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나무는 활활
문으로 뛰어들기 전.
정확히는 히리에게 열쇠를 뺏은 순간이었다.
파악!!
아직 문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배경이 바뀌었다.
악.
더 이상 내가 있는 곳은 어두컴컴한 공간이 아니었다.
근무 전날 깨우던 후임의 눈뽕처럼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후우우웅.
동굴엔 불어올 리 없는 상쾌한 바람과 얼굴을 간지럽히는 햇살의 따스함까지.
끼룩끼룩.
갈매기 소리…?
시각과 촉각 다음은 청각이었다.
킁킁.
남은 건 후각.
바다 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상쾌한 바람과 눈부신 햇살, 갈매기 소리와 바다 내음이라니.
바다요…?
부스스.
눈뽕 당했던 눈을 천천히 떠보았다.
이런 게 느껴지는 건 바다 뿐인데 왜 갑자기?
!!
“와우.”
와우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 놓은 단어였다.
속이 뻥 뚫리는 넓고 푸르른 바다.
눈부시게 햇살을 반사하고 있는 바다에 나도 모르는 사이 미소가 그러졌다.
평화롭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갈매기는 평화의 상징이라고.
아닌가? 비둘기였나? 아무튼,
지금 눈앞의 잔잔한 바다와 함께 보니 맞는 말인 것 같다.
응?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배 위네.
요즘 티비에서 보던 최신식 배는 아니었다.
좋은 목재로 만든 고급 배.
항해 관련된 게임을 하면 나오는 그런 배였다.
나 배 멀미 하는데.
고등학교 2학년 제주도 여행.
우도를 가던 배에서 참지 못한 토를 사방으로 뿌려댔었다.
다 추억이지.
그때 토를 맞았던 친구들에게는 추억이 아니겠지만.
기억이란 건 원래 상대적인 것이다.
“오랜만이네.”
“!!”
고개를 돌리니 그곳엔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붉은 곱슬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자.
첫 만남에서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모습의 앤 보니였다.
이제야 해적답네.
감옥에서 만났을 때는 거의 다 죽어가던 모습이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해적들이 입는 가죽 바지와 편해 보이는 셔츠를 걸치고 있는 보니.
감옥에서 잠깐 본 게 다인데.
씨익.
반갑네.
“좋아 보이네요.”
“덕분에.”
두리번두리번.
한 명 더 있어야 하는데.
“여기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또 뒤에 나타나 있던 거지.
완전 다른 사람이네.
메리도 보니와 마찬가지였다.
파란 곱슬머리를 깔끔하게 내린 채 밝게 웃고 있는 모습.
저벅.
내가 있는 갑판까지 걸어온 보니가 날 바라봤다.
“그런데 유리병은 왜 아직도 들고 다녀?”
“아.”
보니의 말에 품으로 손을 넣어 개미굴에서 주웠던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황금빛을 뿜어내며 내게 리볼버를 손에 넣게 해줬던 유리병.
“이거요.”
괜히 머쓱한 기분에 머리를 긁적였다.
이미 무기를 얻게 해주고 빛을 잃은 유리병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개미굴에 두고 나올 수가 없었다.
“열어보지도 않았네. 인간은 호기심을 못 참는 동물 아니었나?”
겁나 열어 보고 싶긴 했다.
안에 무슨 쪽지가 들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 직접 봐봐.
“보라고 해도 안 보는 애는 처음이네.”
안 읽은 이유는 단순했다.
누가 들으면 손발 접히게 오그라든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냥 좀… 이대로 바다에 되돌려 놓고 싶었거든요.”
마지막 생을 감옥에 갇혀 죽어 간 보니와 리드.
이 유려병이라도 과거에 종횡무진 누볐던 바다로 보내주고 싶었다.
“너 보기보다 감성적인 애구나.”
“하하… 그건 아니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들고 다녔어요.”
감성과는 거리가 먼 생을 살아왔지만.
애먼 데서 고집, 감성이 터지는 경향이 있었다.
아직은 마음에 드는 바다를 발견하지 못해 계속 들고 다니던 중이었다.
슥.
손을 뻗는 보니와 리드에게 유리병을 건네줬다.
“어!”
휙.
받기 무섭게 넓은 바다로 유리병을 던지는 두 사람.
잠시 멍하니 둥둥 떠가는 유리병을 보다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네.
이거면 될 것 같았다.
이런 바다라면 합격!
“기특하네.”
밝게 웃는 보니와 리드에 손을 내저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입꼬리가 미친 듯이 씰룩거리고 있었다.
“기특하니까 보여 줄게.”
“…?”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거.”
이 사람들도 참 감성적이네.
“이미 보고 있는데요.”
진한 바다 내음을 들이마시며 갑판을 두 손으로 짚었다.
“정말 예쁜 바다에요! 두 분이 가장 사랑할 만해요!”
….
잠시 이어지는 정적.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
“?”
애가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서 있는 보니와 리드.
바다 아닌갑네.
당연히 자유롭게 누빌 수 있는 바다라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은 약간 감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어, 저기 오네.”
보니의 눈을 따라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작고 아기자기한 배였다.
아! 배였구만.
내가 봐도 이쁜 배였다.
동시에 짐을 잔뜩 싣고 있는 걸 보니 실용적이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끄덕.
저건 인정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가 아니라 배를 좋아하셨군요.”
“이제야 알았어?”
“제가 봐도 예쁜….”
철컥. 철컥.
응…? 철컥…?
내 얼굴 좌우로 내밀어져 있는 리볼버 두 자루.
마치 내 어깨를 리볼버의 받침대로 쓰고 있는 모양새였다.
“저… 저기요?”
“저렇게 무언가를 가득 실은 배. 리드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거든.”
뭔가 잘못됐다.
내가 생각하던 거랑 결이 다르다.
“저런 나무 배는 말이야.”
보니와 리드가 각각의 리볼버에 반대편 손을 올렸다.
싸악.
!
손으로 한 번 쓸기 무섭게 하얗던 총신의 가운데가 붉게 변했다.
“불태워서 가라앉힌 다음에 빼앗아야 제맛이거든.”
잠시 잊고 있었다.
보니와 리드는 이름을 떨친 악명 높은 해적이라는 걸.
감옥에서 다 죽어가는 모습을 봤던지라 둘을 그저 짠한 자매라고만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이제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알겠어?”
묘하게 현타가 오는 깨달음에 경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적질.
해적이 가장 좋아하는 게 뭐겠는가.
남에 꺼 빼앗는 거지.
싱긋.
해맑게 웃어 보인 보니와 리드가 작고 아기자기한 배를 응시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건.”
동시에 겹쳐 들려오는 보니와 리드의 목소리.
“남에 꺼 빼앗기.”
두두두두두두두두!!
* * *
아까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히리의 열쇠를 빼앗은 것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조건의 완성인 듯했다.
뭐, 어쨌든.
[앤 보니&메리 리드 - 작열탄]
손에 쥐어져 있는 리볼버 총신으로 아까 봤던 붉은 선이 생겨났다.
철컥.
리볼버를 몰려오고 있는 우덴에게 조준했다.
- 콰아아아!!
보니와 리드의 탄에 맞고 불타올랐던 아기자기한 배를 떠올렸다.
명복을 빕니다.
아기자기한 배님.
길동무는 만들어드릴게요.
두두두두두두두두두!!
총구가 불을 뿜으며 탄을 쏟아냈다.
이전과 같은 붉은색과 파란색의 탄환이었지만.
다른 게 있다면,
콰아아아아!
착탄점에서 폭발하며 불꽃을 일으킨다는 것.
화르르륵!!
탄을 쏟아내기 무섭게 동굴이 불바다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어어어어어--!
위기를 감지한 건지 페샨의 입구를 비집고 있던 우덴킹도 움직이고 있었다.
쐐에에엑--!
정면에서 또 다른 우덴킹의 줄기가 날아들었다.
작열탄이 없었으면 곤란했을 놈이지만.
삭.
이젠 아니었다.
우글거리던 우덴은 서로에게 불을 옮겨 붙이며 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동굴 벽면을 향해 총알을 쏟아부었다.
불이 붙자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는 우덴킹의 줄기들.
내게 다가오던 줄기도 마찬가지였다.
작열탄에 닿자마자 불타기 시작했고, 그 불은 줄기를 타고 본체로 올라가고 있었다.
쿠우우!
탄의 위력에 못 견딘 동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루루.
탄에 직격당해서인지 먼저 무너져내린 벽면.
타닷.
리볼버를 든 채로 벽면을 향해 달려갔다.
우덴킹의 줄기로 인해 잘 지탱되고 있었을 뿐 동굴의 벽면 자체는 두껍지 않았다.
탁!
무너진 벽면을 통해 나온 동굴 밖.
그어어어어--!
여기에 있었구만.
동굴 밖엔 거대한 덩치의 우덴킹 두 마리가 불을 끄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었다.
내가 올라온 양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우덴킹 두 마리.
철컥.
양팔을 벌려 녀석들 향해 리볼버를 겨눴다.
직화구이다, 나무쉨아.
두두두두두두두!!
* * *
“휴우.”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사우나구만, 사우나여.
그것도 찾아보기 힘든 천연 목재 사우나였다.
타닥… 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꽤 큰 크기의 우덴킹 두 마리와 함께 동굴 안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우덴 수백 마리까지.
불가마도 이런 불가마가 없었다.
스윽.
리볼버를 든 손으로 이마를 훔쳤다.
오랜만에 땀을 빼니 몹시 개운했다.
이대로 료칸으로 돌아가서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면 딱일 것 같았다.
….
팔을 내려 여전히 달궈져 연기가 나고 있는 리볼버를 바라봤다.
무서운 친구들이었어.
보니와 리드의 제대로 된 모습을 본 느낌이었다.
사아아…!
잠시 후 제 역할을 다하고 사라지기 시작한 리볼버.
쿨타임은 크게 줄지 않았지만 유지 시간은 처음보다 확연히 늘어났다.
쿨타임이 없어지면.
행복한 상상을 떠올렸다.
수리검으로 순간이동하며 쏘아대는 작열탄이라.
상상만 해도 강려크하구만.
고개를 끄덕이며 맑게 갠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색이라 그런지 두 사람과 함께 보고 있던 바다가 떠올랐다.
어쨌든.
씨익.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 * *
낮열밤열.
조금 전 내가 만든 사자성어다.
낮에도 뜨겁고 밤에도 뜨겁다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다.
“어흐으…!”
아침에 땀을 쏙 뺀지라 오늘은 별로 안 땡길 줄 알았는데.
건방진 착각이었다.
온천은 항상 옳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꼬로록.
새롭게 깨달은 사실 하나.
조식을 먹은 이후로 밤이 된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다는 것.
시간 됐는데.
이제 곧 저녁을 줄 시간이야.
파블로프의 개처럼 밥 때가 되었음을 깨닫곤 호다닥 밖으러 달려나갔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경건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정좌했다.
셋 세면 온다.
하나.
똑똑.
셋.
“네!”
우렁차게 대답하자 스미레가 진수성찬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비주얼 100점 만점에 200점.
역시나 오늘도 흡족스러운 비주얼의 식사였다.
기다리자.
아직 손을 뻗지 않은 채 잠시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스미레가 나간 뒤에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심산이었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세팅을 끝낸 후 문으로 몸을 돌리는 스미레.
아.
“스미레 님!”
“네, 더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무슨 일이냐며 고개를 돌린 스미레.
스미레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스미레 할머님이 말씀하신 요정요.”
“…?”
“진짜 있었어요.”
뜬금포 터지는 말 때문이었을까.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던 스미레가 입가 가득 미소를 그렸다.
“그럴 줄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