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이동 수단
쿵.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
- 와장창!
셀린과 함께 이집트의 햇빛을 즐기며 비둘기 고기를 먹던 중이었는데.
왜 눈앞에는 노란색 빛을 뿜어내는 참새가 퍼덕거리고 있는 걸까.
퍼덕퍼덕!
“….”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포크를 든 채 그대로 뒤까지 날아가 있는 셀린.
셀린의 눈은 갑작스러운 참새의 습격에 놀라 몹시 커져 있었다.
“뭐… 뭐야!!”
아직도 떨리는 심장을 추스리며.
뒤늦게 참새를 향해 소리 질렀다.
퍼…!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건지 퍼덕임을 멈춘 노랑 참새.
참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날 돌아봤다.
오씨.
소름 돋는 모습이었다.
친척격인 비둘기를 먹다 만나서 그런지 더 무섭게 보이는 듯한 녀석의 생김새.
꿀꺽.
저러고 있다가 갑자기 달려들까봐 주먹을 꽉 쥔 상태로 녀석을 노려봤다.
번쩍… 번쩍.
왠지 모르겠지만 참새의 눈에서는 정체불명의 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지이잉…!
잠시 후.
참새의 눈에서 정체불명의 빔이 쏘아지고.
“…!”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 안녕하세요, 백운 님.
대산의 회장, 소피아.
창문을 깨고 들어온 참새도 모자라 이집트 한복판에서 소피아의 얼굴을 보게 되다니.
쉬지 않고 일어나는 돌발상황에 정신을 차리기 힘든 지경이었다.
# 제 메시지가 잘 도착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이지.
다른 이었다면 안부 인사라도 하려고 보냈을까 했겠지만.
상대가 소피아라면 달랐다.
무기에 대한 정보를 넘겨받으며 소피아가 했던 부탁.
- 저를 위해 싸워 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메시지를 들어보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부탁과 관련된 게 아닐까 싶었다.
여유도 많이 사라졌어.
소피아에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유와 평온함이 있었다.
적진이라 생각했던 대산 한가운데서도 평온함을 느끼게 해주는 신비로운 기운.
그랬던 소피아의 여유와 평온함이 영상 안에서는 많이 사라져 있었다.
# 백운 님이 메시지를 어디서 받으셨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후 잠시 뜸을 들이는 소피아.
잠시 침묵을 이어가던 소피아가 입을 열었다.
# 이전의 약속이 유효하다면, 지금 저를 위해 한 번 싸워 주셨으면 합니다.
역시.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는 대기업 중 하나인 대산.
그런 대산의 정점에 있는 게 소피아였다.
마음만 먹으면 수백의 사람을 부릴 수 있을 위치인데도 나에게 싸워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는 건.
대산 내부에 문제가 생겼다.
이게 아닌 이상 외부인인 나를 끌어들일 리가 없었다.
최리아의 손아귀로부터 날 구해주고, 나로 인해 대산의 이미지 실추는 물론 무기에 대한 정보까지 내주며 얻어낸 약속이었다.
그런 약속 이행을 갑자기 요청한다는 건 소피아의 힘만으로는 무언가 하기 힘든, 내부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이었다.
# ….
지금 싸워달라는 말을 한 뒤.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소피아의 모습을 끝으로 영상은 종료되었다.
사락!
영상이 끝나자 거짓말처럼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참새.
등장했던 임팩트에 비해서는 몹시 빠른 퇴장이었다.
“백운 님? 대체 뭐였나요?”
그제야 뒤로 도망쳐 있던 셀린이 내게 다가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봐선 참새의 영상은 수신인으로 지정된 나에게만 보인 듯했다.
“음… SOS 요청요.”
“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셀린을 뒤로하고 생각에 잠겼다.
대산 회장의 SOS라.
솔직히 대산만 놓고 본다면 내가 도와줘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굳이 좋은 기억이냐 나쁜 기억이냐를 따진다면.
대산과는 나쁜 기억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도착한 메시지를 못 본 척하고 휘파람 불며 피라미드 구경을 나가도 되는 일.
하지만.
대산이 아니라 소피아의 부탁이니까.
약속을 할 때도 소피아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었다.
대산이 아닌, 자신을 위해 싸워달라고 말이다.
대산은 괘씸해도 소피아에겐 빚이 있어.
아직도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피아는 처음 본 내게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줬다.
사나이 백운, 약속 이행을 앞에 두고 도망치지 않으리!
벌떡.
굳은 다짐을 하며 자리에서 시원하게 일어섰다.
어차피 창문의 유리가 박혀 비둘기 고기도 못 먹게 된 상황.
상황이 여유로워 보이지 않는 만큼 바로 출발할 생각이었다.
“백운 님…?”
참새의 영상을 보지 못해 계속해서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셀린.
그런 셀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가야겠어요.”
“네에? 어디를요?”
갑작스러운 떠남 선언에 셀린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 인간은 대체 어떤 템포를 가지고 있는 걸까 몹시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싱긋.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쥐었다.
“한국으로요!”
* * *
어두운 회의실 안.
이사 연수정이 앞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영상으로만 이루어진 화면.
“정이사님, 준비는 차질 없겠죠?”
연수정의 질문에 바로 옆에 있는 화면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 누구를 위한 일인데요. 확실합니다.
무거운 거 같으면서도 어딘가 끈적함이 느껴지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나빠지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대답을 들은 연수정이 보이지 않게끔 조소를 머금었다.
‘지 일이라 하니 참 적극적이네.’
다른 일이 있을 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거나 몸을 사리더니.
지금은 자기 일 아니랄까봐 누구보다 앞장 서 주도적으로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 일이 끝나면 말씀하셨던 대산의 계약 건들은 저희에게 넘겨주셔야 합니다.
# 이번 일에 들어간 공수의 보상 역시 이행되어야 하고요.
곧이어 하이에나들의 목소리가 정이사에게 향했다.
대의를 위해 뭉쳤지만,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었다.
뒤로는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협조하는 것일 뿐.
전세가 기운다면 얼마든지 등을 돌릴 자들이었다.
# 당연하죠. 약조 드렸던 것들은 틀림없이 이행될 겁니다. 저희가 이번만 보고 말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정이사의 말대로였다.
아직 힘을 모아 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서로에게 이빨을 드러내는 건 시기상조였다.
“이번엔 꼭 성공해야 합니다. 저번 히무라 님의 일로 얼마나 큰 시간적 손실이 생긴지는 아실 겁니다.”
# ….
# ….
연수정의 말에 정적이 찾아왔다.
시노카 암살대를 거느린 히무라의 죽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죽음이었다.
회의에 참가하는 모든 이들이 경계했을 만큼 위험한 인물이었던 히무라.
그의 죽음에 구성원들은 한동안 숨을 죽이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히무라를 죽인 게 자신들을 겨냥한 공격이었는지, 아니면 히무라 개인을 노린 공격이었는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일본과의 커넥션이 사라졌다.’
뼈 아픈 손실이었다.
커넥션마저 사라진 탓에 히무라를 공격한 게 누군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 걱정 마십시오.
회의실의 정적을 깨며 정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소피아 회장은 독 안에 든 쥐입니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도 모른 채. 클클…!
희미한 정이사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최후를 맞이할 겁니다.
* * *
아차.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걸까.
의기양양하게 밖으로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잠시 잊고 있었다.
비행기 없지.
다크메타 사태로 인해 하늘길이 막혀버린 이집트.
이집트와 한국 간의 거리는 그리스와 차원이 다르기에, 수영을 하고 칼데아를 사용하며 갈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칼데아를 사용하는 순간에야 비행기보다 훨씬 빠르겠지만.
무한하게 사용할 수 없는 만큼 길게 봤을 땐 엄청난 시간이 걸릴 터였다.
저벅.
옆으로 다가온 셀린이 고개를 저었다.
“안된다네요. 일주일 뒤까지는 단 한 대의 비행기도 뜰 수 없대요.”
가게에서 나오기 전 설명을 들으며 궁금증을 푼 셀린.
한국으로 빨리 가야 한다는 내 말에 셀린은 적극적으로 여기저기에 전화해 비행기를 알아봐 주었다.
결과적으론 잘 안 된 모양이지만 말이다.
“음.”
팔짱을 끼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라의 불꽃을 생각보다 빨리 찾아 몹시 급하거나 그러진 않았기에, 일주일 뒤에 뜰 비행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소피아의 메시지를 받으며 상황은 달라졌다.
빨리 가지 않으면 늦을 것 같은 이 느낌.
참새의 한계인지 영상은 몹시 짧았다.
인사와 함께 약속을 이행해달라는 내용이 끝.
그렇다 보니 정확히 어떤 상황이고 얼마나 급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참새가 내게 온 시간까지 합치면 이미 꽤 시간이 흘러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역시 철인 3종 경기뿐인가.
이집트에서 한국까지는 비행기로도 하루가 넘는 거리였다.
아무리 내 체력이 남아돈다 해도 엄청난 거리였고.
또 한국으로 가는 동안 평평한 지형만 있으란 법이 없었다.
칼데아를 꺼내지도 못하는데 그런 지형을 만났다간 그야말로 도착 시간이 확 늘어나게 될 터.
오히려 일주일을 기다려 비행기를 타는 것만 못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대산에 전화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비행기가 없단 사실에 처음으로 떠올린 방법이었다.
대산으로 전화해 전세기든 뭐든 좀 보내줄 수 없겠느냐 물어보는 것.
아주 잠시 떠올린 방법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의 머리를 후려칠 수밖에 없었다.
요즘 시대에 누가 이런 걸로 전령을 보내겠어.
소피아 님이 바보도 아니고 이유가 있으니까 조심하기 위해 그런 거겠지.
전화해서 나 백운인데 그쪽 회장이 도와달라고 했으니까 당장 비행기 보내!
생각만 해도 소피아 입장에선 아찔해지는 상황이었다.
“백운 님, 제가 이집트 정부 쪽에 도움을 요청해볼게요. 정부는 최대한 이번 사건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때 당시 피라미드 옆에는 많은 정부 소속 헌터들이 있었으니까요. 백운 님을 마냥 무시할 수 만은 없을 거예요.”
이것뿐인가.
어떻게 보면 소피아의 약속은 개인 사정이었기에.
셀린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셀린이 말한 방법 말고는 딱히 좋은 대안책이 없는 상황.
“셀린 님, 그럼 죄송하지만 그렇게…!?”
사아아.
그렇게 해달라고 말하던 중 느껴지는 무언가의 기척.
익숙까진 아니지만, 완전히 낯선 기척 또한 아니었다.
슥.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기척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르르….
“허…!”
페샨의 눈은 발동하지 않은 상태.
이번엔 다른 사람도 볼 수 있도록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서서히 또렷해지기 시작한 검은 망토와 거대한 낫을 든 남자.
그리스에서 만났던 사신, 로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인.
사신이란 능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전히 나이에 맞지 않는 우중충한 표정을 하고 있는 로인.
로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날 응시했다.
“길이 필요하시다면.”
잠시 말을 멈췄던 로인이 낫을 치켜들었다.
“열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