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10년의 기억은 여기서
제대로 찾은 모양이었다.
흐물거리던 걸 썰자 정혁은 더 이상 재생하지 못했다.
발과 손끝을 시작으로 흐물거리는가 싶더니 녹아내리고 있는 정혁의 몸.
“말도 안… 돼.”
가만 보면 이런 새끼들이 유독 양심이 없어.
수백의 아이들은 잔인하게 죽이고 인형으로 만든 놈이.
이제 뒤질 때가 되니 저런 표정을 지으며 안된다는 말을 지껄이다니.
나쁜 새끼를 한두 번 보는 건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기가 찼다.
아.
정혁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
물어볼 게 있었다.
이곳에 있던 인형들과 마찬가지로 보육원에서 인형에게 해체당하던 5급 헌터들.
“야 사람들 장기는 어디다 쓴 거냐.”
모두 밝혀진 건 아니었지만.
데몬이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방법은 다양했다.
사람을 죽이거나 잡아먹음으로써 힘을 키우는 녀석들이 기본.
그 외에도 데몬마다 강해지는 능력은 각지각색이었기에 정혁 역시 장기를 가지고 무언가를 한 건가 싶었다.
“어차피 뒤질 거 말하고 가라.”
정혁이 공허한 눈으로 날 응시했다.
죽음을 깨끗하게 받아들였다기보단 악을 쓸 힘조차 남지 않은 듯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구한답시고 데려와서 피랑 장기를 뺀 거에 대한 최소한의 속죄는 되지 않겠어?”
“속죄…? 풉.”
속죄란 단어에 정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실제로 속죄하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웃는 꼬라지를 보니 대답은 둘째 치고 당장 죽여버려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나의 공간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를 위한 일인데 속죄라니… 웃기지도 않네.”
공간을 위해 어쩔 수 없다…?
정혁에게 오기 전 살폈던 공간을 봤을 때 이곳은 일이 년 사이에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들인 게 아니라면 엄두도 못 냈을 복잡한 구조로 공간은 이루어져 있었다.
텅텅 빈 월미도와 이곳에 자리를 잡은 데몬.
심지어 혼자 숨어있던 게 아니었다.
수백 기의 인형과 함께 터전을 꾸린 상태.
누군가 월미도로 정찰팀만 파견했더라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버려진 지 오래됐지만.
11년 전부터 그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아무도 이곳을 의심하지 않는 게 가능한가.
일어났던 모든 사건을 확인한 건 아니었지만.
주로 사건이 일어난 곳은 월미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들이었다.
애초에 인형을 끌고 다니며 보육원의 아이들까지 데려가야 하니 도보로 이동이 가능한 곳이었던 것.
의심을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라면?
의도적으로 장기를 빼낸 정혁과.
이상하리만치 용의선상에 포함조차 되지 않았던 월미도란 장소까지.
정혁은 이것을 위해 어쩔 수 없는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스르르…!
온몸이 다 흐트러진 정혁.
마지막으로 얼굴이 흐물거리기 시작하자 정혁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난… 버려진 이들… 을… 구했… 다.”
“….”
상식적으로 절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뒤틀려 버린 정혁의 정의.
정혁은 그 정의가 옳았다는 걸 부정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자기 암시를 걸듯 끝까지 되뇌이다 숨이 끊어진 정혁.
“흐음.”
복잡한 머리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도착해 있던 부재중 메시지로부터 시작됐던 일.
사건의 본체였던 데몬까지 죽였음에도 뭔가 떨떠름한 맛이었다.
회귀 전에 뭐라도 봤다면 모를까.
이상하리만치 알려지지 않았던 보육원의 사건.
그때 당시엔 이런 사건이 있었는지조차 몰랐었다.
아마 그때까지도 이놈의 행각이 계속됐던가.
누군가에 의해 끝맺음 당했지만 거기서 꼬리가 끊겼던가.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뭐… 나머지는 알아서 알아내겠지.”
김소연을 구한 뒤 지부 사람들과 함께 월미도로 오기로 한 이청아.
이후의 조사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들이 이어나갈 터였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김희연과 김소연을 돕는 것이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했단 생각이 들었다.
슥.
고개를 돌려 김희연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라이플 조준경을 통해 정혁의 죽음을 지켜봤을 김희연.
천천히 가볼까.
수리검으로 갈까 싶었지만.
김희연에게 정리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거 참.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래저래 찜찜하구만.
묘한 찜찜함을 느끼며 김희연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 * *
“….”
정혁이 죽는 걸 마지막으로 조준경에서 눈을 뗀 김희연.
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는 김희연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 울고 있는 거지?’
울고 있는 김희연 본인조차 눈물이 흐르는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그저, 무언가 허무했다.
- 다 함께 기다리고 있을게.
10년 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정혁의 말과 자신을 올려다보던 아이들의 모습.
그 모습과 말은 10년 동안 한 시도 쉬지 않고 김희연을 괴롭혔었다.
때문에 무려 10년이란 시간동안 정혁을 찾아다녔던 것.
물론 어렸던 때와 능력을 개방하기 전까지는 주어진 환경과 능력의 한계 때문에 본격적으로 찾진 못했지만.
머릿속엔 언제나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이게 내가 바랐던 끝인 건가.’
의문이 들었다.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10년의 기억을 만들어줬던 정혁이 죽은 지금.
분명 기뻐야 할 터인데, 후련해야 할 터인데도 김희연은 그러지 못했다.
‘난 대체 무얼 위해서.’
때때로 생각했었다.
10년 전에 사라진 아이들이 살아있을 확률은 몹시 희박하며 헛된 희망이라는 걸.
그럼에도 포기하는 건 불가능했었다.
‘과연 아이들을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나를 위해서였을까.’
막상 이 시점이 오니 헷갈렸다.
10년동안 정혁을 찾아다닌 게 정말 그 알량한 희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10년 동안 자신을 괴롭히는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였는지 말이다.
저벅.
옆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김희연이 고개를 들었다.
“…!!”
“도… 도와주세요.”
많은 수의 아이가 겁에 질린 채 김희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직전 보육원에서 끌려온 아이들이었다.
‘아.’
스윽.
기다란 라이플을 뒤로 치운 김희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눈앞의 아이들에게서 10년 전에 자신을 올려다보던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괜찮아 애들아. 이제 괜찮아.”
다가가 팔을 벌리자 겁에 질려있던 아이들이 김희연에게 달려왔다.
총을 쥐고 있어 다가오지 못하고 있던 것 같았다.
안기기 무섭게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
김희연이 그런 아이들을 따듯하게 안아주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괜찮아.’
* * *
못… 못 가겠네.
금세 걸어 위까지 올라왔지만.
눈물 바다가 된 모습에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저런 분위기는 쉽지 않지.
괜히 끼어들고 싶지 않아 올라가던 중 자리를 잡고 몸을 앉혔다.
“아이고야.”
힘든 싸움은 아니었지만, 이곳에 도착해서부터 본 찝찝한 광경들 때문이었을까.
이상하게 지친 느낌이 들었다.
슥.
고개를 돌려 조금 전까지 정혁과 수백 기의 인형이 있던 장소를 내려다봤다.
낙원이라.
처음엔 가볍게 무시해버렸지만.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던 정혁을 보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낙원이긴 하지.
정혁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들어가 보지 않아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분명한 건 한 가지 있었다.
적어도 이곳이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낙원은 아니라는 것.
이곳은 그저 단 한 명만을 위한 낙원이었다.
부우우웅…!!
혼자 의미 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월미도로 달려오는 차량들의 불빛이 보였다.
아마 이청아의 안내를 받은 지부 사람들인 것 같았다.
풀썩.
완전히 몸을 눕히고 차량들이 가까워지길 기다리며 잠시 눈을 감았다.
돌아갈 땐 얻어 타고 가야겠다.
* * *
불이 꺼진 어두운 회의실.
“무슨 소리에요? 더 이상의 공급이 불가능하다니.”
# 월미도가 당했네.
“뭐라고요…?”
자리에 앉아있던 연수정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월미도가 당하다니.
그렇게 신경 써서 관리하라고 했는데 대체 뭘 했단 말인가.
#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관리는 완벽했어. 그 데몬 놈이 쓸데없는 것들을 끌어들인 게지.
월미도가 버려지게 만든 사람들.
연수정 역시 그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버려지게 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럴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는 정혁을 숨겨야 했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데몬 자식…! 그렇게 뒤를 봐줬는데.’
버려진 이들을 구하겠다면서 아이들을 빼돌려 장기를 제공하고 월미도의 은폐를 약속받은 정혁.
연수정이 생각해도 완전 이율배반의 끝판왕인 싸이코였다.
# 어떻게 할까?
“….”
마음 같아선 한 소리를 퍼붓고 싶었다.
담당이라는 인간이 물이 다 엎질러지고 나서야 어떻게 할지를 물어오다니.
‘마가 꼈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큰 손인 히무라가 죽으며 일본과의 커넥션이 약해진 것도 모자라 이번엔 중요한 공급처인 월미도가 날아가 버렸다.
‘그나저나 그놈이 거느린 인형만 수백 기일 텐데.’
마이크로 입을 가져간 연수정이 입을 열었다.
“월미도를 공격한 건 누구죠? 인천 지부는 관리하에 있었을 텐데요.”
# 그게 좀 이상하더군.
‘이상하다…?’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목소리가 말을 이어나갔다.
# 인천 지부의 말로는 10급 헌터가 혼자 월미도를 날렸다고 해. 함께 있던 인천 지부의 헌터가 있었지만 그리 큰 영향을 끼쳤을 거 같진 않고.
“뭐라구요…? 10급? 뉴스랑 얘기가 다른데요.”
# 공식적인 발표에선 본인이 빠지길 원했다고 하더군.
공식적인 기사에선 빠졌지만.
지금 듣고 있는 말이 더 정확한 보고였다.
인천 지부에 있을 협력자를 통한 정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 10급 헌터가 뭐 하는 인간인지는 지부에서도 모른다고 하더군. 나도 들은 건 이름뿐이야. 10급 답게 알려지지도 않은 놈이고.
무언가를 보거나 들은 건 아니었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연수정을 엄습해왔다.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그 인간에게 많은 방해를 받을 것 같은 찝찝한 기분.
“그 10급 헌터, 이름이 뭐죠?”
# ….
잠시 뜸을 들이던 건너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 백운.
* * *
아따 잘 날아간다.
고개를 들어 하늘로 뜬 비행기를 바라봤다.
월미도에서의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지체 없이 달려온 인천공항.
“백운 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될지 모르겠어요.”
“이제 그만 주셔도 될 거 같습니다.”
우물쭈물거리는 김희연과 김소연을 향해 강하게 손을 내저었다.
구해줘서 고맙다며 벌써 열 번도 넘게 감사 인사를 받은 상태였다.
“이렇게 마중까지 나와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항상 느끼지만 이런 상황이 몹시 어색했다.
조금만 길어지면 호다닥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낯간지러운 상황.
“혹시… 그 문은 보셨나요?”
둘의 집에 들어가 비틀어 부숴버렸던 문 손잡이.
뜬금없는 질문에 웃음을 터뜨린 김소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에 있던 것들도 다 없애버렸어요. 벽지도 갈고, 문도 갈고, 전부 다 새 걸로 바꿨어요!”
“잘하셨습니다.”
엄지를 치켜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희연이 입을 열었다.
“그리스에 가시면 꼭 연락해보세요. 도움을 주실 거예요.”
그리스로 간다고 하니 명함 한 장을 건네준 김희연.
명함엔 국가직 2급 헌터라는 신분이 적혀 있었다.
“옙, 꼭 연락해볼게요.”
# 그리스 행 13시 비행기 탑승 수속을 시작하겠습니다.
타야 하는 비행기의 방송이 들려왔다.
놓고 갈세라 호다닥 인사하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백운 님.”
“네?”
김희연의 입가로 밝은 미소가 그려졌다.
오.
뭔가 김희연의 이미지와는 잘 매칭이 되지 않지만.
처음으로 보는 밝은 미소였다.
“돌아오시면 꼭, 밥 사드릴게요.”
씨익.
그런 김희연을 향해 더 맑은 미소로 화답했다.
“기대하겠슴다!”
우렁찬 대답을 한 후.
비행기를 타러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자 그리스로… 드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