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도움 요청
- 이제 핸드폰 샀으니까 연락 잘 받아요.
내일 있을 동영상 촬영을 위해 집으로 돌아간 유연경과 배이슬.
대산의 토벌전에서 만나 마음이 맞은 둘은 이후로 함께 프리랜서 플랫폼인 프튜브에서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 나중에 한 번 등장해 주시고요.
무기왕으로서 한 번 등장해달라는 반농담을 마지막으로 둘은 서울로 떠났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가줘야지.
삐비빅.
언젠가 기회가 생기겠지 생각하며 낯선 번호키를 눌렀다.
집이 비어있어 바로 입주가 가능했던 나의 오피스텔.
오우야.
이래서 내집 내집 하는 건가.
뭔가 월세로 살던 원룸과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계약이 끝나고 나갈 일이 없어서인지 한층 더 포근한 느낌.
물론.
이불이고 뭐고 하나도 안 사온 터라 맨바닥에서 자야 하는 건 약간 곤란했다.
긁적.
2년 넘게 산바닥에서 잤는데 이불 하나 없다고 곤란하다 생각하다니.
하산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배가 부른 모양이었다.
아 메시지.
아까는 배이슬과 유연경이 있어 굳이 메시지를 열어보지 않았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김희연에게 곤란한 내용이 들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보자보자.
딱딱한 맨바닥에 대충 배를 깔고 핸드폰을 꺼냈다.
회귀하기 전에 질리게 썼었는데 너무 오랜만에 써서인지 왠지 모르게 낯선 느낌.
삑.
어플을 열어 메시지함으로 들어갔다.
헌터청에선 국가직 헌터 간의 연락을 위해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게 해주는 모양이었다.
메시지를 열자 짤막한 글이 나타났다.
# 안녕하세요, 백운 님.
2년 전에 개미굴에서 함께 한 김희연이라고 합니다.
오랜만에 연락을 드리는데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염치없는 건 알지만.
저희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을지 궁금해 메시지를 남깁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아래 주소와 번호를 남길 테니 연락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일주일 전에 도착한 메시지.
메시지 안에는 공손한 말투로 도움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무슨 일이지?
김희연의 성격상 웬만하면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이런 메시지까지 남긴 걸 보면 보통 일은 아닐 듯했다.
음, 좀 봐볼까.
부스럭.
챙겨놨던 기록지를 꺼내 살폈다.
소피아가 건네준 유물의 정보는 두 개가 남아 있었다.
이카루스의 날개.
척준경의 검, 악귀참도.
둘 다 몹시 구미가 당기는 유물들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눈이 번쩍 뜨이는 물건들.
그럼에도 이 두 개를 미루고 스이카를 먼저 찾은 이유가 있었다.
대산이 찾아낸 시기도 시기지만.
이 두 개의 무기들엔 각각의 문제점이 존재했다.
먼저 척준경의 검, 악귀참도.
이건 회귀 전에 대산이 오랫동안 찾다 포기해버린 무기였다.
- 모든 수단과 자원을 쏟아부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이미 소실 됐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정녕 실존은 했었던 무기인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악귀참도의 정보를 요구한 이유는 간단했다.
개멋있어… 척준경.
전세계 남자들에게 한 가지 무기를 고르라면 대다수의 이들이 검을 고를 것이다.
그만큼 검은 남자에게 있어 로망이나 마찬가지.
그중에서도 내가 몹시 동경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소드 마스터라 불렸던 고려제일검 척준경이다.
회귀 전에 대산조차 포기한 검이지만.
존재만 한다면 어떻게든 내가 찾고 싶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선택해버렸다.
히죽.
잠시 악귀참도를 발견해 사용하는 행복한 상상을 마치고.
이카루스의 날개를 내려다봤다.
으음…. 이건 무기인지 아닌지 아직도 애매하단 말이야.
대산이 찾아서 유물관에 기증했던 이카루스의 날개는 과연 내 무기고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인지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악귀참도랑 스이카 말고는 딱히 고를 게 없었지.
날개를 고른 이유였다.
나머지 유물은 딱 봐도 무기고에 못 넣을 것 같았기에.
그나마 무기로 사용할 수 있을 듯한 날개를 골랐다.
흠…. 이카루스의 날개는 그리스로 가야 하니까.
대산의 정보가 가리키는 장소는 그리스였다.
애초에 시작이 외국이다 보니 아무리 최소로 걸린다 해도 꽤 시간이 들 터였다.
악귀참도는 기약 없고.
어쨌든 이것들을 찾은 뒤 한국으로 돌아오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이거 찾고 나서 연락하는 건… 말이 안 되겠지.
집 정리만 끝나면 바로 그리스로 떠나려고 했었는데.
막상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니 못 본 척하기가 찜찜했다.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가까운 사이가 아님에도 김희연은 개미굴에 버려졌던 날 위해 밖에서 소리를 내주었던 사람이다.
- 데몬을 찾고 있습니다.
거기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어떤 데몬을 찾고 있다던 이야기까지.
위험한 일에 처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흐음, 전화나 해보자.
이야기를 들어보고 가능하다면 후딱 도와준 뒤 그리스로 향하면 된다.
띠리리---
메시지에 적혀있는 김희연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조금 어색하겠네.
2년 만에 하는 통화.
일단 누르긴 했는데 막상 받으면 어색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띠리리---
이런 걱정 때문일까.
신호음만 계속 갈 뿐 김희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딱히 늦은 시간은 아니라 잘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게 몇 번의 신호음이 더 간 후.
여전히 안 받는 김희연에 핸드폰을 내려놨다.
어쩔 수 없지 뭐.
바닥에 대자로 누워 눈을 감았다.
도와주려고 했는데 연락이 안되니 어쩌겠는가.
….
누워있는 곳이 너무 딱딱해서 그런가.
이상하게 호텔에서 같이 밥을 먹던 김소연과 김희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따로 표현하지 않아도 김희연은 동생인 김소연을 끔찍이 아끼는 게 보였었다.
만약 소연 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그래서 희연 님이 어쩔 수 없이 내게 연락을 한 거고.
으음.
오지랖인 거 같은데.
가능하다면 다른 이의 일에 오지랖 부리지 말자는 주의였다.
그런 주의였지만.
오지라퍼들에게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았지.
회귀 전 주변의 오지라퍼들이 아니었다면 과연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었다.
“에잉!”
다시 몸을 뒤집어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삑.
메시지함을 열어 아래 적혀있는 김소연과 김희연의 집 주소를 확인했다.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집까지 찾아가는 건 명백한 오지랖이었지만.
찜찜한 마음 때문에 둘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찰칵.
메시지함의 주소를 스크린샷 해둔 뒤.
송도 근처니까 내일 한 번 가보자.
팔을 베개 삼아 눈을 감았다.
* * *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집을 나섰다.
메시지에 적혀있던 집 주소는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오피스텔이었다.
버스를 타고 삼십 분 정도 걸렸을까.
아기자기하게 생긴 오피스텔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가.
눈앞의 오피스텔 이름과 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보자, 11층.
마침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계단으로 가도 금방 가겠지만 굳이 1층에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를 못 본 척할 이유는 없었다.
난 문명인이니까.
핸드폰을 산 이후 잔뜩 문명인 뽕이 올라온 상태였다.
꾹.
11층 버튼을 누르고 빨리빨리의 민족답게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잠깐만요!”
허겁지겁 달려온 여자가 거의 닫힌 문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시… 시발 놀래라.
멍 때리고 있다 갑자기 나타난 손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내가 놀랐든 말든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엘리베이터에 오른 깔끔한 단발 머리의 여자.
“감사합니다.”
난 아무것도 안 했지만.
감사하다며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는 여자에 덩달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11층에 사나 보네.
내가 눌러놓은 11층을 보더니 아무 층도 안 누른 채 한 켠에 자리를 잡는 여자.
여자는 갈색 단발 머리에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얼레.
여자가 걸고 있는 목걸이가 이상하게 눈에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 어디서 본 목걸이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국가직 7급 헌터, 이청아.
아 국가직 헌터 목걸이었구만.
등록소와 헌터청에서 많이 본 목걸이라 눈에 익었던 모양이다.
난 받자마자 잃어버렸으니.
스스로의 칠칠치 못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왜… 왜 그러세요?”
잔뜩 경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몸을 두 손으로 감싸며 나와 먼 곳으로 붙는 이청아.
목걸이를 본다고 나도 모르는 사이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저도 국가직 헌터라서요. 낯익은 목걸이에 저도 모르게 그만.”
“아… 헌터셨군요.”
그제야 살짝 경계를 누그러뜨린 이청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사시나 봐요?”
“아니에요. 직장 동료 좀 만나러 왔어요.”
“아하.”
그렇게 영양가 없는 몇 마디를 주고 받는 사이.
1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꾸벅.
“그럼 안녕히가세요.”
“아, 네! 안녕히가세요.”
서로에게 어색한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또각. 또각.
저벅. 저벅.
… 뭐야.
갈라질 거라 생각했는데 이청아와 난 완벽히 똑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아마 이청아도 속으로 저 새끼 뭐지라고 생각하고 있을 듯했다.
“동… 동료분 집이 이쪽인가 보네요.”
“네 하하…. 그러게요.”
뚝.
그렇게 둘의 발걸음이 멈춘 1107호실.
동시에 멈춘 발걸음에 이청아가 조심스럽게 날 돌아봤다.
“혹시 만나러 오셨다는 분이…?”
“김희연 님이요.”
“!!”
김희연이란 이름에 이청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청아 역시 같은 사람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꾸욱.
이청아가 쥐고 있던 열쇠를 뒤로 감추며 날 바라봤다.
“저 초면에 실례지만… 헌터증 좀 보여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희연이와는 무슨 관계시죠?”
엘리베이터에서보다 날 더욱 경계하는 눈초리였다.
희연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이청아와 김희연은 직장 동료 이상으로 친한 모양이었다.
스윽.
“헌터증은 없고.”
어플을 실행시킨 뒤 김희연이 보냈던 메시지를 보여줬다.
“!”
도움을 요청하는 메시지에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이청아.
이청아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철컥.
메시지를 확인한 뒤 쥐고 있던 열쇠로 문을 여는 이청아.
바짝 날이 서 있던 경계심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저벅.
방으로 들어가는 이청아를 따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김희연의 시크한 느낌과 김소연의 아기자기한 느낌이 한데 뒤섞여 있는, 따듯한 느낌의 집이었다.
“백운 님이셨군요.”
조금 전 메시지에서 내 이름을 본 모양이었다.
“네, 제가 백운이에요.”
안쪽으로 몇 걸음 더 옮긴 이청아가 핸드폰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나와 똑같은 어플이 실행되어 있었고.
어플 최상단엔 조금 전 내 핸드폰에 떠 있던 것과 같은 메시지 창이 올라와 있었다.
# 청아야, 나랑 소연이가 일주일 동안 연락이 되지 않으면.
지원을 받아 우리를 찾아 줄 수 있을까?
어려운 부탁해서 미안해.
부탁할 수 있는 게 너밖에 없다.
절대… 혼자서 찾으면 안돼.
지원이 불가능하다면 절대 찾지마.
그리고 바로 밑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 아직 연락이 닿지 못했고.
닿는다 한들 백운 님이 우릴 도와줄지 모르겠지만.
만약 백운 님을 만난다면 청아 네가 그분에게 길을 알려줬으면 해.
…!
메시지의 마지막 줄.
# 우릴 찾게 된다면 꼭… 소연이를 먼저 찾아줘. 부탁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