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후지산
부스스.
몸을 일으켜 눈을 비볐다.
인생 한순간이야.
졸린 눈을 간신히 떠 주변을 둘러봤다.
어젯밤 불꽃놀이를 보던 산등성이의 꼭대기.
아침 8시 정도 됐으려나.
정확한 현재 시간을 알 순 없었다.
단지 마을 사람들이 마당을 쓸고 있는 걸 보며 추측해볼 뿐이었다.
어제까지는 호화 료칸의 천장 아래서 눈을 떴는데.
하루 만에 산 노숙으로 변하다니.
고개가 절로 내저어지는 상황이었다.
어젯밤 불꽃놀이가 끝난 후.
시원한 맥주와 예쁜 불꽃놀이를 봐서인지 기분이 몹시 좋았고.
이대로 내려가기가 좀 아쉬웠었다.
- 아쉬운데 별이나 좀 보다 갈까.
그렇게 발라당 누워 하늘을 메우고 있는 별구경을 시작했다.
- 음냐.
별구경을 시작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졸음이 스르륵 밀려오기 시작했다.
- 눈만 좀 붙일까.
너무 달콤했기에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아버린 것이 마지막 기억.
눈을 떠보니 해가 중천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아주 그냥 꿀잠을 자버렸어.
푹신한 침대는커녕 여기저기 튀어나온 풀바닥이었지만.
몸은 침대에서 잔 것 못지 않게 개운했다.
“끄어어어!!”
팔이 빠져라 기지개를 켠 후.
[비전 수리검]
수리검을 꺼내 들었다.
나막신을 신고 산을 걸어 내려갈 순 없는 노릇이다.
“자 가볼…!?”
나막신?
수리검을 던지려던 순간.
왠지 모르게 자유로운 하체에 고개를 내렸다.
아.
잠시 잊고 있었다.
나 유카타 빌렸었지.
노점상의 모습을 봤을 때 축제에만 오는 분인 거 같은데 큰일이다.
안 되는데.
물론, 큰일 난 건 그 유카타 주인 분이 아니었다.
반대였다.
- 보증금 주세요. 유카타 반납 때 돌려드리겠습니다.
흉흉한 세상이라 그런 것 같았다.
워낙 별난 놈들이 많다 보니 유카타를 빌려주며 보증금을 받았던 주인 아저씨.
- 유카타 개비싸구나.
생각보다 몹시 센 보증금에 유카타는 비싼 옷이구나 하며 돈을 건넸었다.
어차피 불꽃놀이만 끝나고 반납할 테니 별 생각 없이 보증금을 맡긴 건데.
산 위에서 기분 좋다고 잠이 들어버릴 줄은.
안돼!
급한 마음에 수리검을 산등성이 아래로 떨어뜨렸다.
내 차비야!
호다닥.
* * *
“….”
하나 업어갈까 생각했던 게 씨앗이 된 걸까.
뜻밖의 유카타가 생겨버렸다.
물론 그리 기쁜 상황은 아니었다.
공항까지 갈 차비가 사라졌으니 말이다.
휑하네.
내년이 되기 전에는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굳은 의지인지 노점상이 있던 자리는 깔끔했다.
그것도 몹시 깔끔.
-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분이라고 들었어요.
혹시나 주민분이실까 희망을 걸어봤지만.
노점상 옆에 위치하고 있던 가게 아주머니 말씀을 들으며 체념하게 되었다.
으… 음.
긍정적인 생각을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을 항상 계획대로 살아갈 순 없는 것.
그리고 이런 돌발상황이야말로 여행의 묘미 아니겠는가.
짝!
헛소리였다.
아무리 돌발상황이라 해도 집에 못 돌아가는 경우는 없어야 했다.
우물우물.
막막한 마음에 조금 전에 산 경단을 입으로 집어넣었다.
어차피 차비로 사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달달한 걸 먹으며 뇌를 회전시켜야 했다.
수리검을 던지면서 간다…?
경단의 효과는 미미했다.
수리검을 던지면서 공항까지 갔다간 팔이 먼저 빠져버리고 말 터였다.
역시 현실적인 건.
부스럭.
품에 있던 명함을 꺼냈다.
# 모리타 쿄스케
쿄스케가 핸드폰을 사면 등록하라고 줬던 연락처였다.
안돼.
이건 최후의 보루였다.
그렇게 멋있는 이별의 말은 다 건네놓고 맥주랑 꼬치 처먹고 잠들어서 돈 달라고 다시 전화를 한다?
안되지 안돼.
인간 백운의 가오가 허락하지 않는다.
톡.
들고 있던 경단까지 다 먹어버렸다.
슥.
더 먹을 거 없나 가방을 뒤지던 중 눈에 띄는 보따리.
이거나 열어볼까.
애초에도 어제까지만 쉬고 열어볼 생각이었으니.
마땅한 이동 수단이 떠오를 때까지 상자의 내용물이나 살펴봐야겠다.
음.
[잭 더 리퍼]
서걱.
너무 옴팡지게 묶여있는 보따리.
망설임 없이 면도칼로 매듭을 잘라냈다.
보따리가 펼쳐지며 시무 만큼이나 앙증맞은 크기의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사기 아니야?
착하고 귀여운 페샨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게 아닌가 의심되는 비주얼이었다.
혹시… 보라돌이?
상자에 손을 가져가며 약간의 기대감이 생겼다.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으니 가능성이 있었다.
페샨이 위기 때 사용할 수 있는 비밀 무기를 숨겨놓은 걸 수도 있으니 말이다.
금돌이까진 안 바란다, 보라돌이라도!
달칵.
….
응, 아니야.
금빛이나 보랏빛은커녕 빛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게 나와버렸다.
아주 옛날에 쓰였을 법한 양피지로 된 쪽지.
반듯하게 접혀있는 작은 쪽지가 상자 내용물의 전부였다.
에이.
첫 번째 어긋난 기대감은 뒤로하고 쪽지를 펼쳤다.
아직 완전히 기대를 버리기엔 일렀다.
혹시 아는가.
해적왕 같은 존재가 어마어마한 재산을 숨겨놓은 보물지도 일지도 모른다.
뭐야.
텅.
아무것도 없었다.
진짜 사기였네.
신기한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펼쳐본 쪽지엔 보물 지도는 고사하고 작은 활자 하나조차 적혀 있지 않았다.
아무리 냥냥이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다지만 너무 성의 없고 대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였으면 최소한의 성의로 한글이라도 몇 줄 적어놨을 텐데.
참 못된 인간들 많아.
빈 쪽지를 선물이라고 받으며 기뻐했을 페샨들이 떠올랐다.
불쌍한 냥냥이들.
나중에 만나게 되면 사기당하지 않는 법에 대해 강의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차비도 없는데 힘만 빠졌네.
아무것도 안 적힌 상자와 쪽지를 내다버리기 위해 쓰레기통으로 걸어갔다.
스르르…!
그 순간.
쪽지에서 따듯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 힘을 얻고 싶다면.
쪽지 위로 한 줄의 문장이 나타났다.
스륵.
오씨.
계속 글씨가 써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쪽지엔 거대한 눈 모양의 그림이 그려졌다.
마치 날 구석구석 살피며 눈알을 굴리고 있는 듯한 그림이었다.
사락.
잠시 후 눈이 없어진 후.
쪽지로 간략한 문장 하나가 적혀졌다.
# 후지산으로 가라.
파삭!
잠시 동안 문장을 보여준 뒤 쪽지가 바스러졌다.
역할을 다하자 참아왔던 세월을 한 번에 받으며 사라져버린 듯했다.
후지산…?
내가 아는 그 후지산을 말하는 건지 잠시 헷갈렸다.
유후인의 숲과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곤 하나 페샨 족이 머무는 곳은 다른 세계였다.
다른 세계에서 건네진 쪽지가 후지산을 가리키고 있다니.
음.
원래는 어떻게든 공항으로 가 한국행 비행기를 탈 생각이었다.
쿄스케도 구했고 스이카도 찾았으니 일본에 볼일은 끝났기 때문이다.
어쩌지.
그러던 중 나타난 쪽지의 문장.
무기왕의 능력에 의한 거였다면 의심없이 갔겠지만.
생전 처음보는 의심스러운 쪽지가 후지산으로 가라고 하니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찜찜한데.
그렇다고 안 가기에도 찜찜했다.
페샨에게 상자를 건넨 이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정말 페샨에게 힘을 줄 생각이었고 이 쪽지가 가리키는 곳에 그 방법이 있는 거라면?
한국에 들렀다 가기에도 마음이 불편하고.
후지산에 무언가 묻혀있고 그걸 파내는 일이라면 언제 가든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놓쳐버리고 마는, 시간제한이 있는 기회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 스륵.
누구의 눈인진 몰라도 조용히 그려져 나를 살폈던 눈동자.
눈동자는 마치 현재의 나를 샅샅이 훑는 느낌이었다.
지금의 백운에게 있어 최적화된,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는 루트를 찾아 추천한 느낌.
고민하지 말자.
난 나를 잘 알았다.
고민해봐야 어차피 가겠지.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 찾아야 하는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쪽지가 사기일지라도 직접 확인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저벅.
간다! 후지산으로!
몸을 돌려 대로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땡전 한 푼 없는데 어떻게 가야 할지는 막막했다.
하지만, 일단 가본다.
부우우웅.
일단 걸어보자는 마음으로 길가로 향하던 중이었다.
내 옆으로 경차 한 대가 천천히 멈춰섰다.
너무 신기한 꼬라지라 사진 찍으려고 하나.
유카타를 입고 나막신을 신은 채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고 있는 모습.
신기하다면 신기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위이이잉.
차의 창문이 내려가고.
“배… 백운 님?”
내 이름이 불리어졌다.
* * *
스쳐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느끼며 앞을 바라봤다.
“와 진짜 백운 님이라니.”
“이런 일이 다 있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더니.
타국의 마을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토벌전 이후로 영상도 안 올라오고 해서 정말 걱정했어요.”
“대산한테 무슨 일이라도 당하신 줄 알았거든요.”
“하하…. 아니에요.”
광산 토벌전에서 만났던 유연경과 배이슬.
당시 게스트 헌터로 참가했던 두 사람은 아직도 유후인에서 날 만났단 사실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마운티거 영상도 봤어요! 백운 님 그 동영상 댓글 보셨어요? 완전 난리라니까요.”
!?
당장 어떻게 난리가 났는지 말하라는 눈빛을 보내자 조수석에 있던 배이슬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어딘가로 접속하더니 나에게 폰을 건네는 배이슬.
# 돌아온 무기왕, 산을 불태우다.
제목 누가 지었어 이거.
아주 마음에 쏙 드는 제목이었다.
옆에 있다면 어깨를 격하게 두드려 주고 싶었다.
@ 갈아입으신 분 좋아요 요망.
동영상에서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은 베스트 댓글이었다.
쿡.
내 폰은 아니었지만 조심스럽게 좋아요 버튼을 클릭했다.
# 콰아아아!
마운티거가 활활 불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동영상이 끝나려는 시점.
한튜브에서 편집한 건지 장면이 바뀌며 CBC의 송유빈이 나타났다.
# 쾅!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카메라를 응시하는 송유빈.
무언가를 잔뜩 참고 있던 건지 송유빈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 무기왕이 돌아왔습니다아!!!
흐뭇.
몹시 흐뭇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CBC의 송유빈이다.
각 방송사 리포터들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사람.
그런 사람이 이렇게 진심을 다해 외쳐주다니.
코쓱.
이 정도 반응이면 후원금은 얼마나 들어와 있을지가 점점 궁금해졌다.
핸드폰을 돌려주기 위해 고개를 들자 배이슬과 유연경이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왜 그러세요?”
절레절레 고개를 젓더니 배이슬이 입을 열었다.
“신기해서요. 보통은 자기 동영상이 올라가면 주구장창 지켜보고 있거든요. 조회수는 올랐는지, 댓글은 달렸는지, 댓글엔 무슨 내용이 달렸는지 반응이 궁금해서요.”
“… 이번에 한국 가면 진짜 사려고요. 스마트폰.”
“꼭 좀… 사세요. 꼭!”
내가 생각해도 유인원 수준이었다.
동영상에 관심 없는 건 둘째 치더라도 스마트폰이 없다니.
굳이 핑계를 대자면 뭔가 하려고 할 때마다 일이 생겼었다.
아니지, 내가 일을 만든 거지.
고개를 끄덕이며 스마트폰 사야지 생각하고 있을 때.
운전 중이던 유연경이 백미러를 통해 날 바라봤다.
“백운 님, 광산에서는 정말 감사했어요.”
“맞아요, 한동안 연경 님이랑 백운 님을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요. 감사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거든요.”
머쓱해지는 시간이 찾아왔다.
사뭇 진지하게 재차 감사 인사를 건네는 두 사람.
감사 인사와 함께 소소한 덕담을 주고받은 후 창가에서 쌩쌩 지나가는 배경을 바라봤다.
“그런데 정말 괜찮아요? 괜히 저 때문에 후지산으로 가시는 거 아니에요?”
후지산으로 간다는 말에 태워주겠다 말한 유연경과 배이슬.
마침 막막하던 차라 일단 엉덩이를 밀어 넣고 봤다.
“아니에요, 저희 원래 경로에도 후지산이 있었거든요.”
“맞아요! 조금 일찍 간다고 생각하면 돼요.”
끄덕.
원래도 편했지만 한층 더 편해진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해외여행이라 하면 동행이 있어야지, 암!
태어나 처음으로 동행과 함께 하는 후지산 행.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