞에 문이 나타났다.
* * *
아주 작은 틈새였다.
틈새로는 대충 봐도 지금 있는 동굴과는 아예 다른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꾸드득…!!
그리고 그 작은 틈새를 억지로 비집고 있는 수많은 줄기들.
동굴 벽면을 타고 들어온 줄기들이 온통 저기에 꽂혀 있는 듯했다.
허허.
뒤에서 쫓아오는 것과 문을 비집고 있는 줄기.
두 마리네, 시벌.
우덴킹이 두 마리나 있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거기다 뒤에서 우글거리며 쫓아오는 우덴까지.
도망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
“끄아앙!”
문제는 찾은 문을 어떻게 해야 하냐는 것이었다.
문을 향해 소리만 질러대는 시무.
우덴킹이 비집고 있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문은 닫혀 있는 상태였다.
열려면 뭐라도 해야될 거 같은데.
대체 저 문은 어디로 향하는 문이며 어떻게 해야 들어갈….
후다닥!!
히리가 갑자기 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히… 히리 님?”
쐐에에엑.
잠시 불러봤지만 돌아온 건 히리의 대답이 아니었다.
뒤에서 목으로 날아드는 곡도와 단검.
찾을 거 찾았다는 건가.
이로써 이놈들이 찾고 있던 게 저 문이란 건 확실해졌다.
그럼 이제 뭘로 여냐는 건데.
삭!
무기를 꺼낼 필요도 없었다.
몸을 숙여 뒤에서 날아든 무기를 피한 후 뒤를 돌아봤다.
독한 새끼들이네.
세 명은 필사적으로 우덴킹의 공격과 몰려드는 우덴을 막고 있는 상황.
급박한 상황임에도 두 놈은 동료들을 도와주기보단 날 처리하러 온 것이었다.
빠악! 빡!
“끄악!”
발로 두 놈을 밀쳐낸 후.
[비전 수리검]
후웅…!
벌어져 있는 문 옆의 줄기로 수리검을 던졌다.
쾅!
히리의 옆을 지나 굉음과 함께 줄기에 깊숙이 박혀 든 수리검.
슥.
수리검이 자신을 지나쳐가자 달려가던 히리가 고개를 돌렸다.
피식!
저… 저년이…?
아마 자기를 맞추려다 못 맞췄다 생각하는 듯했다.
“이 새끼가!”
“가만히 안 있어!?”
밀려났다 다시 달려드는 두 녀석.
“너넨 좀.”
짜아악!! 짜아악!!
“꺼져!”
수리검으로 업그레이드된 힘.
온 힘을 다해 뺨따기를 올려 붙여줬다.
“꺽…!”
쿵.
감당하기 힘든 힘에 잠시지만 두 놈의 몸이 붕 떠 나가떨어졌다.
다다다닥!
일부러 소리를 내며 히리를 쫓아갔다.
경찰과 도둑을 할 때 쫓기는 도둑 심정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
달리던 중 뒤를 돌아보는 히리.
탁!
“악!”
내가 신경 쓰인 건지 달리던 히리가 돌부리에 넘어지며 손에 쥐고 있던 걸 놓쳤다.
팅!
바닥에 튕겨 저 멀리 날아가 버리는 희한한 생김새의 목걸이 열쇠.
삭!
방향을 틀어 열쇠를 향해 달려갔다.
눈은 히리에게 고정시킨 채 말이다.
슥.
내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당황하는 척하던 히리가 몸을 일으켰다.
저 저 여우 같은 년 저거.
고럼 고렇지.
- 제 능력은….
내 경계를 누그러뜨리겠다고 시무의 뿔을 감출 수 있는 능력을 말해줬던 히리.
그때의 히리가 무슨 생각일지 알 것 같았다.
어차피 10급 헌터따리니 문에 도달한 순간 일행들이 제거할 거라 확신한 것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솔직하게 오픈해도 충분하다는 오만감으로 말이다.
슥.
문 앞에 거의 도달한 히리가 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조금 전은 훼이크, 저게 진짜다.
자신의 예상과 달리 일행이 정리당하고 내가 쫓자 꾀를 낸 것.
넘어지는 척하며 흘린 건 가짜였다.
실체를 본 적이 없다면 히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 왜곡 능력.
쉽게 흘릴 때부터 예상했다, 이것아.
진짜 열쇠를 꺼내든 히리가 문을 향해 마지막 몇 발자국을 남겨두고 있었다.
[비전]
히리가 마지막 두어 발자국을 남겨둔 순간.
콰득.
“끄악!”
수리검으로 이동해 히리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이거 문 들어가자고 사람을 죽이려 들다니.
스윽.
히리가 꼭 쥐고 있는 열쇠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내, 이년아.”
영어로 인터셉트.
한글로는 약탈.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