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밤바다 수영
“대혁 님!”
잠이 덜 깬 얼굴의 이연화가 절벽으로 달려왔다.
먼저 도착해 절벽에 서 있는 김대혁.
“조심해, 떨어질라.”
허둥지둥 달려온 이연화와 달리 김대혁은 무척이나 침착했다.
조심하라는 말 한마디만 하고 그저 조용히 앞을 바라보고 있는 김대혁.
“….”
옆에 있는 대사관의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김대혁과 다를 것 없이 아무 말도 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
이연화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들의 시선을 따라갔다.
“허.”
고개를 들자 이연화의 눈에 들어온 건 전망이 확 트여 있는 바다였다.
바다의 전망이 확 트였다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스 아테네에 오래 머무른 사람들이라면 이게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기… 기둥들이.”
아테네 앞바다엔 상징적인 다섯 개의 기둥이 솟아있었다.
우뚝 솟은 다섯 개의 기둥과 그중에서도 구름을 뚫고 하늘 높은 곳까지 솟아있던 중앙 기둥.
‘어… 어디 갔어.’
사라지고 없었다.
대체 하늘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가늠조차 안 됐던 중앙 기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나머지 중앙 기둥을 보좌하던 세 개의 기둥 역시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래도 하나는 남았…!?’
쾅! 쾅! 쾅! 쾅!… 쾅!!!
쿠르르릉!!
그나마 한 개는 남아 있네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마지막 기둥.
‘무슨… 소리지?’
꼴깍.
저절로 마른 침이 삼켜졌다.
꽤 먼 거리임에도 귓가로 선명하게 들려온 엄청난 타격음.
대체 뭐가 두들겼기에 수백, 어쩌면 수천 년을 존재했던 기둥이 저렇게 산산조각이나 무너지고 있는 걸까.
“티… 팀장님.”
“처음엔 내가 잠이 덜 깬 줄 알았어.’
바다에서 기둥이 무너진다는 신고를 받고 달려 나온 김대혁과 대사관 헌터들.
처음엔 장난 전화라고 생각했었다.
생긴 지 일이 년 된 것도 아니고 그 오랜 시간을 솟아있던 지형인데 무너진다니.
- 뭐… 뭐야 이게.
반신반의하며 절벽에 도착한 김대혁이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장난 전화가 아니었다.
이미 사라진 중앙 기둥을 시작으로 하나씩 무너지고 있는 기둥들.
하도 현실감이 없어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있는 걸까.”
긴장하고 있는 건 이연화뿐만이 아니었다.
김대혁을 포함해 그 자리에서 기둥이 무너지고 있는 걸 보고 있는 모든 이가 긴장한 상태였다.
“비상 대기조한테도 연락을 해둘까요?”
“아직 나오진 말고 준비만 하라고 연락해.”
“알겠습니다.”
기둥이 무너지는 건 비현실적이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애초에 사람들이 사용하던 지형지물이 아니었기에 있든 없든 외관상의 차이를 제외하곤 아무런 영향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기둥을 부수고 있는 무언가였다.
‘사람일 확률은… 적다.’
부하들이 동요할까 쉽사리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지만.
어쩌면 노네임드급 데몬일 수도 있었다.
‘충분하지.’
까다로운 능력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저 정도의 괴력이라면 노네임드라 불러도 과장이 아닌 수준.
“백운 님은 괜찮을까요…?”
이연화의 걱정에 김대혁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희연이 그토록 강하다 말했던 백운.
김대혁이 아는 한도에서 그리스 아테네에 생긴 변화라곤 백운이 왔다는 것 말곤 없었다.
“혹시 모르니 구급팀도 대기시켜. 그리고… 조금만 더 지켜보자고.”
명령을 전달하는 김대혁의 목소리엔 평소에 볼 수 없는 긴장이 배어있었다.
* * *
우루루룽!
시원하게 무너지는구먼.
마지막 기둥이 무너짐과 동시에 오른손을 감싸고 있던 비늘이 사라졌다.
세만트라의 머리로 하늘탑을 박살 낸 후 연이어 나머지 기둥에도 주먹을 꽂았었다.
이거이거… 어디까지 강해진 거냐구.
마지막으로 다 무너진 기둥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유탈라스의 비늘을 감싸면 평소엔 사용할 수 없는 괴력을 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하늘 높이까지 날아간 후 마운티거도 부술 수 있었던 것이다.
훨씬 세졌어.
사로카를 쪼개버렸을 때도 느꼈지만.
돌산으로 들어가기 전보다 유탈라스의 비늘을 사용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괴력의 한계치가 대폭 상승했다.
마운티거 때처럼 딱히 하늘로 올라가 가속력을 붙인 게 아님에도 가볍게 부서져 버리는 지형들이 그 증거였다.
나와 함께 강해지는 무기라.
몹시 흡족스러웠다.
노력을 해 두 배 강해지더라도 무기를 사용하면 뻥튀기가 되어 그 이상으로 강해지니 흡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단 돌아 가볼까.
다 무너져 내려 깨끗해진 정면을 확인한 후.
몸을 돌려 절벽으로 수영을 시작했다.
날개 있었으면 금방 갈 텐데.
아테네가 사라진 후 잠시 감상에 잠겨 있는 사이.
이카로스의 날개를 지탱해주던 연기는 모두 소모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 꾸어어!
오랜만에 눈물을 흘리기 직전이었는데 바다로 추락해버리다니.
평생 눈물 흘리지 말라는 신의 계시인지 말도 안 되는 타이밍이었다.
그래도 뭐.
수영도 나쁘지 않아.
독수리… 아니지.
구름 비둘기쉨과 한바탕 하고 기둥까지 박살 내서인지 몸이 땀으로 젖어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하는 바다 수영.
위험하니까 밤 수영은 하지 말란 거겠지만.
굳이 데몬이 아니더라도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밤바다 수영은 몹시 위험했다.
슥.
고개를 들어 바닷물을 비추는 달빛을 바라봤다.
하지 말란 거일수록 참 좋단 말이야.
순간 말을 더럽게 안 듣는 청개구리형 인간들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마치 세상에 나 혼자만 존재하는 듯한 고립감과 땀에 젖었던 몸을 감싸며 온도를 낮춰주는 시원한 바닷물까지.
밤바다 수영이 더 위험했다고 해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정취가 존재했다.
“어푸!”
깊게 호흡을 들이마시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
수영을 시작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물놀이로 인한 극심한 배고픔을 느끼려는 찰나, 눈앞으로 몸을 던졌던 절벽이 나타났다.
다 왔… 는데.
열심히 잠수하며 수영에 집중하느라 몰랐었는데.
절벽 위가 무척 밝았다.
사람도 많이 모인 거 같은데.
빛과 함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안 몰릴 수가 없었다.
새벽이 다 되어 가는 시간대에 바다에 솟아있던 것들이 다 무너져 버렸으니.
옆동네에 불이 나도 구경하러 가는 사람의 호기심을 봤을 때 참아낼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다.
시… 신발이랑 옷 어떡하지.
바다로 뛰어내리기 전.
마을에서 급구한 트렁크형 수영복과 얇은 반팔 티 한 장을 제외하곤 모두 절벽 옆에 숨겨놓고 왔었다.
세만트라를 박살낸 후엔 반팔에 피까지 튀어 바다에 드랍하고 온 상태.
꼴깍.
이대로 올라가면 미친놈 행이다.
모두가 잠에 들었어야 정상인 시간대.
그 시간대에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도 모자라 바다에서 수영복 한 장만 입은 외국인이 튀어나온다면?
딱히 불합리한 일은 당하지 않더라도 평생 사람들의 기억 속에 미친놈으로 남게 될 확률이 높았다.
일단 토끼고 나중에 찾으러 오자.
연화도 있을 수 있으니까.
이연화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굳이 보여줄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거지 같은 꼬라지를.
첨벙!
방향을 틀어 절벽 옆 수풀 지대로 향했다.
당장 지갑도 절벽 위에 있기에 어딘가로 떠날 수도 없었다.
저 사람들이 돌아갈 때까지 숨어 있을 수밖에.
찰박.
“후우!”
바다에서 빠져나와 젖은 머리를 털어냈다.
꼬로록.
배가 미친 듯이 고프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디서 존버를 해볼까.
여기저기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중.
끼릭.
응?
부자연스러운 쇳소리에 풀숲 안쪽을 바라봤다.
무언가 있었다.
뭐야.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수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소리를 내는 것의 정체를 확인하곤 몸이 굳기 시작했다.
여러 신기한 물체들이 합쳐져 있는 연분홍색의 안광을 뿜어내고 있는 것.
안돼.
회귀 전에 본 적이 있었다.
광범위한 공격 기술 외에도 마도공학을 이용해 신박한 물건을 만들 수 있었던 이연화.
언제인가 이연화가 이것저것 물체를 조합해 마도공학으로 만든 정찰 기계를 보여줬었다.
그 기계가 지금 눈앞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백운 님!?”
아니나 다를까.
위쪽 절벽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이연화의 기계에 발견된 이상 도망치는 건 무의미했다.
오히려 도망치는 게 더 수상하고 이상해 보일 것이기에.
자연스럽게 웃으며 절벽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오긴 왔는데.
빠안.
상당히 쪽팔리네.
절벽으로 올라가자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지금 기둥을 부숴버린 존재가 밝혀지지 않아 한참 심각했던 거 같은데.
그러던 중 수영복 빤쓰 한 장 입은 새끼가 물에 젖은 생쥐 꼴로 올라왔으니 안 쳐다보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으… 음. 괜찮으… 세요? 백운 님.”
이연화가 눈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똑바로 바라보기엔 내 복장이 좀 부담스러운 것 같았다.
“네… 네. 아주 멀쩡합니다.”
“다… 다행이네요.”
마음 같아선 숨겨놨던 옷가지와 물건들을 들고 탈주하고 싶었지만.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앞으로 안 볼 게 아니라면 무의미한 짓이었다.
“….”
대혁 님, 그렇게 쳐다만 보지 마시고 말 좀 걸어주세요!
괜찮다는 대답을 들은 후엔 애써 고개를 돌리고 있는 이연화와 애초에 날 모르니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사람들까지.
지금 이 몹시 쪽팔리고 불편한 정적을 깨줄 수 있는 건 김대혁이 유일했다.
“백운 님, 왜 이렇게 몸이 다 젖으셨나요…?”
나의 바람을 들은 건지 김대혁이 질문을 건네왔다.
한밤중에 폭싹 젖어 왔으니 나였어도 궁금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수영 좀 하고 왔습니다.”
“수… 수영요.”
많이 당혹스러운지 말을 더듬는 김대혁.
잠시 마음을 추스른 김대혁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수영해서 오신 건가요?”
지형을 부순 게 나라는 걸 말해도 되는지 잠시 고민이 됐지만.
딱히 잘못하거나 한 건 아니었기에 솔직하게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스윽.
손을 들어 기둥이 있었던 곳을 가리켰다.
“저곳에서부터 왔어요.”
* * *
“….”
홀로 남은 김대혁이 정면을 응시했다.
- 제가 부쉈어요.
수영을 어디서부터 하고 온지를 말한 후.
백운이 이어서 한 말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이 기둥들을 다 부쉈다는 백운.
이야기를 듣기 전에 사람들을 물렸던 게 다행이었다.
분명 큰 파장이 있었을 것이었다.
‘낮에 봤던 데몬들의 시체.’
누가 그렇게 데몬들을 박살냈나 궁금했었는데.
더 이상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다.
‘이유는 내일 들어봐야겠지만.’
- 꼬로록.
무언가를 더 물어보려는 순간.
백운의 배에서 엄청난 소리가 났었다.
당장 뭘 넣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던 우렁찬 소리.
무시하는 게 불가능한 소리였기에 김대혁은 더 질문을 하지 않고 이연화를 시켜 백운을 대사관 식당으로 안내했다.
‘강하다 하더니.’
김희연의 말을 떠올린 김대혁이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규격 외였군.’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