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기둥의 싸움
우당탕!
흐트러진 자세로 너무 급하게 수리검을 던진 탓일까.
비젼과 동시에 눈앞으로 모래 바닥이 다가왔다.
“꾸억!”
그대로 모래에 박힌 얼굴.
그래도 브레이크 역할은 했는지 목적한 곳에 제대로 멈춰 선 모양이었다.
“세… 세이프.”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 망자들에 세이프를 외치며 눈을 떴다.
아까 내가 떠났던 그 자리에 서서 경멸 섞인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는 로인.
낫으로 찍으려나.
바로 찍히지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로 로인의 얼굴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물론 다른 성질의 감정이 섞여 있는 건 아니었다.
분노와 살의, 경멸 등 당장에라도 눈앞의 인간을 죽이고 싶다는 일관된 성질의 감정들이었다.
한 가지 더 있다면.
놀라움.
같다면 같고 다르다면 다를 수 있지만.
로인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한 상태였다.
이 인간은 대체 뭘 처먹었길래 이런 짓이 가능한 걸까 하는 눈빛.
“미안해.”
이대로 버리고 가도 무죄였기에 빠르게 사과를 건넸다.
항상 무미건조했던 로인의 얼굴을 떠올려보면, 로인이 지금 얼마나 놀란 상태인지는 딱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건 버리고 가도 무죄지.
출발부터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 냅다 뛰쳐나가 버렸으니.
나 같았으면 이미 자리를 벗어난 순간 버리고 길을 떠났을 것이다.
“뭘 하고 온 겁니까?”
로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육두문자가 튀어나와도 얌전히 들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상보다 한 백배는 덜 매운 첫 마디였다.
“저 문 안에 친구가 있거든.”
“망자들이 이끄는 문에… 친구가 있다고요?”
아무래도 믿지 못하는 눈이었다.
방금 망자의 길을 들어온 놈이 다짜고짜 친구를 만나고 왔다니.
“그게.”
로인에게 도윤과 수리검에 대한 간략한 요약 설명을 해주었다.
문에 진짜 도윤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기에 뛰쳐나갔다는 약간의 자기변명도 섞어서 말이다.
“그런 이유로 난 다시 저기에 가야 하거든. 물론 방법을 찾은 다음이어야겠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망자는 다른 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망자를 죽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
“그런데 어째서 위험을 감수하며 그곳에 간 겁니까? 망자를 못 죽이면 저 사슬을 끊을 수 없고, 사슬을 끊을 수 없으면 당신의 친구는 어차피 구할 수 없습니다.”
툭툭.
옷에 묻은 모래를 털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렇지.”
인정하긴 싫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리볼버의 탄환도, 스이카의 검기도, 라의 불꽃도 망자를 죽이진 못했다.
지금 나에겐 망자를 죽일 수단이 없었다.
“나도 알고 있어.”
명확히 알고 있으며 인정했기에 목걸이에 길만을 각인시킨 뒤 후퇴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지금에 한정된 얘기일 뿐.”
“나중이 되면 망자를 죽일 수 있다는 겁니까? 당신 덕에 친구가 있는 문에는 훨씬 많은 망자가 들러붙게 되었습니다.”
로인의 말대로였다.
이제 도윤이 있는 문에는 수천을 넘어 수만은 되어 보이는 망자가 함께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상관없어.”
수만이든 수십만이든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망자를 죽일 수 있는 방법.
그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을 내가 손안에 넣는 순간.
“내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저놈들은 모조리 죽을 테니까.”
분명 있을 거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무기들.
분명 망자를 죽일 수 있는 무기가 존재할 것이다.
“불가능한 일을 말하면서도 과한 확신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내 단호한 대답이 마음에 안 들어서일까.
도대체 이 인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못 따라가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로인을 향해 조금 전보다 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그려주었다.
“해야 하는 일은, 어떻게든 되게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
앗.
잠시 말이 없는 로인을 바라보다 너무 염치가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낫으로 찍어 죽여도 모자른 놈이 이런 말이나 뱉고 있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로인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는 훨씬 차분해졌다는 것이었다.
“가… 갈까.”
약간의 어색함이 찾아오려는 찰나.
애써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다행히 순순히 따라 걷기 시작한 로인.
스윽.
앞에 펼쳐진 길을 바라봤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약간은 지체됐기에.
일단은.
걷는 속도를 계속해서 올려갔다.
소피아다.
* * *
대산의 80층.
띵.
저층부터 시작된 전용 엘리베이터가 80층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이런… 제 불찰이군요.”
소피아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단지, 이렇게 빠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거기다 이런 대담한 방법으로 본사를 치고 들어올 줄은 더더욱 말이다.
“내부 인원들과의 연락도 모두 끊겼습니다.”
아티라의 말에 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더 간과하게 있었다.
내부에 박혀 있는 가시의 크기와 깊이.
‘훨씬 더 큰 가시가, 훨씬 더 깊게 박혀 있었구나.’
단순히 내통자 수준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진행되는 사태를 봤을 때 내부의 가시는 오랜 시간을 이빨을 숨긴 채 숨을 죽이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이렇게 순식간에 뚫린다는 건 아마도.”
“이천호 단장.”
이쯤 되니 박혀 있는 가시가 누군지도 짐작이 갔다.
이천호가 아닌 이상 본사가 이렇게 쉽게 뚫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알아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요.’
소피아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소피아의 능력은 상대의 빛을 볼 수 있었다.
단순한 빛이 아닌 상대방의 본질적인 존재에 대한 빛.
전투를 한다거나 특정 일을 해결하는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능력이었지만.
서로 아무런 정보도 없이 만난 상대를 평가 내리는데 있어서는 무척이나 유리한 능력이었다.
‘이천호 단장의 빛이 변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이천호를 만났을 때.
소피아는 능력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과거 뜨거운 열정만이 가득했던 그의 빛이 점차 퇴색되다 탁한 검은색이 됐단 사실을 말이다.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그런 색이었다면 시도조차 안했을 터였다.
하지만.
소피아는 이천호의 열정 가득했던 빛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기에.
자신이 노력하면 이천호의 빛을 다시 옛날의 그 색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제 아집이 회사를 위험하게 만들었군요.’
- 회장님은 사람이 너무 좋은 게 흠입니다.
언젠가 장판석이 반농담으로 건넨 말이었다.
장난스러운 농담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정이 많아 함께 해온 이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소피아.
장판석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말한 걸 수도 있었다.
언젠가 그런 소피아의 흠이 위험을 불러올 것이란 걸 말이다.
질끈.
소피아가 눈을 질끈 감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안일함 때문에 회사는 물론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아티라마저 위험에 빠뜨리게 되었다.
“소피아 님.”
아티라의 부름에 소피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혹시나 스스로를 책망하고 계신다면,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긴박한 상황임에도 차분히 말을 건네는 아티라.
아티라가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소피아를 바라봤다.
“저를 포함해 소피아 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있는 그대로의 소피아 님을 좋아하고 존경해서 모여있는 거니까요.”
“아티라..”
“모두가 퇴근한 시간이라 큰 인명피해는 없을 겁니다. 70층에 있는 최리아 님 역시 마틸다가 데리러 갔을 테고요.”
띵.
거의 다 올라온 엘리베이터를 보며 아티라가 쓰고 있는 안경을 치켜올렸다.
“소피아 님이 살아 계시다면 대산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철컥.
아티라가 옆에 뒀던 기다란 케이스를 열어젖혔다.
안에 들어있는 건 가늘고 긴 세검.
검투사의 능력을 개방한 아티라를 위한 무기였다.
저벅.
세검을 집어 든 아티라가 올라오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오랫동안 소피아의 곁을 지켜왔기에.
실전 경험 자체는 오래된 상태였다.
하지만.
초창기엔 지옥과도 같던 싸움을 헤쳐온 아티라였기에.
죽고 죽이는 전투에 대한 감각은 잠들어 있을 뿐 사라진 게 아니었다.
“적은 제가 막겠습니다.”
끼이익.
아티라가 소피아가 있는 문을 닫기 시작하고.
“아티라 잠깐…!”
닫혀 가는 문틈으로 밝게 그려져 있는 아티라의 미소가 보였다.
“절대 나오시면 안 됩니다.”
쿵…!
완전히 닫혀 방어술식까지 발동한 회장실의 문을 확인한 후.
띵!
아티라가 80층에 도달한 엘리베이터를 응시했다.
조금 전 따듯한 미소를 지었던 아티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은 그저 소피아를 위협하는 모든 위험을 제거하겠다는 일념을 가진 한 명의 검투사가 있을 뿐이었다.
스르륵.
“토베 5식.”
낮게 중얼거린 아티라.
아티라의 세검 끝으로 에너지가 응축되기 시작했다.
끼이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회장실로 바로…!?”
“살.”
쐐에에엑---!
순속에 가까운 아티라의 세검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날아들었다.
* * *
카리조가 내뿜은 공격을 마지막으로.
질끈.
최리아는 죽었다고 생각했다.
다름 아닌 대산의 기둥인 카리조였기에.
운이 좋아서 목숨을 건지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그렇게 곧 닿아 자신의 목숨을 끊어 놓을 공격을 떠올리며 최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후두둑.
‘…?’
하지만.
무언가에 막힌 세리조의 공격은 최라아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잠이 오나? 최리아 실장.”
“…!!”
장난기 섞인 걸걸한 목소리에 최라아가 눈을 떴다.
190이 넘는 키와 사방으로 뻗어져 있는 무지막지한 근육.
올백으로 깔끔하게 넘겨진 샛노랑 머리까지.
여전히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며 카리조의 공격을 막은 남자.
대산의 기둥 헌터 중 한 명인 장판석이 최리아의 눈앞에 서 있었다.
“빌어먹을 노인네가 노망이 들었나. 이제 피아식별도 못 하는 건가?”
“클클… 많이 컸구나 장판석이.”
“난 원래 컸어 노친네야. 당신은 원래 작았고.”
스르르.
거침없는 입담 덕이었을까.
공격을 거둔 카리조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이미 많이 죽이면서 온 모양이군.”
“맞아. 오는 길에 감히 대산에 침입한 벌레들이 있길래 밟아 죽이면서 왔지.”
카리조의 말대로 장판석의 주먹에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슥.
고개를 돌린 장판석이 최리아와 일행을 응시했다.
“가던 길 가라. 여긴 내가 맡을 테니.”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고개를 끄덕인 최리아가 일행을 데리고 옆으로 돌기 시작했다.
떠나가는 최리아를 응시하는 카리조.
그런 카리조를 향해 장판석이 입을 열었다.
“노친네가 아무리 노망이 들었어도. 날 앞에 두고 딴짓을 하진 않겠지?”
“클클.”
카리조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안 죽어도 어차피 죽을 것들. 굳이 내가 여기서 죽일 필요는 없겠지.”
꿀렁.
카리조의 몸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거대한 팔과 다리 형상을 만들어낸 액체가 딱딱하게 굳어갔다.
“자 그럼, 대산을 지키는 늑대 실력 좀 볼까?”
“실력 좀 보자니 말투가 좀 건방지구만.”
우두두둑…!
안 그래도 거대한 덩치가 더 키워지고 있는 장판석.
몸으로 자라나는 백색 털과 함께 장판석의 입안으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돋아났다.
투둑.
자라난 손톱과 발톱을 끝으로.
장판석이 완벽한 늑대의 모습으로 변했다.
전투 준비를 마친 카리조와 장판석.
“웨어울프, 장판석.”
“교관, 카리조.”
잠시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이.
팟!
콰아아앙!
격돌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