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발을 떼다
사방으로 일어나는 모래를 보며 아포피스의 뒤쪽으로 내달렸다.
비칼에게 긴 설명을 해준 건 아니었다.
아포피스는 웬만한 상처를 입어도 회복하며 그럴 때마다 몸에 그려진 문양을 따라 무언가 반짝이는 게 의심스럽다는 정도의 설명이었다.
- ….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비칼.
그렇게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비칼은 모래를 끌어 올려 아포피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겁나 쿨한 사람이네.
처음에 저런 강압적인 말투로 반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쁠 법도 했지만.
이상하게 기분 나쁜 걸 떠나 약간의 위화감조차 느끼지 못했었다.
오히려 비칼이 존댓말을 했으면 훨씬 어색했을 것 같은 느낌.
전체적인 이미지와 강압적인 반말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건 그거고… 화끈하네.
콰앙!!
아포피스를 향해 뻗어 가는 모래를 바라봤다.
시원시원하게 휘둘러지며 거대한 크기의 아포피스를 휘청이게 만드는 위력.
한두 번이면 모를까 쉴새 없이 저런 공격을 할 수 있다니 역시 1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짝.
신체의 일부가 파괴될 때마다 어김없이 반짝이는 아포피스의 문양.
문양이 빛나는 부분은 몹시 작았고, 반짝이는 것도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아까는 박살나는 몸을 피해서 달아나느라 계속 빛났던 모양이네.
문제가 있다면 몸이 잘린 게 아닌데도 반짝이는 부분이 계속해서 이동한단 것이었다.
마치 한 자리에 계속 머무르면 위험하다는 걸 아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키시시시시시시!!”
무한한 재생력을 믿어서인지 비칼의 공격에도 밀려나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하는 아포피스.
받은 데미지를 순식간에 회복할 수 있으니 가능한 행동이었다.
무식한 뱀쉨!
탓.
아포피스의 몸으로 올라타 문양의 빛으로 달려갔다.
빛은 어차피 문양을 타고 움직이는 상태.
비칼이 공격하는 틈에 반짝이는 부분을 면도칼로 갈라볼 생각이었다.
스스스…!
내가 올라타기를 기다리고 있던 건지 아포피스를 두들기기만 하던 비칼의 모래가 거대한 창 모양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쐐에에엑… 푹! 푹! 푹!
아포피스의 머리를 시작으로 아래를 향해 꽂혀 오는 모래의 창.
!!
광범위한 모래 창에 위험을 느낀 건지 아포피스의 빛이 내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비칼이 일부러 빛을 내 쪽으로 몰아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부디 맞기를!
어느새 사정거리까지 들어온 빛을 향해 면도칼을 휘둘렀다.
반짝!
!?
면도칼이 휘둘러지는 찰나의 순간.
일정하게 내려오던 빛이 방향을 틀며 속도를 올렸다.
뭐… 뭐야.
아포피스의 머리는 저 위에서 비칼의 모래에 박살 나버렸는데.
마치 날 발견한 뒤 새로운 판단을 내린듯한 빛의 움직임이었다.
삭! 싸악!
아까와는 비교가 안 되는 속도였다.
사방으로 뻗어 있는 문양을 따라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빛.
하도 찰나의 순간에 지나쳐 내 발아래를 지나가도 면도칼을 휘두른 후엔 이미 빛이 도망간 뒤였다.
서걱. 서걱. 서걱.
수십 번을 휘둘렀는데도 빛에 닿긴커녕 근처조차 못 가고 있는 면도칼.
이걸론 안 되겠는데…?
드드드드…!!
빛을 벨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이.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허.
아포피스가 몸을 감싸고 있는 비늘을 세우기 시작했다.
칼과 가까운 정도의 예리함을 가지고 있는 비늘.
이런 씨.
밀려오는 비늘을 피해 뒤쪽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파바밧!
몸을 착지하기 무섭게 날아오는 비늘을 피하고 쳐내며 뒤로 움직였다.
단순히 크기랑 힘만으로 싸우는 놈인 줄 알았는데 잔기술까지 위협적인 녀석이었다.
쿠웅!
오?
어느새 내 앞으로 생겨난 모래의 벽이 비늘을 막는 사이.
다가온 비칼이 입을 열었다.
“안되는 건가?”
“반짝이는 거 봤죠? 저걸 베어야 하는데 너무 빨라요. 이제 녀석도 절 인식해서 더 힘들 거 같고요. 한 번에 저놈 몸 전체를 분쇄하거나 빛을 베거나 하면 될 거 같은데, 혹시 모래 더 끌어 올릴 수 있나요?”
“불가능하다.”
현재 나와 있는 모래가 최대라는 듯 비칼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긴 가능했다면 애초에 모래를 극한까지 끌어 올려 아포피스의 몸 전체를 찍어 눌렀을 것이다.
빛이 반짝이며 한 자리에 머무르는 건 아주 찰나의 순간.
그 찰나의 순간을 베려면… 스이카 뿐인데.
현재 최선의 무기는 인식을 넘어서는 속도를 가진 스이카 뿐이었지만.
비늘을 날려대며 계속해서 난리 치는 아포피스를 상대로 땅에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하는 스이카의 검기를 맞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크기도 너무 커서 범위에 들어오는 것도 극히 일부분이야.
상대가 사람이라면 스이카의 경계의 크기는 충분했다.
하지만 상대는 높은 층수의 빌딩에 버금가는 크기의 뱀이었다.
땅에서 스이카가 도달할 수 있는 부위는 기껏해야 아포피스의 꼬리 언저리가 한계.
“눈앞에 오면 벨 수 있나?”
“네, 벨 수는 있는데.”
문제는 아포피스의 빛이 날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땅에서 발도를 준비하고 있는 날 가만히 둘 리도 없으며 심지어 빛이 근처의 문양으로 움직이지도 않을 터였다.
내게 보이지 않는 몸통 반대편 문양으로 이동하겠지.
그렇게 되면 부디 맞길 기도하며 스이카를 휘둘러야 했다.
눈 감고 휘두르는 거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이기에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 혹시 꼬리 아래부터 위로 빛을 몰아주실 수 있나요?”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문양이 양면으로 그려져 있지 않은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코브라와 비슷한 넓적한 모양을 가진 아포피스의 머리통 부분.
머리통에서 문양이 그려진 건 뒤통수뿐이었다.
빛의 움직임이 한쪽으로만 제한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장소.
“그리고 저 뒤통수 부분에 딛고 설 수 있는 발판이 필요해요.”
비칼이 묘한 눈으로 날 응시했다.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뭐 하는 새낀가 하는 눈빛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요구사항이 많긴 해.
납득이 가는 눈빛이었다.
어디서 굴러온지도 모르겠는 녀석이 1급 헌터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스이카를 휘두르려면 발을 딛고 있어야 하는걸.
“이번엔 베어야 한다.”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인 비칼.
“내 모래도 무한은 아니니까.”
마지막 말을 남겨두고 비칼이 아포피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 * *
쾅! 쾅! 쾅!
비칼의 모래가 아포피스의 꼬리를 시작으로 천천히 빛을 몰기 시작했다.
예상과 같이 꼬리에 꽂히는 모래를 피해 위쪽으로 계속 이동하는 문양의 빛.
[비젼]
아포피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수리검을 이용해 하늘 위로 몸을 이동시켰다.
목표는 아포피스의 뒤통수.
뒤통수의 노려보며 타이밍을 기다렸다.
스이카의 속도면 충분하다.
아주 잠시라도, 찰나의 순간이라도 좋으니 아포피스의 빛이 스이카의 경계에만 들어오면 됐다.
콰가가가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수백, 수천 개의 모래 바늘.
빛은 빠른 속도로 자신을 덮치는 공격으로부터 몸을 피하고 있었다.
꽈악.
수리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비칼의 신호를 기다렸다.
드드득!
…!
비칼의 모래가 모여들어 아포피스의 뒤쪽에 작은 지형을 만들었다.
스이카를 휘두를 수 있는 발판.
얼추 갖추어진 지형을 향해 수리검을 던졌다.
[비젼]
모래로 이루어진 발판에 수리검이 부딪히기 직전.
몸을 이동시켜 수리검을 잡아냈다.
촤아악!
지형에 발이 닿기 무섭게 수리검을 집어넣었다.
[사사키 코지로 - 스이카]
콰가가가가가!
가까운 아포피스의 몸으로 비칼의 모래 바늘이 꽂혀 오고.
쉴새 없이 문양을 타고 올라오던 빛이 어느새 모래 발판 근처까지 도달했다.
철컥.
우웅…!
원형으로 퍼져 나가는 스이카의 경계.
올라오는 빛을 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꽈악.
경계에 들어오는 순간, 한 발이면 충분했다.
“후우.”
와라.
서서히 경계로 접근하는 문양의 빛에 오른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경계에 빛이 도달하는 순간, 천천히 스이카를 검집에서….
쿵!!
!?
언제 쏘아진 걸까.
마치 타이밍을 노린 듯 발사된 아포피스의 거대한 비늘에 모래 발판이 부서지고.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그려졌던 스이카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 * *
발판이 무너지며 스이카의 경계가 사라졌다 생각한 순간.
…?
모든 게 멈춰버렸다.
아포피스를 공격하던 모래도, 모래를 피해 움직이고 있던 빛도, 쉴새 없이 울부짖으며 머리를 흔들던 아포피스도 정지해버린 상태.
머리를 아래로 한 채 떨어지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눈만 끔뻑이고 있는 내게 누군가 걸어왔다.
여전히 찰랑찰랑한 백발을 휘날리고 있는 귀신의 남자, 사사키 코지로.
사사키 코지로는 허공을 걸어와 거꾸로 매달려 있는 내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뭐 하고 있는 거지?”
“… 떠… 떨어지고 있는데요.”
너무 솔직한 대답이었는지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코지로.
게이지가 꽉 찼었던 스이카를 떠올리며 코지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땅을 딛고 있지 않아도 스이카를 휘두를 방법이 없을까요?”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이었다.
아포피스의 공격으로 발을 디딜 수 있는 모래 발판은 사라진 상태.
문양의 빛은 눈앞까지 와 있었다.
비칼이 모래가 무한이 아니라고 했던 만큼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또 언제 이 범위를 잡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스이카를 몇 번이나 휘둘렀지?”
“음… 1000번은 되지 않을까요?”
그리스에서 메토스의 군단을 상대로 몇 시간 동안 셀 수 없이 휘둘렀던 스이카.
세보진 않았어도 얼추 1000번 가까이는 휘둘렀을 것 같았다.
“999번. 네가 스이카를 휘두른 횟수다.”
“오.”
“오가 아니다. 나를 통해 사용법을 알고 있다 한들 넌 검에 대해 아무런 기초도 없는 상태니까. 딱 발도만 사용할 수 있는 거지.”
“그… 그렇죠.”
“기초와 이해가 없다는 건 검에 사용되는 근육이 발달 되지 않은 건 물론이고 흐름도 전혀 납득하지 못한 것. 이 상태로 발도를 휘두르는 건 계속해서 팔에 부담이 될 거야. 보통 몸이 아니라 금방 회복되는 거 같긴 하지만.”
아무 말 없이 듣고 있자 사사키 코지로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더더욱 너에겐 발을 디딜 곳이 필요한 거다. 발도는 몸의 힘만으로 휘두르는 게 아니니까.”
“몸의 힘만으로 휘두르는 게 아니라면…?”
“발도를 휘두르며 느꼈을 거다. 땅 아래에서부터 무언가 끌어 올려지는 감각을.”
“…!”
코지로의 말대로였다.
발아래에서부터 올라온 힘을 스이카로 전달하고, 그 응축된 힘을 폭발적으로 뿌려내는 감각.
“땅의 힘을 사용하고서도 그 정도의 부하다. 만약 발을 딛지도 않고 순수 힘으로만 발도를 사용하려 한다면, 오른팔이 박살 나겠지.”
“… 그래서 발을 떼면 스이카가 풀린 거군요.”
코지로가 나를 위해 준비해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두 발을 온전히 딛고 있지 않은 상태에선 사용할 수 없도록, 잠깐의 방심으로 자세가 틀어져 오른팔이 박살나지 않도록 강제로 풀려버리게 한 것.
고개를 끄덕인 코지로가 입을 열었다.
“이제 천 번 가까이 휘둘렀으니, 스스로도 어느 정도의 리스크가 있는지는 잘 알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휘두르게 해주세요.”
단호하게 대답하자 날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짓는 코지로.
“그러지.”
대답과 동시에 공간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움직이며 스이카를 사용할 수 있는 것. 제대로만 사용할 수 있다면.”
싱긋.
“많은 게 가능해질 거다.”
화악!
* * *
멈췄던 시간이 풀리고.
후우웅!
추락하며 밀려드는 공기압이 느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공간에서 빠져나온 후 왠지 모르게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느낌.
반짝.
문양을 타고 위로 향하는 아포피스의 빛을 바라보며 사라지지 않은 스이카의 손잡이로 손을 올렸다.
철컥.
파아악!
동시에 흐릿해지던 스이카의 경계가 선명해지며 아포피스의 빛에 도달했다.
… 후우.
[발도]
끼아아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