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적에게 둘러싸였을 때
백운이 있는 부지에서 문이 생기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높은 건물에 위치한 로인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얼른 도망쳐!”
“엄청난 숫자다!”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세요!”
데몬이 나타난 건 꽤 먼 거리였지만 등장한 데몬의 숫자 때문이었을까.
당황한 도시 사람들은 점점 더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
아래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로인에게 익숙했다.
1년 전에 다른 도시 로도스에서 봤던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른 게 있었다.
‘어떻게⋯?’
로도스에선 문이 나타나기 전부터 도시 사람들에게 죽음이 새겨졌었다.
5일 뒤도 아닌 당장 오늘 죽는 죽음이 말이다.
‘어째서 없는 거냐.’
로인의 밑에서 허겁지겁 도망치기 바쁜 시민들.
그런 시민들의 머리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 오늘 죽을 운명은커녕 5일 뒤에도 멀쩡히 살아있을 사람들이란 증거였다.
저들은 그걸 모르기에 저렇게 허둥지둥 도망치기 바쁜 거겠지만 말이다.
드드드⋯!
부지에서 열렸던 문에 이어 도시 위에도 새로운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죽음이 새겨지지 않는 사람들.
로도스 때와는 달랐다.
‘뭐가 다른 거지? 로도스에도 강한 헌터들은 있었다.’
로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도시에 아무리 강한 헌터가 있다 한들 로인이 알고 있는 한 엄청난 수의 군대와 함께 등장하는 메토스에게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 무슨 차이가 있는 거냐.’
- 콰앙!
로인이 어제 갑주를 차고 있었음에도 옆구리로 느껴졌던 고통을 떠올렸다.
규격 외의 위력을 내는 규격 외의 인간.
‘설마.’
어제 일을 떠올리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너무 터무니없는 확률이라 가능성이라고 치부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만약⋯ 그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규격 외의 힘이 메토스와 군대를 뛰어넘는 거라면.’
로인의 상식선에선 불가능했지만, 이 경우라면 지금 도망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이 보이지 않는 것도 말이 됐다.
로도스엔 없었지만 아테네에는 있는 것.
이방인인 백운이었다.
스륵.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로인의 모습이 사라졌다.
⋯.
로인이 아테네를 떠나 도착한 장소는 처음 문이 열렸던 부지였다.
“⋯.”
아무 말 없이 로인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를 바라봤다.
부지에선 눈을 의심케 하는 전투가 벌써 몇 시간 째 이어지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
지금까지 로인이 가지고 있던 모든 개념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백운의 옆에서 마도 공학을 시전하고 있는 이연화.
메토스에게 지목되어 피안화가 그려졌기에 죽음이 확정된 여자였다.
“분명⋯ 분명 오늘이었는데.”
이연화의 머리 위.
어제까지만 해도 선명하게 보였던 죽음의 흔적이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끼아아아아아--!
혼란스러운 로인의 귓가로 들려오는 귀신 울음소리.
저 남자는 아까부터 말도 안 되는 검기를 대체 몇 번이나 뿌려내고 있는 걸까.
‘⋯.’
걱정하던 참극이 일어나지 않아서 기뻐해야 할지.
지금까지 믿고 있던 모든 게 부정당하는 현재에 슬퍼해야 하는지.
뭐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었지만.
지금은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저벅.
생각은 나중이었다.
일단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간다.’
로인이 낫을 꺼내 들었다.
* * *
“대혁 님, 여기 잘 부탁드려요.”
본진에 합류해 엄청난 화력으로 데몬을 부수고 있는 김대혁.
복싱을 베이스로 한 김대혁의 주먹에선 데몬과 부딪힐 때마다 강한 폭발이 터지고 있었다.
굳이 내가 없더라도 충분히 본진을 지킬 수 있는 화력.
“⋯!”
갑작스레 꺼내어진 날개에 놀랐던 김대혁.
김대혁이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박살 내고 와주세요.”
“예입.”
경쾌하게 대답을 한 후 날개를 움직였다.
펄럭!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올라 메토스에게 향했다.
“크어어!”
그런 나를 발견한 건지 울부짖기 시작한 메토스.
군대에게 명령을 내린 건지 땅을 향해 내려가기 바빴던 데몬들이 타겟을 변경했다.
와라 이 새끼들아.
스이카의 데미지로 오른손을 사용하는 건 무리였지만, 없어도 충분했다.
쾅! 쩌억!
날개를 이용한 속도와 두 다리만 있어도 충분했다.
쾅! 쾅! 퍽!
이게 태권도다 이 새끼들아.
빠르게 데몬을 쳐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방금 꺼내 연기의 양도 충분했다.
쿠우!
쐐엑!
사방에서 데몬들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숫자가 많은 만큼 원거리, 근거리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공격을 해대는 녀석들.
마음 같아선 뒤를 돌아 다 후두리고 싶었지만, 목표는 메토스였기에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그저 여유롭게 피해가며 계속해서 발을 휘둘렀다.
후웅⋯ 쾅! 쾅!
길목에 위치한 놈들을 몇 마리나 치워냈을까.
찰나의 순간이지만 작은 틈이 보였다.
작지만 내 한 몸 통과하는 데는 전혀 문제없어 보이는 틈이었다.
우우우우우⋯!
강한 출력을 위해 칼데아로 연기를 끌어모으며 메토스를 응시했다.
만화에서 봤을 법한 네크로맨서를 닮은 모양새.
온몸이 뼈다귀로 이루어진 모습에 다 뜯어진 망토만 걸치고 있으니 로인보다도 더 사신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이 뼈다귀 새끼!
파아앙!
연기를 터뜨리며 순식간에 메토스의 앞으로 날아갔다.
“!!”
엄청난 크기라 그런지 움찔하는 게 유독 눈에 띄는 메토스.
날아온 속도를 살려 내밀어진 메토스의 팔을 걷어찼다.
쾅!!
“크우우우!”
웬만한 자동차 수십 개를 합친 크기의 메토스가 뒤로 밀려났다.
덩달아 아작이 나 바닥으로 떨어지는 오른팔의 뼈까지.
“크아아아아아아!!”
팔이 떨어져 꼭지가 돈 건지 메토스가 커다란 포효를 질러냈다.
쿠아아아아!
주변을 감싸고 있던 데몬들의 몸에서 검보라빛의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버프 같은 건가.
산개되어 있던 데몬들이 빠른 속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조금 전보다 훨씬 빨라진 움직임이었다.
오냐, 다 떨어뜨려 주마.
다시 날개를 움직여 메토스의 머리 위로 착지했다.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달려드는 수백, 수천 마리의 데몬들.
살짝 오금 저리네.
아무리 별거 아닌 놈들이라 해도 저렇게 사방을 메꾸고 달려드니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크오오오오!”
자기의 머리 위에 올라와서인지 메토스가 남아 있는 왼팔을 위로 뻗었다.
사방이 데몬으로 둘러싸여 미세한 달빛 한 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순간.
[앤 보니&메리 리드]
칼데아를 집어넣고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빛의 탄을 뿌리려는 순간.
화악⋯!
공간이 바뀌기 시작했다.
* * *
무슨 조건을 만족한 건지 감도 안 오네.
두리번거리며 옮겨진 장소를 살폈다.
저번엔 사방이 탁 트인 바다의 한가운데였는데.
이번엔 여러 높은 건물로 둘러싸인 길목의 한 가운데였다.
해적이라 이번에도 바다 위겠지 했는데 아니구먼.
옮겨진 공간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양옆으로 보니와 리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서 또 구해온 건지 바다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카우보이 복장이었다.
“너 참 바쁘게 사는구나.”
“우리 살아있을 때보다 더 바쁜 거 같은데.”
쯧쯧 혀를 차는 보니와 리드에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생각해도 참 스펙타클하게 사는 것 같았다.
“그러게요, 저도 의도한 건 아닌데 이게 참 하하!”
멋쩍게 웃자 보니와 리드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저번 작열탄을 개방할 때 상선을 향해 미친 듯이 총을 갈겨대던 모습을 봐서인지 처음과 이미지가 많이 달라진 둘이었다.
“오? 온다.”
“이제야 오네.”
철컥.
한참을 웃다가 무언가를 느끼곤 각자의 총을 꺼내 드는 두 사람.
온다니 뭐가 온다는 거야.
도통 만날 때마다 종잡을 수 없는 보니와 리드였다.
“1분 정돈가.”
“응 1분이면 오겠는데.”
“뭐가 온다는 거예요? 둘만 알지 말고 나도 좀 알려줘요.”
징징거리자 그것도 모르냐는 듯 손가락을 좌우로 휘젓는 보니.
변했어.
확실히 변했다.
감옥에의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게 된 보니.
“한참 해적질을 하고 다닐 때 우릴 노리는 놈들이 많았거든.”
“정말 많았지.”
리드가 보니의 말에 추임새를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은 엄청난 수의 해적단이지만, 우린 두 명이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았을 거 같아?”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턱을 문질렀다.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다.
둘이 가진 화력은 웬만한 해적선에서 뿜어지는 것보다 몇 배는 강했기에.
적들이 다가오기 전에 전멸을 시켰을 터였다.
“우리 둘의 화력이 강하니까 적이 다가오기 전에 다 사라졌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뜨끔.
뜨끔하는 날 보며 고럼 고렇지라는 눈빛을 보내는 두 사람.
두 사람이 동시에 어깨를 으쓱 올리며 등을 맞댔다.
“우린 배만 턴 게 아니거든. 마을도 털었다고.”
대단하시네요.
“그러다 보면 함정에 빠져 많은 수의 적을 근접에서 처리해야 하는 경우도 생겼지.”
더 이상 둘의 대화에 따라갈 수 없었기에 잠자코 있기로 했다.
쿠구구구⋯!
⋯?
발 아래로 진동이 느껴졌다.
뭔진 모르겠지만 많은 수의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거기다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건물 위의 무언가까지.
사람⋯ 인가?
명확한 형태를 가지진 않은 존재들.
그저 검은색 에너지로 이루어진, 지점토 인형 같은 것들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대충 봐도 몇 백은 족히 되어 보이는 숫자였다.
완벽히 포위 됐구만.
이건 보니랑 리드의 할아버지가 와도 살아나가기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나갈 거예요?”
쿵!!
질문을 하기 무섭게 둘러싸고 있던 녀석들이 우리를 향해 날아 들었다.
사방을 빼곡히 메워 도망칠 틈은 전혀 없는 상황.
그럼에도 보니와 리드는 여유로웠다.
씨익.
“어떻게 살아나갈 거냐고?”
동시에 웃어 보인 보니와 리드가 총을 치켜 들었다.
“이렇게.”
* * *
스륵.
보니와 리드의 공간에서 빠져 나와 양손에 쥐어진 리볼버를 바라봤다.
그렇게 살아남으셨다.
내게로 달려들고 있는 수많은 데몬을 바라봤다.
30초?
음⋯. 아니야, 10초.
대략적인 시간을 계산했다.
다가오는 녀석들을 녹이는데 필요한 시간.
[앤 보니&메리 리드 - 동기화]
서 있는 내 양옆으로 붉은색과 푸른색의 사람 형체가 생겨났다.
둘 모두 양손에 리볼버를 쥐고 있는 상태.
공간에서 봤던 둘의 기술을 떠올렸다.
한 번 사용하는 순간 리볼버는 바로 쿨타임으로 들어가겠지만.
상관 없었다.
다 끝나있을 테니까.
양 어깨를 맞대고 있는 세 사람에게 주어진 건 여섯 자루의 리볼버.
이거면 충분했다.
척.
아래를 향하고 있던 여섯 자루의 리볼버가 들어 올려지고.
동기화와 동시에 개방된 기술을 떠올렸다.
다 뒈져서 가루나 되어버려라.
철컥.
[데스페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