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빨리 한국으로
달달달달달.
“배… 백운 님, 어디 안 좋으세요?”
일본 도쿄에 있는 한 병실.
유연경과 배이슬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봤다.
정확히는 쉴새 없이 떨리고 있는 내 다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앗…. 죄송합니다.”
손으로 다리를 꾹 눌렀다.
잠깐 한눈을 판다 싶으면 달달달 떨리는 다리.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급증에 걸린 것 같았다.
빨리 한국으로 가야 되는데.
아직 몸이 완벽하게 회복된 건 아니었다.
여전히 조금만 움직여도 끔찍한 고통이 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퇴원을 요구한 이유는 단 하나,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빨리 쎄져야 하는데!
리카르도에게 받은 쪽지는 후지산을 가리키고 있는데 왜 한국으로 돌아가느냐?
간단했다.
사로카에 줘터진 후 쪽지를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 후지산으로 가라.
쪽지는 힘을 얻고 싶다면 후지산으로 가라고 했었다.
처음엔 내용을 보고 후지산에 무기나 그에 대한 단서가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후지산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건 사로카였다.
그리고,
사로카를 만난지 한 시간도 안 되어 개박살 나버리고 말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패배였다.
아무 대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맞이한 패배.
갑작스럽게 만났다곤 하나 부정할 수 없는 전력 차이에서 온 완벽한 패배였다.
쪽지가 말하는 건 후지산에 무언가를 숨겨놨다는 게 아니야.
억측일 수도 있었다.
쪽지는 그냥 아무 말이나 써놓은 것 뿐이고 나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걸 수도 있지만.
만약 쪽지가 거짓이 아니라면.
쪽지가 원했던 건 내가 후지산으로 가 사로카에게 박살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패배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
계속해서 이겨오며 대충 무기만 열심히 모으면 지는 일 따위는 없겠지란 오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사로카를 만나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지속됐을지 모르는 이런 오만을 쪽지가 부숴주었다.
지면서 바로 죽을 수도 있던 걸 쪽지가 미리 지게 해서 구해준거야.
라고 슈퍼 긍정회로 가동 중이었다.
이번 패배를 초석으로 삼아 강해진 다음, 사로카 새끼를 박살내는 것.
이것이 나의 플랜이자 쪽지가 원하는 바라고 결정했다.
내 판단이 옳은지, 쪽지가 원하던 길이 이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했을 땐 맞았다.
맞는 걸 떠나 최상의 루트였다.
물론 아직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몰랐기에 빨리 가서 확인하고 싶었다.
“백운 님, 너무 빨리 퇴원하는 거 같아서 걱정돼요. 아까 의사 선생님도 깜짝 놀라셨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배이슬의 말에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괜찮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미친 소리긴 했다.
S급 데몬에게 처맞아서 어디 한군데 성한 곳이 없는 환자가 당장 퇴원하고 한국으로 가겠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지금 몸이 아픈 것보다 한시라도 빨리 강해지는 게 중요한데.
누워 있어봤자 잠도 안 올 거야.
솔직히 말하면 불안했다.
이렇게 누워 있는 동안 사로카 새끼가 병원으로 쳐들어오면?
지키고 있는 헌터는 있지만 만약 나와 단둘이 남게 된다면?
사로카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급의 다른 강한 데몬을 만나게 된다면?
누군가 들으면 망상증이라고 할만한 경우의 수들이지만.
지금 내 힘으론 이 경우의 수들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몹시도 불안했다.
그냥 뭘 만나든 때려잡을 수 있게 강해지면 되는 일이야.
그렇게 스스로의 판단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사이.
끼익.
왔다.
문이 열리며 장관 료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락을 받고 급하게 온 듯한 느낌이었다.
당장 한국으로 가지 못하고 있던 이유.
내가 깨어나면 료코가 꼭 얘기를 나눠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장관님 말씀이니까 잘 들어야지.
“퇴원하신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된 거죠?”
료코는 아직도 내가 퇴원한다고 말한 사실을 믿지 않는 듯했다.
의사에게 잘못 전달받은 게 아닐까라 생각하는 얼굴.
“제가 한국에 아주 급하게 볼 일이 있어서요. 오늘 바로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온몸에 칭칭 붕대를 감고 있는 내 몸을 훑는 료코.
료코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알았기에 선수를 쳤다.
“몸은 좀 삐걱거리긴 하지만 움직이는데는 아무 지장도 없습니다. 제 몸이 좀 튼튼하거든요.”
아까 했던 것처럼 엄지를 치켜세우자 료코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 말하든 내가 떠날 거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슥.
유연경과 배이슬, 옆에 있던 의사를 쳐다본 료코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가능하다면 백운 님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 * *
탁.
문이 닫히며 병실엔 료코와 나 둘만이 남게 됐다.
모두가 나가자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는 료코.
“백운 님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사로카를 상대해준 덕에 뒤에 있던 대피 인원들까지 무사했다며 료코는 거듭 감사를 표했다.
“저야말로 감사하죠. 일본 측 헌터분들이 안 도와주셨으면 전 죽었을 테니까요.”
그렇게 서로를 향해 고개를 꾸벅이기를 잠시.
옆에 있는 의자로 몸을 앉힌 료코가 입을 열었다.
“분화구부터 이어진 땅굴을 따라갔지만. 사로카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고 합니다.”
다음에 만나려면 한국인가.
회귀 전에 사로카가 한국에 나타났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일본에서 끝까지 잡히지 않았다는 것.
무언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사로카는 2년 뒤 한국에서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후지산에서 날 만나서 팔 하나가 날라갔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회귀 전과 다른 한 가지였다.
과연 그게 사로카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줄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그저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에전과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사로카가 나타나주는 것이었다.
그래야 만날 수 있어.
처음으로 날 막아선 벽.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손으로 부순 뒤 나아가고 싶었다.
“저…. 백운 님.”
“네?”
료코가 앞으로 몸을 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스스로도 이걸 말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갈등하는 모습이었다.
“편하게 물어보세요. 아는 거라면 숨기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힘을 얻어서일까.
한숨을 쉰 료코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들릴 거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만. 혹시…. 사로카에게 뭔가 특이한 점은 없었나요?”
“특이한 점이라면…?”
“가령, 말을 했다거나요.”
알고 있구나.
어떻게 아는진 모르겠지만.
료코 역시 무언가를 듣고 온 모양이었다.
워낙 믿기 어려운 일이니 사로카와 가장 가까이서, 가장 오래 싸웠던 내게 물으러 온 것.
“예.”
“!!”
내 대답이 예상 밖이었는지 료코의 눈이 커졌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습니다. 짤막한 두 마디 정도였죠. 단순하구나, 나약하구나.”
나약하다니.
쌍놈의 새끼.
지보다 약한 건 맞으니 더 할 말은 없다.
“이럴 수가.”
료코는 자신이 들은 게 진실이 아니길 바랐던 것 같았다.
뒤로 몸을 젖히며 이마를 짚는 료코.
“잘못 듣지 않았습니다. 분명하게 들었거든요.”
다시 한번 말하자 료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로카와 싸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인원이 있습니다. 지금은 죽었지만요.”
- 말을… 했… 다.
그 사람이 죽기 전에 의사에게 남긴 말이라고 했다.
스윽.
얼굴을 감싸쥔 료코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데몬이 말을 하다니…. 백운 님까지 들으셨으니 부정하기가 힘들군요.”
페샨과 리카르도 덕에 충격이 덜하긴 했지만.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싸우는 중만 아니었으면 소리 질렀지.
5미터짜리 미친 살인병기가 말을 하는데 누가 안 놀라겠는가.
“백운 님.”
“네.”
고개를 든 료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로카가 말을 했다는 사실. 비밀로 해주실 수 있을까요?”
“음….”
웬만하면 바로 오케이 했겠지만.
조금 전 료코가 말한 건 망설여졌다.
이 사실을 숨김으로써 사로카에게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가직 헌터를 포함해 각 주요 기업들에겐 알릴 생각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국민들에게도 알릴 생각이고요. 단지, 한 번에 퍼져 가해질 충격을 줄이고 싶습니다.”
난리가 나긴 하겠지.
료코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데몬을 그저 살육을 즐기는 외계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덜컥 데몬도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지는 뻔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필요하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에까지는 숨기진 못할 거 같네요.”
“예, 그런 순간까지 비밀로 해주시길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그 전에 최대한 충격이 덜한 방법으로 알릴 생각이기도 하고요. 감사합니다.”
부탁을 들어줘 감사하다고 말한 료코가 날 빤히 쳐다봤다.
잠시 정적이 찾아와서인지 급 어색해진 분위기.
“왜… 그러시죠?”
“이것도 좀 실례가 되는 질문일 거 같은데. 정말 국가직 10급 헌터이신가요?”
왜 안 물어보나 했다.
한 나라의 장관인 료코.
분명 한국에 연락해 내 신분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래도 못 믿겠지.
1급이나 2급 헌터가 와야 대적할 수 있는 사로카를 10급이 30분 가까이 잡고 있었으니.
안 믿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하하…. 맞습니다.”
“… 그런가요.”
한동안 더 날 바라보던 료코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묻고 싶은 게 더 많아 보였지만 참는 모습이었다.
“제가 궁금했던 건 다 여쭤봤네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료코.
료코가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백운 님과 일행분들이 돌아가실 비행기는 준비해놨습니다. 공항에서 이걸 보여주면 바로 안내해드릴 겁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옅게 웃어 보인 료코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다음번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보답하겠다는 료코에 나도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또 만날 일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또 만나게 되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밀어진 료코의 손을 맞잡았다.
* * *
도쿄의 하네다 공항.
“우…. 우와.”
“와…. 이거 진짜 타도 되는 건가요?”
유연경과 배이슬이 입을 벌리고 눈앞에 있는 걸 바라봤다.
영화에서나 보던, 사우디아라비아 재벌들이나 타고 다닌다는 전용기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 이쪽으로 오십시오.
료코가 건네준 서류를 보여주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공항 직원들.
직원들은 곧바로 우리 세 사람을 안내해 이곳으로 데려다줬다.
역시 장관이야.
앞에 있는 전용기를 보고 있자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었다.
올 땐 퍼스트클래스를 타고 왔는데 갈 때는 전용기라니.
앞으로 이런 호화로운 왕복 비행이 가능할까 의문이 들었다.
“백운 님 덕분에 전용기를 다 타보네요.”
“감사합니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으면서 내 두 손을 꼭 잡는 배이슬과 유연경.
두 사람은 전용기를 타본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격한 모습이었다.
“크흠!”
전용기를 대준 건 료코였지만 내 어깨가 올라가는 건 어째서일까.
두 사람을 향해 자연스레 헛기침을 한차례 해준 뒤.
저벅.
전용기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가자.
강해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