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감사 인사
“아니 팔이 뭘 해야 이 지경이 되는 거예요?”
그리스 아테네에서 가장 큰 병원.
병원 의사 마티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봐도 좀 혐오스럽네.
마티가 보고 있는 건 내 오른팔.
내려오는 데몬들을 써느라 쉬지 않고 스이카를 사용한 팔이었다.
“서… 설마 심각한 건 아니겠죠?”
“으음.”
마티가 잔뜩 심각한 눈으로 팔을 살폈다.
빨리 대답해!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만 울부짖었다.
심각하지 않냐는 말에 저런 무서운 얼굴로 으음이라니.
팔을 내밀고 있는 환자 입장에선 일 초가 십 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슥.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고개를 든 마티가 날 응시했다.
“병원으로 오기 전에 치료받은 적 있나요?”
“아뇨, 팔 움켜쥐고 냅다 여기로 달려왔는데요.”
부지에서의 상황이 정리된 후 내 팔을 발견한 김대혁은 곧장 수도 병원으로 연락을 넣어줬다.
멍이 들다 못해 손부터 어깨까지 검붉게 변한 팔에 기겁을 한 탓이었다.
아까보다 더 심해진 팔에 이연화는 옆에서 바짝 굳어 괜찮냐는 말조차 못 건네고 있었다.
“이상하네.”
“뭐… 뭐가 이상한데요?”
말해!
마티가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탁!
“으악!”
갑자기 오른팔을 내려치는 마티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냥 건들기만 해도 아픈 팔을 이렇게 내려치다니.
오는 길에 차가 흔들리며 슬쩍슬쩍 건드려지는 것만으로도 미친 듯이 아팠었다.
“아파요?”
“그럼 당연히 아프… 응?”
그랬던 팔인데.
머선 일이고 이게.
쿡쿡.
왼손으로 오른팔을 찔러봤다.
약간의 고통이 느껴지긴 했지만 아까처럼 뒤로 넘어갈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별로 안 아프죠?”
“어… 네. 뭐지?”
혼잣말을 하며 갸웃거리자 마티가 팔짱을 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외관은 이미 터졌던 피 때문에 이렇지만. 안쪽은 이상하리만치 멀쩡해요. 물론 100% 정상이다는 아니라서 조금 아프긴 하겠지만요.”
“왜죠?”
“그건 제가 환자분한테 묻고 싶은데요.”
어깨를 으쓱 올린 마티가 다시 한번 능력을 발동해 팔을 살폈다.
마티의 오른손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연초록색의 빛.
특수한 기계나 도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몸 상태를 살필 수 있다고 마티는 소개했었다.
“보통 팔 외관이 이 지경이 될 정도의 상태에 들어갔다면, 무슨 치료를 받든 완전한 기능 복구는 불가능하거든요. 그런데.”
살피는 걸 마친 마티가 날 바라봤다.
“환자분 팔은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회복되고 있어요.”
내 몸인데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마티의 말을 들어봤을 땐 심각하다거나 상처 치료가 오래 걸릴거라거나 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다행이라는 결론.
“환자분 회복계 능력자는 아니죠?”
“네, 전혀 아니죠.”
“미스테리 하네, 미스테리 해. 무슨 몸이 이럴까요? 신의 육체 이런 건가.”
모르겠다며 고개를 내저은 마티가 몸을 일으켰다.
“별다른 치료는 필요 없을 거 같네요. 조금만 지나면 알아서 회복하겠어요.”
“그럼 붕대라도 좀 감아 주시면 안 될까요? 이거 팔이 색이 좀.”
무슨 귀수도 아니고 붉은 팔을 단 채 돌아다닐 순 없었다.
보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붕대를 감을 생각이었다.
피식.
어이없다는 듯 웃은 마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 * *
병원을 나오자 기다리고 있는 이연화.
이연화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붕대가 감긴 오른팔을 바라봤다.
“백운 님, 치료는 잘 받았어요? 어떻대요?”
“괜찮다고 하던데요. 이거 붕대도 안 감아도 되는 건데 다른 분들 눈을 위해 감은 거예요.”
“…?”
괜찮다는 말에 이연화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날 응시했다.
하긴.
팔 하나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상태였으니 저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진짜 뭘까.
전문가는 아니어도 내가 느끼기에도 진짜 위험했던 거 같은데.
스이카를 계속 휘두르면서도 괜찮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이 심했었다.
멈출 수 없는 상황이라 계속 휘두르긴 했지만 가능했다면 무서워서 바로 멈췄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후지산에서 사로카한테 걷어차였을 때도 그랬었지.
눈을 떴을 때야 온몸을 울리는 고통에 비명을 질러야 했지만, 정말 잠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 대부분이 완치에 이르렀고 치료를 맡았던 의사도 오늘 만난 마티처럼 혀를 내둘렀었다.
그때야 그냥 좀 빨리 낫는구나 했었는데 오늘은 좀 심하네.
뭐, 튼튼한 거니까 됐나.
어차피 나쁜 건 아니니 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하하, 진짜 괜찮아요. 대혁 님은 대사관으로 가셨나 보네요.”
“아, 네. 아마 정신없으실 거예요. 하루 만에 급하게 진행되던 일들이다 보니 정부에서도 자세한 상황을 물으려 할 거고요.”
“질문 세례를 받으시겠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도시를 둘러봤다.
여기저기 데몬과의 전투 흔적이 남아있긴 하지만, 빠른 대응이 이루어져서인지 그리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데몬이 떼거리로 나타났었는데도 수도에서 가장 큰 병원이 바쁘지 않다는 것 역시 피해가 크지 않다는 증거였다.
“로인 님은 사라진 거죠?”
우리를 도와준 까닭인지 어느새 로인의 이름에 님을 붙이는 이연화.
아직도 의문이네, 고놈은.
질문을 들으며 부지에 나타났던 로인을 떠올렸다.
김대혁과 지원군보다도 먼저 와 데몬들을 썰어버렸던 로인.
처음엔 이연화를 공격하러 온 줄 알았는데 정말 의외였다.
“제가 땅으로 다시 내려왔을 땐 사라진 후였어요.”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네요.”
“에이!”
그런 이연화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어! 해보지도 않고 말이야. 운명이 어쩌고저쩌고 말이야.”
“풉, 무슨 백 년 산 어르신 같아요. 그러지 마요.”
날 말리는 이연화와 함께 웃으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도와준 건 도와준 거니 나중에 만나면 말은 걸어줘야지.
잠시지만 강렬한 인상을 줬던 로인.
왠지 모르게 싫진 않은 녀석이다.
* * *
그리스의 한국 대사관.
대사관의 한적한 길로 검은색 차량 한 대가 멈춰 서 있다.
“어서오세요, 김대혁 팀장님.”
뒷좌석에 타 있는 카풀라에 김대혁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 대사관에 있는 김대혁에게 찾아왔던 1급 헌터.
도시에 데몬이 나타났을 때 가장 먼저 대응을 해줬던 헌터였기에 의심 없이 따라나섰다.
“타시죠, 누가 볼까 무섭네요.”
“알겠습니다.”
대통령 카풀라와 나란히 뒷좌석에 앉은 김대혁.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카풀라가 입을 열었다.
“일단 바로 대피 결정을 못 내린 점, 죄송하다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카풀라의 말에 김대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데몬이 나타남과 동시에 도착한 수송 차량들. 그리고 1급 헌터들까지. 뒤에서 움직여 주셨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상황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김대혁에 카풀라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김대혁의 말대로 공식적으론 대기란 명령을 내렸지만 카풀라는 뒤에서 데몬에 대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일을 조용히 진행했었다.
“이제부터 하는 질문은 비공식적인, 제 사적인 질문이니 편하게 대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대답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알겠습니다.”
김대혁 쪽으로 몸을 돌린 카풀라.
“도시에 균열이 생기기 전, 두어 시간 떨어진 부지에서 먼저 문이 열렸었죠. 그리고 그곳에서 로도스에 참사를 일으켰던 데몬이 목격됐고요.”
“예, 맞습니다.”
“나타난 데몬의 숫자도 비교 불가였죠. 도시는 수십 마리 수준이었지만 부지 쪽은 아니었어요. 제가 궁금한 건… 대부분의 전력은 아테네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낸 1급 헌터들도 도시에 있었고요.”
카풀라의 말을 들으며 김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도스에도 높은 급수의 국가직 헌터들이 있었지만 학살극을 막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번 아테네에서의 피해는 약간의 재산 피해만이 있을 뿐 희생자가 0이었다.
‘무슨 질문을 할지 알 것 같군.’
카풀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지에서 아테네를 지켜낸 건… 누구인가요?”
* * *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시 찾은 아테네 공항.
“아테네에서 나가는 비행기는 없습니다. 최소 일주일 이상은 이럴 거예요.”
“네…?”
해야 하는 일도 끝났으니 다시 이집트로 가려는 중이었는데 비행기가 없다니.
“오늘 하늘에 나타난 데몬들 때문에 비행 길이 전부 막혔거든요.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는 비행기는 아테네 상공을 이용할 수 없어요.”
이제 안전해요!
다 없앴다고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별 의미는 없을 것 같았다.
항공사 자체적으로 한 결정이 아닌 정부에서 내려온 지침일 것이기 때문이다.
흠, 일주일이라.
물론 더 있으라 하면 못 있을 이유까진 없었지만.
지금은 왠지 모르게 떠나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오는 일정도 일고 말이다.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진 않아.
기태랑이 죽는 시점.
몇 개월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 전에 무기를 하나 더 찾아 무기고의 다음 능력을 개방해두고 싶었다.
태랑 님은 회귀 전에도 강했어.
그런 기태랑을 베어 죽인 무언가.
그게 어떤 녀석인지 알지 못하는 이상 최대한의 전력을 쌓아 대비해야 했다.
비행기가 없다고 못 가는 건 아니니까.
체력을 비축하며 안전하게 가는 건 불가능해졌지만 그렇다고 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종목이 철인 3종 경기로 변경될 뿐이었다.
#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대통령 카풀라입니다.
응?
그때 공항 내 전광판에서 모습을 드러낸 카풀라.
# 오늘 있었던 사태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 *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카풀라가 오늘 있었던 일을 브리핑했다.
로도스를 괴멸시켰던 데몬과 그 데몬의 군대가 나타났다는 것, 그리고 한국 대사관의 빠른 보고와 조치로 사상자 0명으로 상황을 종결할 수 있었다는 브리핑.
- 한국 대사관의 역할은 축소해야 합니다. 타국의 대사관입니다.
기자회견이 있기 전 열렸던 회의.
많은 의원이 있는 그대로 브리핑을 하게 되면 정부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걱정했다.
그렇기에 김대혁과 대사관의 활약을 축소 시키자는 의견이었다.
- 그럴 순 없습니다. 한국 대사관과 김대혁 팀장 및 휘하 헌터들이 한 활약은 그대로 발표할 겁니다.
카풀라의 고집을 알기에 해당 건에 대해선 의원들 역시 한 발자국 물러났었다.
하지만.
- 대통령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부지에서 데몬의 주요 전력을 괴멸했다는 한국의 무기왕이란 헌터. 그 이야긴 빼셔야 합니다. 이건 저희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여야 의원 모두의 의견이 하나로 합쳐지는 기적적인 순간이었다.
이름 모를 이방인 헌터가 이번 사태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발표는 절대 발표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김대혁이 카풀라에게 알려줬던 무기왕이란 헌터의 활약.
- 애초에 믿기지도 않는 일입니다. 신빙성도 없고요.
믿을 수 없다는 의원들의 말에 카풀라는 속으로 혀를 찼었다.
도심지에서 카메라로 포착된 데몬 부대의 괴멸 장면이 그 증거인데 신빙성이 없다니.
-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의원들이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에 카풀라는 무기왕을 제외 시키자는 의견에 동의했었다.
“아테네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 주신 정부 및 한국 대사관 헌터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기자회견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슬슬 마무리되어 가는 분위기에 정리를 하려던 기자들이 고개를 들었다.
“도시에서 먼 거리인 부지에서 데몬을 상대해 시민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어 준 건 물론이고, 로도스를 괴멸시켰던 데몬과 그 데몬의 주요 전력을 처치해주신 분이 있습니다.”
옆에 있던 의원들이 낭패 섞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스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한국 소속 헌터이기에, 그대로 못 본 척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몇 시간 동안 부지에서 데몬의 본대를 상대하며 시간을 끌었고, 마지막엔 그 수장과 부대를 괴멸시켜 추후에 있을지 모르는 그리스의 잠재적 위험을 제거했습니다.”
슥.
“그리스의 국민 중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를 대표하는 대통령으로서.”
자리에서 일어난 카풀라가 카메라를 바라봤다.
“대한민국 국가직 소속 헌터, 무기왕님께.”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카풀라.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