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하루 전
빛 한 줄기 없는 아테네의 골목.
기다란 검은색 망토를 걸친 남자가 골목으로 들어섰다.
부상을 입은 건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힘겹게 걸음을 옮기던 남자의 몸이 골목 한쪽으로 쓰려졌다.
“하아⋯. 하아.”
아테네의 사신.
많은 이들이 로인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풀썩.
골목에 기대앉은 로인이 가쁜 숨을 쉬며 옆구리를 만졌다.
두어 시간 전 갑자기 나타난 백운에게 걷어차인 부위였다.
‘말도 안 되는 위력.’
눈 깜짝할 사이 나타난 백운.
반응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였다.
미리 갑주를 두르고 있지 않았다면 맞는 순간 죽었을 것이다.
- 콰앙!
굉음이 들린 순간.
옆구리를 시작으로 말도 안 되는 고통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총이나 칼을 날아와도 거뜬히 막을 수 있는 갑주였다.
물론 지금까지 맞아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어떻게 날 본 거지.’
로인이 지금까지 총이나 칼에 맞은 적이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도 로인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볼 수 없는 걸 넘어 바로 앞에서 총을 쏘고 칼을 휘둘러도 상대의 물리력은 로인에게 닿지 않았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인지하지 못한 이들은 날 건드릴 수 없다.’
로인이 개방한 사신화의 능력이었다.
종종 특수한 눈을 개안한 능력자들에겐 보인 적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공격당한 적은 없었다.
이번이 능력을 개방한 후 로인이 처음으로 맞은 유효타인 셈.
찌릿.
끊임없이 느껴지는 고통에 로인이 고개를 숙였다.
개방 전에 맞아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세기는 처음이었다.
‘더럽게 아프네.’
달칵.
로인이 들고 있는 낫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신화 능력을 개방하며 생긴 건 세 가지였다.
존재를 지워줌과 동시에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갑주와 공격을 위한 낫, 그리고 상대의 5일 뒤 죽음을 볼 수 있는 눈이었다.
‘하나 깎인 건가.’
로인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낫을 쳐다봤다.
누군가 들으면 사기적인 능력이라고 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능력이었지만.
공짜는 아니었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5일 뒤에 죽을 이의 목숨을 거두는 것.
그렇게 해서 낫에 있는 생명 구슬이 다 닳기 전에 채워 넣는 게 능력을 계속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아직 여유는 있지만.’
지금까지 거둬들인 목숨이 꽤 됐기에.
적어도 2주 정도는 이 상태로도 버틸 수 있는 양이 낫에 깃들어 있었다.
으득.
‘그 여자는 죽었어야 하는데.’
인상을 찌푸린 로인이 이연화를 떠올렸다.
메토스의 타겟이 되어 몸에 피안화의 문양이 새겨진 여자.
어떻게든 그 여자의 목숨을 거뒀어야 했다.
‘참사가 벌어지겠지.’
5일 뒤의 죽음을 보고 하루 전에 목숨을 거두러 간다.
다른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 규칙이었지만.
로인은 유독 이연화를 주시하고 있었다.
‘메토스의 피안화.’
로인이 피안화를 본 게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다른 도시인 로도스.
로도스에선 1년 전 데몬에 의한 엄청난 대학살극이 벌어졌었다.
‘⋯.’
학살극이 벌어지기 전.
로인이 지냈던 곳은 아테네가 아닌 로도스였다.
그곳에서 죽음에 이를 이들의 목숨을 거둬들이고 있었던 것.
그 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는 날이었다.
- 제발요, 오늘 제가 약을 챙기지 않으면 동생은 죽을 거예요.
조금 다른 게 있다면 목숨을 거둬야 하는 상대가 무척이나 어린 소녀였단 점이었다.
죽는 날까지 하루를 남겨둔 시점.
평소처럼 목숨을 거둬야 했지만 간절히 비는 소녀의 모습에 로인은 차마 낫을 휘두를 수 없었다.
- 너는 어차피 죽는다.
- 괜찮아요, 동생 약만 챙겨 줄 수 있다면 상관없어요.
끝내 낫을 휘두르지 못한 로인은 소녀를 보내주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운명에 의해 죽을 아이였기에 고작 하루 더 살게 해주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집을 향해 달려가는 소녀의 목덜미엔 불길한 검보라색의 피안화가 피어있었다.
‘거두었어야 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느낀 건 다음 날이 되어서였다.
평소와 같이 5일 뒤에 죽을 이를 찾아 도심지를 거닐고 있을 때.
- ⋯!!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운명이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죽음이 보이지 않았던 이들인데.
모두가 짜기라도 한 듯이 갑작스레 죽음이 모든 사람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심지어 떠오른 죽음이 가리키고 있는 건 5일 뒤가 아닌 지금이었다.
- 불가능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죽을 운명이었다면 5일 전에 이미 죽음이 보였어야 하는데.
마치 누군가의 죽음이 전염병처럼 퍼져 원래 죽지 않아도 될 이들까지 죽게 만든 것 같았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 얼른 와, 누나는 시간이 없으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젯밤 로인의 마음이 약해져 보내준 소녀였다.
소녀의 목덜미에선 완전히 개화한 피안화가 불길한 빛을 뿜으며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소녀의 목덜미에 있던 피안화에서 빛이 뻗어 나갔고, 그 빛이 닿은 곳에선 처음 보는 균열이 생겨났다.
- 으⋯ 으아아! 데몬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겨난 균열에선 셀 수 없이 많은 데몬들이 튀어나왔고.
잠시 후엔 말도 안 되게 강한, 데몬들을 이끄는 메토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
그야말로 참극이었다.
전투가 가능한 모든 이가 공격했지만, 메토스는 약간의 상처만을 입었을 뿐 결국엔 모든 이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으득.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로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로도스의 참극 이후 로인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잠에 든 적이 없었다.
매일 밤 로도스에서 죽은 이들이 원망 섞인 눈과 목소리로 로인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목숨을 거두는 일을 하면서 죽은 이들 때문에 잠을 못 잔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한심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능력으로 사신화를 개방했다고 한들 적은 나이의 로인에겐 아직까지도 사람의 죽음이 익숙지 않았다.
능력을 지키기 위해 자기 합리화를 하며 목숨이 하루 남은 이들의 목숨을 거두는 게 최대였다.
‘이번에는 꼭 죽였어야 했는데.’
로인이 얼굴을 감쌌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다른 이는 몰라도 피안화를 가진 이는 꼭 죽여야 했는데, 유일하게 실패한 두 번의 경우가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피안화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아까 그건⋯ 뭐였지.’
로인이 백운과 대치하고 있을 때 봤던 걸 떠올렸다.
옆구리를 걷어차여 데미지가 컸지만, 로인은 어떻게 해서든 이연화의 목숨을 거둘 생각이었다.
고통은 둘째 치고 로도스와 같은 참극이 아테네에서까지 되풀이되는 건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빠르게 물러난 건.
- 일렁.
백운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변화 때문이었다.
처음엔 고통 때문에 시야가 흔들린 건가 싶었지만.
다시 보니 제대로 보였었다.
이연화에게서 보이던 선명한 죽음이 흐릿해지며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을 말이다.
‘⋯ 불가능해.’
죽음이 보이는 순간 그건 그 사람의 운명이 정해졌음을 뜻했다.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해도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확정된 죽음의 운명.
이연화의 위에서 흐릿해지는 죽음을 보며 로인은 혼란스러웠고, 그렇기에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꽈악.
로인이 고개를 흔들어 찾아온 혼란을 털어냈다.
‘정해진 죽음은, 운명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 * *
“연화 님, 잘 드시네요. 아까 공항에서도 많이 먹었을 텐데.”
옥상에서 내려와 들어온 이연화의 집.
2인용 아담한 식탁에 앉은 이연화가 먹던 면을 끓고 고개를 끄덕였다.
“배부른데 맛있게 끓여주셨으니까 먹는 거예요.”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옥상에서 내려온 이연화의 배에선 폭풍 소리가 났었다.
마치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먹은 채 굶은 사람처럼 말이다.
내 라면이 예술이긴 하지.
회귀 전 삼시 세끼 끓여 먹던 라면이었다.
그때 단련했던 라면 실력을 꼬로록거리는 이연화를 위해 아낌없이 발휘했다.
후룹.
국물까지 깨끗하게 비운 이연화가 그릇을 내려놨다.
“흠. 흠.”
순식간에 라면 한 그릇을 삭제해버린 게 부끄러운지 헛기침을 하는 이연화.
띠링.
옆에 있던 이연화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 대혁 님에게 알리죠.
옥상으로 내려오며 이연화에게 한 말이었다.
로인의 말이 맞다면 이연화에게 피안화를 새긴 메토스가 도착하기까지 채 하루도 남지 않은 상황.
처음엔 어디 외딴곳으로 가 메토스를 맞이할까 했었지만.
메토스가 꼭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나타나란 법은 없었다.
문이 다른 데서 열리면 대참사다.
이연화가 있는 곳이 아닌 도시 한가운데서 문이 열리면 아테네는 아무런 대비도 없이 무더기로 밀려오는 데몬을 맞이해야 했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대사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김대혁이었다.
“시간이 걸린다고 하시네요.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건 대사관 단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메시지를 읽어 주는 이연화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람들이 현재 상황을 인지하고 대비를 시작했으니 된 것이었다.
드륵.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이연화.
호다닥.
“⋯?”
식탁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향하는 이연화에게 바짝 따라붙었다.
자신보다 타인의 목숨을 더 소중히 여기는 이연화.
피안화가 새겨진 자기만 사라지면 메토스가 오지 않을 거란 말을 들은 상태였기에 혼자 둘 순 없었다.
그러진 않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기에.
졸졸졸.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졸졸 따라가는 나에 이연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화⋯ 화장실 가려고요.”
“으음.”
게슴츠레 뜬 눈으로 이연화를 노려봤다.
감히 거짓말이라면 당장 말하라는 의미였다.
“풉⋯. 저도 창피해요, 오래 수사했는데도 꼬리조차 잡지 못했던 사신 사건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사신에게 죽음을 예고 받으면 피하지 못할 거라고 자포자기해 버린 게요.”
아테네 대사관에서 일하며 수많은 사신 사건을 겪어 온 이연화였다.
당장 공격을 해도 통과하기만 하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메토스란 놈. 제게 죽음을 확정시킨 게 문에서 나왔던 놈이라면 얘기가 달라요. 제가 그놈 손가락 두 개 날렸거든요.”
말하면서도 이연화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자신에게 죽음을 새겨 넣은 게 사신이라 생각했을 땐 3일 동안 죽을 생각만을 하며 자포자기하며 지냈었는데.
메토스란 걸 안 이후부터 다시 싸우고자 하는 스스로의 태세변환이 사뭇 창피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백운 님은 정말 괜찮으신가요?”
“네?”
이연화가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로인의 말에 의하면 메토스는 말도 안 되게 강하잖아요. 그리고, 백운 님이랑 제가 만난 건 일주일도 안 됐고요.”
미소를 지은 이연화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백운 님은 아무런 책임도 없어요.”
책임이 왜 없어요.
나 때문에 기둥으로 갔다가 만난 건데!
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것 때문에 이연화를 지키려는 건 아니었기에 잠시 접어두었다.
대신.
“연화 님은 어떻게 했을 거 같아요?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된 나한테 피안화가 그려졌다면요. 그냥 죽도록 내버려 뒀을 거예요?”
“그건⋯.”
잠시 놀란 표정을 지은 이연화가 뭐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안 그랬을걸요.”
- 이거 좀 먹어봐요. 그쪽이 죽으면 또 홀로 남겨질 외톨이 B를 위해서라도 먹으라고요, 외톨이 A님.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나를.
다시 활력을 찾고 살아갈 수 있게끔 도와준 이연화였다.
“⋯.”
뭐라 대답하려다 입을 다문 이연화를 향해 미소를 지어줬다.
“그것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