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요정인가
사사사악.
조심스럽게 올라가던 나무에서 내려왔다.
첫인상이 나무에 달라붙어 올라가는 모습이라니.
“….”
조용히 돌아온 시무를 반기며 날 바라보고 있는 존재들.
모두가 시무와 같은 생김새였다.
다른 게 있다면 크기가 훨씬 크다는 것.
시무가 아기 냥이었다면 눈앞에 나타난 이들은 킹냥이었다.
뭐라고 해야 되지.
시무를 만났을 땐 야옹 소리를 내봤지만.
지금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왠지 모르게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박.
!!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킹냥이 A.
가장 앞에 나와 있는 걸 보니 무리를 이끄는 대장 같았다.
“긴장하지 않아도 된당.”
갑작스러운 등장에 조금 당황했을 뿐 긴장하고 있진 않았는데.
긴장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순간 몸이 빳빳해질 정도로 긴장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마… 말했다.
킹냥이가 말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내가 야옹거리며 말을 안 건네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옹야옹하며 말을 걸었었다면 긴장과 별개로 수치사 각이었다.
“인간의 말을 하는 게 신기하냥?”
“으… 응.”
말투만 보면 킹냥이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반말이 나갔다.
“우린 인간의 언어가 생겼을 때 부터 알고 있었으니 신기해할 필요 없당.”
다가온 킹냥A가 나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와우.
계속해서 스미레 할머니의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맑고 푸르며 밤하늘을 담아 놓은 듯한 눈동자.
그 눈동자가 바로 앞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좀 성장해야 가질 수 있나 보네.
대충 보니 시무 같은 작은 덩치의 냥이들은 검은색 눈동자였다.
“우리는 페샨. 이곳에서 살아가는 종족이당.”
데몬… 이 아니구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데몬이란 단어는 인간이 만들어 붙인 이름이니까.
“내 이름은 리카르도, 편하게 불러도 된당.”
생긴 건 킹냥인데 이름은 무슨 콜롬비아 카르텔 이름이네.
머릿속으로 의문을 품으며 입을 열었다.
“전 백운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존댓말로 이름을 말하자 리카르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반말이 거슬렸던 게 분명해.
“오랜만에 만나는 인간이구낭.”
“오랜만이라면… 이전에도 만난 적이 있는 건가요?”
“만난 것 뿐만이 아니당. 오래전엔 우리도 인간과 함께 살았었당.”
함께 살았었다니.
내가 알고 있는 알량한 지식이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너무 우물 안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이 세계엔 내가 알지 못하는 게 얼마나 많이 있는 걸까.
“사람들은 당신들을 뭐라고 불렀나요?”
페샨이란 건 알았지만 이들과 함께했던 사람들은 뭐라고 불렀는지가 궁금했다.
보통 그렇게 불린 명칭이 기록에 남기 때문이었다.
“많은 이름으로 불렸당. 어느 시대엔 신령, 어느 시대엔 요정, 어느 시대엔 요괴, 지금은….”
“데몬.”
내 대답에 리카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해지면 똑똑해질수록 인간은 자신 외의 존재들을 부정했당. 그래서 우리도 더불어 사는 것을 멈추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 거당.”
“존재들이라 하면, 페샨 같은 존재들이 또 있다는 건가요?”
리카르도가 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신이라던가 요정 같은 존재가 아니당. 그저 수많은 종족 중 하나일 뿐이당. 다들 각자의 세계에 살고 있으니 인간이 인지하지 못할 뿐이당.”
인간 외의 존재들이 많고 각자의 세계가 있다니.
리카르도의 설명을 듣자 묘한 간질거림이 올라왔다.
지구가 전부가 아니구나.
세계 여행이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살아오던 환경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 그곳만의 문화와 새로운 사람, 새로운 경험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른 세계가 있다니.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끄앙!”
잠시 멍해 있는 사이 아장아장 걸어온 시무가 머리를 비볐다.
시무의 등 뒤로 미니 붕대가 보였다.
호다닥.
고개를 돌려 리카르도를 응시했다.
“제가 한 거 아닙니다.”
“방금 들었당. 네가 아이를 구해준 건 알고 있당.”
휴.
괜한 오해를 살 일은 없을 듯하다.
“한눈을 판 사이 아이가 사라져 버렸당.”
사라져도 어차피 공간 안에 있을 거라 안심했다는 리카르도.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시무는 없었고 잠시 후 한쪽에 벌어진 균열을 발견했다고 한다.
“원래 인간 세계로 향하는 문이 있던 위치였당. 열쇠로 잠궈놨는데 아이가 열고 나가버렸당.”
“끄앙!”
자신의 잘못을 아는지 모르는지 끄앙거리며 여기저기를 활보하는 시무.
안 귀여웠으면 이미 궁댕이 날아갔지.
“사람들은 우리를 데몬이라 부르며 죽여야 하는 존재로 알고 있당. 그래서 찾으러 나가기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정말 고맙당.”
리카르도의 감사 인사에 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드드드득!
아 저거 있었지.
여전히 문이 닫히지 않도록 비집고 있는 우덴킹의 줄기.
더 깊숙이 침투하진 못했지만, 우덴킹의 줄기는 조금씩이나마 문의 크기를 넓히고 있었다.
“아이가 문을 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당.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 근처에 있던 녀석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당. 그래서 문을 닫지 못한당.”
곤란한 듯 문을 바라보고 있는 리카르도.
“우덴킹… 저 나무 새끼 이름인데요. 저건 왜 여기로 들어오려는 거예요?”
내 물음에 리카르도가 주변의 루비 산을 둘러봤다.
“우리의 세계를, 페샨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당. 커다란 힘이라 다른 존재들이 탐낸당.”
못 가져가겠네.
아주 그냥 한 보따리 오지게 싸들고 갈 생각이었는데 존재를 지탱해주는 힘이라니.
마음을 몹시 약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럼 저 힘으로 줄기 따위 쳐내버리고 문 닫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너무 단순무식한 방법이었을까.
리카르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에게도 축복과도 같은 힘이당. 마음대로 사용하고 안 하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당. 그리고 우린 싸움을 하지 못한당.”
싸움을 못 한다며 파란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 리카르도.
안 어울리긴 해.
이렇게 귀엽게 생긴 킹냥이들이 피 튀기는 전투를 한다라.
외관만으로 판단하면 안 되지만 안 어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냥 강아지풀 살랑이는 곳에서 뛰어노는 게 제일 잘 어울리는 느낌이야.
“아까 나무를 오르고 있던데 왜 그런거냥.”
뜨끔.
땡그랗게 눈을 뜨고 순진하게 묻는 리카르도.
리카르도는 인간의 보석에 대한 탐욕이나 물욕 같은 걸 잘 모르는 표정이었다.
“주… 주변 좀 둘러보느라… 하하.”
멋쩍게 웃은 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쩝, 루비 들고 가기는 그른 것 같고.
“끄아앙!”
아기냥이 복귀시켜준 거에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가끔은 착한 일도 해야지.
암, 그렇고말고.
약간은 쓰린 마음을 뒤로하고 고개를 돌렸다.
꾸두둑!
여전히 비집고 들어오기 위해 용을 쓰고 있는 우덴킹.
착한 일한 김에 한 번 더 하지 뭐.
“저거 제가 치워드리면 문 닫을 수 있는 거죠?”
“그렇당. 저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약하지 않당.”
“괜찮아요.”
의미를 알진 모르겠지만 엄지를 한 번 치켜세워줬다.
그런 나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리카르도.
“….”
날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탐욕스럽게 생겨서 의심하는 건가.
학창 시절부터 어른들이 자주 말씀하셨었다.
운이는 눈에 욕심이 가득한 게 탐욕상이라고.
“보답을 하고 싶당.”
에이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바라고 한 것도 아닌데요.
라고 말해야 아름다운 장면이겠지만.
오는 건 막지 않는다가 내 신조였다.
끄덕.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박.
뒤에서 다가온 또 다른 페샨이 꽁꽁 싸맨 상자를 건넸다.
상자…?
아무리 봐도 인간이 만든 상자였다.
킹냥이들이 머무르는 세계에는 몹시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너 말고도 옛날에 우릴 도와줬던 사람이 있었당. 그 사람이 떠나며 주고 간거당.”
선물 돌려막기…?
설날에 들어온 선물을 다른 이에게 다시 설날 선물로 건넨다.
안될 건 없지만 도리에는 살짝 어긋나는 그런 수법.
“힘을 원하면 열어보라고 했당. 그런데 우린 싸우고 싶지 않당. 그래서 안 열어보고 있었당.”
일단 받고 보자.
내밀어진 작은 상자를 받아 품으로 챙겨 넣었다.
“그리고 이건 페샨을 도와준 은인에게 주는 선물이당.”
스윽.
리카르도가 앞발을 들어 내 머리로 가져다 댔다.
꾸욱.
말캉한 젤리에 감싸지는 느낌이 이마로 전해졌다.
“우리 페샨의 눈은 항상 진실만을 본당. 진실 외의 것은 보이지 않는당.”
우우웅.
리카르도의 앞발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사아아.
앞발을 통해 나에게 흡수되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맑고 깨끗한 기운이 내 눈에 담기는 느낌이었다.
슥.
끝난 건지 발을 떼는 리카르도.
여전히 귀여운 얼굴로 리카르도가 눈을 반짝였다.
“친구가 가는 길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당.”
“…!”
친구라… 좋은 단어다.
킹냥이 친구라니.
꾸드드드득!!
점점 커지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비집고 들어오려는 집념 만큼은 상을 줘야 할 것 같았다.
친구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확실히 없애줘야겠네.
“문 닫을 준비해랑.”
페샨의 친구가 된 기념으로 말투를 따라했다.
슥슥.
마지막으로 가기 전.
끄앙거리는 시무를 폭풍 쓰다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친구는 원할 때 언제든 이곳으로 올 수 있당.”
!?
너무 마지막처럼 쓰다듬어서인지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무는 시무.
또 쓰다듬을 수 있다면 킵해두기로 한다.
“나중에 또 보장.”
시무에게 인사를 건넨 후 몸을 일으켰다.
“….”
초롱초롱한, 스미코 할머니의 말대로 밤하늘이 담긴 듯한 아름다운 눈.
많은 페샨들의 눈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기대에 부응해야겠구먼.
“간당.”
손을 휘적휘적 흔들며 벌어져 있는 틈으로 걸어갔다.
이놈의 나무쉨.
감히 킹냥이의 공간을 탐내?
우두둑.
손을 풀며 틈 밖으로 발을 뻗었다.
* * *
아름다운 안쪽과는 확연히 차이 나는 광경이었다.
도망친건지 우덴킹에게 빨려 들어간 건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히리와 일행들.
우글우글.
나온 공간엔 타겟을 잃어버린 우덴들만이 우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동족이 틈을 열기를 기다리는 또 다른 우덴킹과 함께 말이다.
사방이 나무쉨 투성이구만.
어림잡아 봐도 수백 마리였다.
드득.
잠시 후 내 존재를 눈치챈 우덴들이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고개를 돌려 날 응시하는 장면이라니.
그저 나무일 뿐이지만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뭐, 여유롭네.
원래라면 수리검을 들고 호다닥 째는 게 정상인 상황이었다.
마운티거 때와 달리 휘발유나 가스통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우루루루!!
나에게 무섭게 밀려오는 우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휘발유? 가스통?
필요 없다.
[앤 보니&메리 리드]
두 손으로 쥐어지는 리볼버의 감촉을 느끼며 다음 단어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