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해와 어둠
갑자기 멈춰 선 탓인지 앞장서던 셀린이 옆으로 다가왔다.
“으음.”
조용히 옆으로 다가와 내가 바라보고 있는 문양을 살피는 셀린.
“해와 어둠 혹은 태양의 신 라와 혼돈의 신 세트의 균형이라고도 불리는 문양이에요.”
“오…? 이집트에서 유명한 문양인가요?”
“그럼요.”
어느새 다가온 무하타와 헤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집트 사람들에게 있어선 라와 세트는 가장 유명한 신이니까요. 고대에도 가장 많은 이가 섬겼던 신이기도 하고요.”
“당연히 해 쪽이 라, 이 어두운 원이 세트고요.”
세 사람의 설명을 들으며 문양을 살폈다.
공간에서 봤던 것과 같았지만, 조금은 달랐다.
새겨져 있는 문양은 정확히 해와 어둠이 반반이었으나 공간에선 분명 어둠이 해의 대부분을 집어삼키고 있는 상태였다.
“해와 어둠이 딱 반반인 느낌인데 지역마다 문양이 새겨지는 기준이 다른가요?”
질문을 들은 셀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 문양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건 균형이거든요. 해와 어둠,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요. 그렇다 보니 엉뚱하게 그린 게 아니라면 당연히 반으로 나뉘어 있을 테고요.”
라와 세트, 그리고 균형이라.
공간에서 황금빛을 뿜어내고 있던 불꽃을 떠올렸다.
아직 확정 지을 순 없지만 만약 그 불꽃이 라의 불이라면.
내가 들어갔던 흔적의 공간이 라와 세트의 공간이라면, 셀린이 말한 둘 사이의 균형은 어긋나고 있는 것이었다.
공간의 시간대가 현재인지 과거인지는 알 수 없었기에, 균형이 어긋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미 어긋나버린 건지도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공간의 시간대가 현재이길 바라는 게 최선이겠지.
분명 하늘에 떠 있던 어둠은 태양을 삼켜가고 있었다.
황금빛을 뿜어내고 있던 불꽃도 마찬가지였다.
엄청난 양의 다크메타에 의해 조금씩 삼켜지며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던 상태.
만약 공간의 시간대가 과거이고 태양과 불꽃 둘 다 어둠에게 삼켜졌다면, 이미 무기는 내 손을 떠나버린 걸 수도 있었다.
“백운 님, 이집트 신화에 대해 관심 있으신가요?”
“하하… 옛날에 조금 읽은 정도에요.”
셀린이 말한 해와 어둠 문양은 처음 보는 거였지만, 유물관에 머무르며 라와 세트에 대한 신화를 읽기는 했었다.
라와 세트는 서로 싸우는 사이가 아닐 텐데.
신화의 내용에 의하면 태양의 신 라는 세트를 거두어준 은인이었다.
그렇기에 악신 혹은 혼돈의 신이라 불리며 통제 불가능으로 여겨지던 세트도 라만큼은 건들지 않았다고 신화에 쓰여 있었다.
신화가 절대적으로 맞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검증이 된 이야기도 아니고.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기에 셀린을 바라봤다.
“문양이 담고 있는 의미가 균형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라와 세트가 대립하는 관계인 건가요? 제가 읽었을 땐 대립보단 우호와 상호 존중 정도로 봤었거든요.”
셀린의 얼굴이 오오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내가 생각보다 신화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자 감탄하는 것 같았다.
“맞아요, 둘은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지 라이벌이라던가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그런 사이는 아니에요.”
자리에 쭈그려 앉은 셀린이 묘한 눈으로 문양을 바라봤다.
“세트의 어둠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증식하며 퍼졌다고 해요. 그래서 붙은 별명이 악신과 혼돈의 신이고요.”
증식.
흔적을 통해 봤던 공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였다.
많다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다크메타.
좀 끔찍하네.
그 정도 양의 다크메타가 다시 증식을 한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주먹만한 양의 다크메타만 밖으로 나와도 빙하를 만들어내는데, 공간에 있던 다크메타가 밖으로 터져 나와 무한 증식을 한다면.
멸망각 아닌가…?
설마 흔적으로 본 게 세상의 멸망 전조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트의 증식하는 어둠과 혼돈에 대해서는 해석이 좀 갈리는데요. 세트 본인 또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퍼지는 혼돈을 두려워했고, 그렇기에 세트를 아끼는 라가 태양의 힘으로 제어해주며 균형을 유지했단 해석이 하나 있고요.”
“또 다른 해석은요?”
슥.
자리에서 일어난 셀린이 웃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세트의 본질이 혼돈과 어둠이었기에. 자신을 거둬준 라까지 집어삼키고자 무한에 가까운 시간동안 서로 싸우고 있다는 해석이죠.”
“오… 그렇군요.”
셀린이 말한 해석 중 공간의 상황에 가까운 건 두 번째였다.
아무리 봐도 태양과 불꽃을 집어삼키는 다크메타에 존중 따위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태양의 신 라는 완전 킹왕 넘사로 센 줄 알았는데 비실비실해진 건가.
어느 각도로 보나 싸움이 끝나는 건 시간 문제처럼 보였었다.
싸운다는 표현보다는 라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 테니 말이다.
“만약 균형이 깨져서 세트가 태양을 삼키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음.”
셀린이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혼돈과 어둠이 세상을 집어삼키겠죠?”
* * *
늦은 밤, 카이로 도시 근처의 작은 마을.
“크르르르!!”
마을을 향해 수십 마리의 데몬이 달려오고 있었다.
“아… 아버지!”
“일어나세요! 데몬이에요!”
밤 중에 갑자기 나타난 데몬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패닉에 빠져 있었다.
도심지에 비해 경비가 허술한 외곽일지라도 마을로 오기 전 경계에는 국가 소속 헌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단 한 번도 이렇게 코앞까지 데몬이 나타난 적이 없었던 것.
“데루가인데… 크기가 왜 저러죠?”
마을에 상시 대기 중이던 헌터들이 전방으로 나섰다.
평소엔 평화로웠던 마을이었던 만큼 헌터들도 현재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달려오고 있는 데몬은 일반적인 개체보다 몇 배는 덩치가 커다랬기에 긴장은 최고조로 달하고 있었다.
“지… 지원 요청해.”
점점 가까이 오며 그 크기를 자랑하는 변이 데루가에 공격 준비를 하던 헌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속도 또한 기존보다 훨씬 빠른 데루가 무리.
단순히 크기만 커진 게 아닌 듯했다.
“전방은 나와 세 명만 방어한다! 나머지는 주민들 대피시켜! 빨리!”
온전히 막을 수 없단 판단에 지휘를 맡은 헌터가 지시를 내렸다.
일반적인 데루가였다면 방어선을 세운 뒤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테지만 달려오고 있는 놈들이 수십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크아아아아!”
어느새 코앞까지 달려와 헌터들을 향해 몸을 날리는 데루가.
“시간이라도 벌어야 한다!”
데루가가 죽음을 직감한 헌터들에게 거대한 발을 치켜들었다.
사아아…!
그 순간.
꾸드드득!!
어디선가 솟아 나온 모래가 날아들던 데루가를 집어삼켰다.
“크… 크르… 크.”
드드… 우둑!
빠져나가려 발버둥을 치다 모래의 압력에 못 이겨 그대로 뼈가 분쇄되어버린 데루가.
“이 모래는…!”
헌터들이 두리번거리며 모래를 일으킨 주인을 찾았다.
낯선 기술이 아니었다.
이집트에서 모래를 다룰 순 있는 헌터라면 단 한 명.
드드드!
누구인지를 확인하기도 전에 데루가들이 딛고 있는 모래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어…!”
그리고 잠시 후.
마을에 있던 헌터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 넋을 놓고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바라보게 되었다.
데루가들 전부를 충분히 집어삼키고도 남을 모래가 하늘로 솟아올랐고.
꽤 높은 높이까지 올라갔던 솟았던 모래가 데루가를 향해 찍어 눌러졌다.
콰아아아앙!!
데루가였던 것들이 모래의 압력에 쥐포가 되어 모래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데루가 무리.
저벅.
마을을 향해 태연한 발걸음으로 걸어오는 남자.
회색 머리에 터번을 쓴 남자는 머리 색깔만큼이나 무미건조한 회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꼴깍.
그제야 남자를 발견한 헌터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걸어오고 있는 건 이집트의 비밀 병기이자 수호신이라 불리는 남자.
국가직 1급 헌터, 비칼이었다.
* * *
이곳이 이집트의 대학교인 것입니까!?
셀린을 졸졸 따라 도착한 카이로 대학교.
이집트에서는 최고 명문대학교라고 셀린은 자신의 학교를 설명했다.
한국으로 치면 샤울대 같은 느낌이구먼.
“여기로 옮겨!”
“좀 더 이쪽으로!”
늦은 시간이라 대학교까지 오는 길엔 사람 그림자 보기가 힘들었는데.
대학교 안은 달랐다.
왠지 모르게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외관은 달라도 한국이나 이집트나 대학원생의 고통은 비슷한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셀린의 안내를 받아 입구로부터 꽤 떨어진 연구실로 발을 들였다.
조금 전 대학원생들을 봐서인지 셀린의 연구소도 고등학교 교실 같은 랩실이려나 생각했었는데.
여기저기가 최신식 기계들로 꾸며져 있는 걸 보니 그렇진 않은 듯했다.
삐빅.
셀린의 지문과 홍체를 인식하자 열리는 문.
최첨단 보안 시설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머… 멋있네요.”
“저도 옮긴 지는 얼마 안 됐어요. 카이로 대학이 정부와 협력해 하는 일이 많거든요. 여기는 해당하는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만 배정되는 곳이고요.”
시한부 연구실이었구먼.
들어가기 무섭게 연구실에 불이 밝혀졌다.
사방에 꽂혀 있는 여러 서적과 도구들.
누가 봐도 학자가 머무를 것 같은 공간이었다.
“셀린 님, 다크메타 케이스는 이곳에 놓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나머지는 제가 할게요.”
헤리아가 연구소의 중앙에 케이스를 내려놨다.
띠링.
“국가직 7급 헌터, 헤리아 입니다. 수집했던 다크메타를 셀린 님 연구소로 이동 완료했습니다.”
보고 체계 확실하구먼.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전화를 끊은 헤리아가 무하타와 함께 문으로 향했다.
“그럼 저희는 위층 대기실에 있겠습니다.”
“두 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헤리아와 무하타가 퇴장하고.
기지개를 켠 셀린이 케이스로 다가가 준비를 시작했다.
나… 난 어떻게 하지.
휘리릭 사라져 버린 무하타와 헤리아.
그리고 다크메타를 분석할 준비를 하는 셀린까지.
잠시 정체성을 잃은 채 어버버하며 주변을 걸었다.
연구실이라도 살펴보자.
뻘쭘하게 서 있는 거보단 돌아다니며 뭐라도 보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오 신화에 관한 서적도 있네.
“라와 세트에 관련된 서적을 저쪽에 있어요.”
준비를 하는 와중에도 손을 뻗어 위치를 알려주는 셀린.
고개를 꾸벅 숙인 후 가리킨 곳으로 걸어갔다.
보자보자, 어디 공간 찾는데 도움될 만한 게 없으려나.
가장 오래되어 보이고 그럴싸한 책을 뽑아 들었다.
라와 세트의 신화 초입부가 쓰여진 책 같았다.
# 태양의 힘으로 악마들을 물리친 라의 앞에는 작은 소년이 앉아 있었다. 소년의 눈은 몹시 깨끗한 빛을 띠며 빛나고 있었다.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더러움을 마주한 적이 없는, 그런 맑은 눈이었다.
작은 소년이 세트인가.
책에 쓰인 내용만 봤을 땐 혼돈이나 어둠이랑은 거리가 멀어 보이네.
# 소년을 잠시 바라보던 라는 고민에 빠졌다. 악마들이 득실거리던 공간. 이 소년 역시 그들과 같은 존재일 것이기에 죽이는 게 옳았다.
빨리 죽여!
재앙의 불씨야!
이런 내 바람을 비웃는 듯한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 라가 소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