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참새의 호출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
대답을 들은 남자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마 내가 만든 정적인 것 같았다.
어이없을 수 있지.
갑자기 대기업 천장을 뚫고 내려온 놈이 한다는 소리가 참새한테 호출이라니.
내가 저 남자였다면 이미 뺨을 때리고도 남았을 듯했다.
그나저나.
슥.
고개를 들어 시원하게 뚫린 천장을 바라봤다.
괜찮겠지…?
망자의 길을 통해 서울에 도착한 뒤.
원래는 1층부터 올라오려는 참이었다.
건물 사방에 둘러진 장막과 회사 안에서 전투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꽤 고층에서부터 이미 소리가 들려왔기에 아래에서부터 가면 늦을 듯한 느낌.
- 콰아아앙!
그래서 선택한 게 소피아가 있는 80층으로 도달하는 최단 루트, 천장.
기발한 아이디어였어.
저지르고 생각해도 훌륭한 역발상이었다.
정석대로 가라는 법은 없지.
덕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도 있었고 말이다.
끼긱…!
“이… 이게 왜 안 빠져…!”
여전히 빠지지 않는 무기로 끙끙대는 다수의 헌터.
방금 도착한 지라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었다.
단지 구도로 비추어보건대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놈과 무기를 들고 있는 헌터들이 소피아의 적으로 보였다.
거기다 나한테 질문한 저 아저씨.
왠지 낯이 익길래 어디서 봤나 했더니.
회귀 전에 대산의 회장이라고 TV에 나왔던 아저씨였다.
물론 저 상태로 좀 더 늙어야 TV에서 본 얼굴이 되겠지만.
반역으로 쟁취한 자리였구나.
아니지, 성공했었으니까 혁명이라고 불러야 하나.
“….”
고개를 내리니 날 올려다보고 있는 소피아의 얼굴이 보였다.
참 묘한 사람이었다.
자기가 부르긴 했어도 보통 이런 등장이면 놀란 척이라도 할 법한데.
소피아는 놀라기보단 무언가 평온한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 분 외에는 다 적인 거 같고.”
허락을 구하기 위해 소피아를 응시했다.
오자마자 무기 든 놈들을 죽이지 않은 이유였다.
다 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분위기로 보건대 대산의 헌터들도 섞여 있는 모양이기에.
회장의 허락 정도는 받아둔 다음에 움직일 생각이었다.
스윽.
내가 뭘 기다리는지 알아서일까.
소피아가 고개를 돌려 간신히 몸을 지탱 중인 아티라를 쳐다봤다.
80층 여기저기에 흩뿌려진 피의 양을 보니 이미 한바탕 한 모양이었다.
역시 쎈 누님이었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남달랐던 포스.
올라와 있는 헌터들도 꽤 강한 거 같은데 이때까지 홀로 버텨낸 것이었다.
“백운 님.”
잠시 아티라를 보던 소피아가 내게로 눈을 돌렸다.
차분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피아.
조금 전 짓고 있던 안도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전 회장을 하기에는 유약한 성격일지도 모릅니다. 이천호의 말대로 정도 많아서 사람을 우선시하는 판단을 내릴 때가 많으니까요.”
회귀 전 혁명가에서 곧 반역자가 될 아저씨.
이름이 이천호였구만.
“하지만,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켜온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슥.
고개를 든 소피아가 차가운 눈으로 이천호와 쳐들어온 헌터들을 응시했다.
“대산에게, 제 사람에게 칼을 들이댄 적은 용서하지 않는다.”
소피아의 음성이 조용히 울려 퍼지고.
씨익.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과거엔 대산의 사람이었을지라도. 한 번 동료를 향해 칼을 댄 자는… 적입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끈적.
무대도 깔려있겠다.
슥.
오랜만이구만.
[잭 더 리퍼 - 동기화]
* * *
이건 참 적응이 쉽지 않단 말이야.
80층에 흩뿌려져 있던 피가 모여들어 내 몸을 감싼 게 조금 전.
시야까지 핏빛으로 만드는 동기화가 완료된 후 가장 먼저 한 건.
푸화아아아---!
소피아와 아티라를 둘러싸고 있던 놈들의 동맥을 끊어 놓은 것이었다.
전이랑 비교도 할 수 없게 빨라졌다.
돌산에서 2년을 보낸 뒤 처음으로 발동한 잭 더 리퍼의 동기화였다.
동기화 없이 면도칼을 꺼낸 적은 있기에 수련으로 향상된 점은 어느 정도 체감했었다.
동기화를 하면 얼마나 더 빨라질지도 대략 예상은 해뒀었는데.
막상 동기화를 사용하니 차이는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끄… 끄륵!”
풀썩.
털썩.
2초? 3초?
얼마나 걸렸을까.
지금 쓰러지는 녀석들의 목을 베는데 말이다.
무기 없는 놈들이라 좀 그랬나.
칼데아의 연기로 인해 무기가 잡힌 헌터들.
물론 그 중엔 무기가 필요 없는 능력을 사용하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잭 더 리퍼와 동기화까지 한 내 속도에 반응하는 건 불가능했다.
거기다 날개까지 있으니.
[잭 더 리퍼 - 동기화]
[이카루스 - 칼데아 윙]
안 그래도 불가능한 수준의 유연성과 움직임을 선물해주는 면도칼의 동기화인데.
더더욱 불가능한 방향으로의 이동을 칼데아가 가능하게 해주고 있었다.
좋은 조합이네.
“뭐… 뭘 쳐다만 보고 있어! 당장 죽여!!”
순식간에 쓰러진 헌터들에 잠시 당황했던 이천호.
이천호의 비명에 가까운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외쳐진 목소리가 채 공기로 흩어지기도 전.
파앙!
칼데아의 연기를 터뜨려 이천호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
너무 놀란 건지 콧물까지 튀어나오는 이천호.
“꽥꽥거리지 마. 엄청 듣기 고통스러운 목소리니까.”
시궁창 지하에 묻어 있는 오물 같은 목소리였다.
눅눅하고 끈적하고 냄새까지 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
“기다려, 넌 마지막이다.”
“뒤져!!”
“죽어라!!”
사방에서 대기 중이던 헌터들이 달려들었다.
같은 편이 섞여 있어서인지 원거리 능력을 가진 놈들은 눈만 끔뻑이고 있는 상황.
딱이네.
칼데아와 면도칼을 조합해서 사용하기에 이보다 좋은 환경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는 적군 사이사이를 누비며 핏줄을 딸 수 있으니 말이다.
쐐에에에--!
날아드는 무기들을 날개의 연기나 면도칼로 막을 생각은 없었다.
스으…!
종이 한 장 수준으로 피할 수 있게끔 몸을 움직여 준 뒤.
서걱! 서걱! 서걱!
공격이 빗나갔다는 걸 인지조차 못 한 놈들의 혈관을 베어 나갔다.
푸확!
“끄아아아!!”
갑작스레 핏줄이 베여서일까.
조금 전까지 몸 곳곳을 순회하던 놈들의 피가 하늘로 솟구쳤다.
하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미소를 넘어 얼굴 가득히 번지는 웃음꽃.
왜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으로 피어나가는 피의 꽃.
꽃이 더욱더 만개하는 걸 보고 싶었다.
저벅.
적들의 사이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적의 앞에 머무르는 시간은 길어봐야 1초 미만이었다.
그 말인즉슨.
놈들은 내가 바로 앞까지 온 걸 인지함과 동시에 동맥이 베이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철퍽!
얼굴 한가득 흩뿌려진 적의 피.
평소였다면 으… 하며 역겹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즐거워지는 감각.
“으아아!!”
주먹에 푸른 기를 두르고 달려드는 헌터를 바라봤다.
잔뜩 겁에 질려있지만 애써 이겨내며 달려들고 있었다.
덥썩.
헌터의 팔을 붙잡아 팔꿈치 부분에 면도칼을 꽂아주고.
“아악!
그 아래를 지나 녀석의 뒤로 돌아갔다.
콰악!
나에게 붙잡혀진 턱이 뒤로 젖혀져서일까.
조금 전까진 어떻게든 공포를 억누르며 달려들었던 녀석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진동하고 있었다.
“끄… 끄아… 살… 살려줘.”
대산이라는 대기업을 먹으려고 데려왔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내게 잡혀 있는 헌터는 꽤 강한 편에 속할 터였다.
그런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목숨 구걸.
아마 본능적으로 나온 말이었으리라.
이미 수십의 피로 물들여진 면도칼이 젖혀진 목 바로 앞까지 와있으니 말이다.
슥.
고개를 들어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적들을 바라봤다.
사전에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모두 한결같은 얼굴이었다.
저건 대체 뭘까?
사람은 맞는 걸까?
그리고 애써 티를 안 내려 하지만 얼굴 뒤에 숨겨진 속마음.
이길 수 없다.
저들의 이성은 강하게 부정하고 있지만.
본능은 알고 있는 듯했다.
이건 싸움이라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싸움이 아닌, 단순한 누군가의 학살이라는 것을.
“목숨을 구걸하기엔.”
꾸국.
“끄아아아아!!”
“너무 늦었다.”
푸화아악!!
* * *
뚝… 뚝.
“끄… 끄.”
“꾸룩… 살… 려.”
면도칼을 꺼내 들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사방엔 무언가 흘러내리는 소리와 살려달라는 신음만이 가득했다.
현재 80층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건 나를 제외하고 단 세 사람이었다.
소피아와 아티라, 그리고.
“자… 잠깐…!”
초반의 기세등등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대신 얼굴 한가득 죽음의 공포가 깃든 이천호까지.
동기화부터 풀자.
예전에도 느꼈지만 면도칼 동기화는 무언가 달랐다.
점점 물들어오는 피의 광기.
이번에는 특히 더 심했다.
적의 대부분을 베어 넘겼을 때였다.
광기 너머로 무언가 경계가 느껴졌다.
조금만 더 하면 넘을 수 있을 거 같았던 느낌.
“잠깐만…!”
그 감각에 대해선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눈앞에서 순식간에 겁쟁이로 돌변한 이천호를 바라봤다.
“네가 잠깐만이라고 해서 살려준 건 아니야.”
뒤로 고개를 돌려 소피아를 쳐다봤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앞으로 걸어오는 소피아.
다가온 소피아가 이천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말해주시겠어요? 어디까지 연관되어 있는지. 다른 기업들이 함께 했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심증만 있을 텐데!? 내게 모든 게 있다! 알고 싶다면 날 살려라!”
이거 완전 개쓰레기네.
머리 박고 살려달라 해도 모자랄 판에 딜을 걸어?
“정보가 우선입니다.”
“….”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더니 미간을 찌푸리는 이천호.
여기서 한 번 더 튕겼다가는 바로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소피아 회장, 당신이 알고 있는 건 빙산의 일부분이다.”
본론만 말해 이 새끼야.
듣고 있자니 답답해 나도 모르게 한마디 할 뻔했다.
무슨 영화 서사도 아니고 저런 비장한 얼굴로 바탕을 깔고 앉았다니.
내가 소피아였으면 이미 뺨따귀를 철썩 후렸을 터였다.
“연관되어 있는 기업의 이름과 기관들의 이름을 대세요. 그거면 됩니다.”
“후우…!”
말하기가 망설여지는지 심호흡을 한차례 하는 이천호.
만약 나라는 죽음이 앞에 없었다면 절대 말하지 않았을 듯했다.
“기업은 모두 열….”
삑.
응…? 삑…?
어디선가 들려오는 불길한 신호음.
신호음을 들은 건 이천호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커지는 눈동자.
우우웅…!
신호음과 함께 이천호의 가슴팍에서 무언가 빛나고 있었다.
눈이 부시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서서히 에너지를 응축시키고 있는 듯한 모습.
이런.
“여… 연수정 이 썅년이…!!”
욕지거리를 뱉어낸 이천호가 다급한 눈으로 날 응시했다.
“날 살려!! 정보를 얻고 싶다면 빨리!!”
웬만하면 소피아를 위해서라도 그러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빛은 이천호의 몸 안쪽에서 나고 있었다.
반응을 봤을 땐 시간 또한 많지 않은 듯했다.
짧은 시간동안 내가 이천호의 배를 갈라서 무언가를 꺼낸다…?
“내가 신이냐 이 새끼야.”
“안돼!! 날 살려!!!”
소피아와 날 향해 손을 뻗어오는 이천호.
참으로 목소리만큼이나 구질구질한 녀석이다.
뻐엉!
이천호를 엘리베이터 근처까지 걷어찬 후.
텁.
소피아와 아티라를 안은 채로 마지막 남은 칼데아의 연기를 터뜨렸다.
“무… 문을!”
회장실로 들어오는 순간 들려온 아티라의 외침.
문을 닫자 홀로그램 같은 술식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안돼에에에에!!”
그리고 잠시 후.
밖에서 들려온 이천호의 비명을 마지막으로.
퍼어어어엉---!
거대한 폭발음이 80층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