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비켜
이런 샹.
“키이이이익!”
“크릉… 크릉.”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데몬들이 눈에 들어왔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울음소리를 흘리며 다가오고 있는 데몬들.
조졌다.
아찔할 정도의 낭패감이 들었다.
나를 향해 데몬들이 다가오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조금 전.
- 다 날려버리세요.
로튼의 짤막한 한 마디와 함께 토롱이라고 불린 데몬이 손을 들어 올렸다.
무슨 상황인지 판단을 하기도 전에 나와 기태랑, 비광을 동시에 집어삼킨 보라색의 구체.
대처할 수 있는 시간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미리 무언가를 준비해놓은 건지 구체는 주변 일대를 한꺼번에 집어 삼켜버렸다.
우웅!!
기분 나쁜 보랏빛이 몸을 둘러싸는 느낌이 들었고.
순식간에 시야가 변하는가 싶더니 이곳에 홀로 떨어져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로 보아 구체에 함께 빨려 들어간 기태랑과 비광은 다른 장소로 날려진 것 같았다.
생각도 못 했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강제 공간이동을 시켜버리다니.
미리 알고 있었더라도 대처가 불가능한 능력이었다.
꽈악.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로튼이 노리는 건 태랑 님이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로튼은 나와 기태랑을 떨어뜨려 놓았다지만.
적어도 로튼과 칸은 기태랑과 함께 있을 가능성이 컸다.
빨리 가야 돼.
그나마 다행이라면 지금 있는 곳이 아까 있던 장소로부터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이었다.
[비젼 수리검]
마음 같아선 다 쓸어버리며 가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은 존재하기 않았기에.
수리검을 하늘 위로 높게 던졌다.
빠르게 비젼을 해 기태랑이 있는 곳으로 향해야 했다.
카앙!!
…!
하늘로 솟아오른 수리검으로 비젼을 하려는 찰나.
거대한 식물이 나타나 수리검을 아래로 내리쳐버렸다.
뭐야 또 저건.
“도망가려는 건가?”
저벅.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여자.
온몸을 꽃과 식물로 뒤덮고 있는 걸로 보아 로튼과 한패인 데몬인 것 같았다.
몇 마리나 있는 거냐.
해안가에서 봤던 발자국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모습을 나타낸 놈들만 봐도 모두 노네임드급 데몬.
한 마리만 등장해도 난리가 나는 급인 걸 감안했을 때 이렇게 한꺼번에 등장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못… 못 간다…!”
저 새끼.
조금 전 나를 날려 보낸 토롱이란 놈도 함께였다.
“바쁘니까 좀 꺼져라, 식물년아.”
“식물년이 아니고 유리아다. 오만한 벌레야.”
드드드드득!
하늘을 뒤덮는 식물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쉽게 자를 수도 없을 듯한 굵기였다.
“방금 날려 보낸 수리검이 이동기인가 본데. 못 쓸 거다.”
유리아가 식물로 하늘을 뒤덮은 이유였다.
조금 전 내 행동 한 번만으로 수리검이 이동기일 거라 파악한 유리아.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판단력만큼은 보통이 아니었다.
쯧.
[앤 보니&메리 리드]
수리검을 사용해 빠져나갈 수 없다면.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뚫는다.
[동기화]
* * *
“으… 뭐냐 이건 또.”
백운이 떨어진 장소의 반대편.
정신을 차린 비광이 고개를 돌렸다.
유창한 언어 구사와 순식간에 장소까지 옮겨버리는 능력까지.
노네임드라는 걸 감안해도 보통 놈이 아니었다.
- 태랑 님 옆에 붙어 있어야 해요!
비광이 자신에게 부탁했던 백운의 말을 떠올렸다.
이유는 아직까지 알 수 없지만 기태랑 옆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고 강조했던 백운.
‘이런.’
백운이 그렇게 걱정했던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고 말았다.
기태랑 역시 구체에 함께 삼켜지긴 했지만 실제로 날려진 건 비광과 백운 뿐일 수도 있었다.
‘놈들이 노리고 있는 건 기태랑인가.’
“키아아…!”
다가오고 있는 많은 수의 데몬을 바라보며 비광이 미간을 찌푸렸다.
기태랑이 노려질 걸 백운이 어떻게 알았는지.
눈앞에 나타난 노네임드급 데몬들은 대체 누구인지.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지만.
지금 해야 하는 행동은 명확했다.
‘기태랑한테 가야 한다.’
기태랑의 강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비광이었다.
기태랑이 외딴 섬에 수백 마리의 데몬과 방치되어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길했다.
백운이라고 기태랑의 강함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돌산에서 가장 가까이 지냈기에 누구보다 잘 알 터.
그럼에도 백운은 기태랑의 안위를 걱정했었다.
‘이유가 있을 거야.’
기태랑이 위험에 처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며.
비광이 품에 있는 화투패를 꺼내 들었다.
‘빠르게 뚫고 간다.’
그렇게 데몬을 쓸어버리려는 순간.
퍼걱!! 퍼석!!
“키에에!”
쿵!!
다가오고 있던 데몬들이 무언가에 의해 짓이겨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휘두름에도 울부짖는 데몬들의 상체를 터뜨려버리는 엄청난 괴력.
이유는 모르겠지만 노네임드로 보이는 거구의 데몬이 다른 녀석들을 죽이고 있었다.
뚝… 뚝.
또다시 피로 물들어버린 마렉의 두 주먹.
비광이 등장하기 전까지 죽였던 헌터들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이었다.
두두두두!
이대로 있으면 죽임당한다는 걸 알아서일까.
비광을 둘러싸고 있던 데몬들이 모두 도망쳐버렸다.
스윽.
마렉이 고개를 돌려 비광을 응시했다.
“네놈이냐? 로튼이 보낸 건.”
“로튼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너 뭐냐?”
쿵.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위압적이었다.
발을 짚는 순간 바닥이 울리는 걸음걸이.
‘괴물이다.’
그런 마렉을 보며 비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부딪혀보진 않았지만 알 수 있을 만큼.
마렉에게서 풍겨지는 위압감은 보통 이상의 것이었다.
쿵.
몇 발자국 비광에게 다가온 마렉이 입을 열었다.
“난 마렉이다.”
“비광이다.”
서로에게 이름을 밝힌 뒤 침묵하는 마렉과 비광.
“넌 몇 번째냐?”
“…?”
거만한 얼굴로 몇 번째냐 물어오는 마렉.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에 비광이 눈썹을 올리자.
“벌레들 중에서 넌 몇 번째로 강한지 물었다.”
마렉이 질문의 의도를 밝혔다.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당황했던 비광이 옅게 웃음을 지었다.
“그게 왜 궁금하지?”
“알고 싶어서다.”
드드드…!
마렉이 비광을 달려들기 위해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짓이겨 죽일 벌레놈이 몇 번째인지 말이다!”
쿠웅!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달려드는 마렉을 응시하며.
비광이 대답을 위해 입을 열었다.
“아마.”
우웅…!
비광의 눈앞으로 펼쳐지는 몇 장의 화투패.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 거다.”
비광의 대답을 끝으로.
콰앙!!
마렉과 비광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잭 더 리퍼]
다가오는 데몬들을 베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리볼버로 한차례 쓸어버렸음에도 쉬지 않고 달려드는 녀석들.
어디서 이렇게 끝도 없이 나오는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휘릭… 쿠웅!
더럽게 귀찮네.
끊임없이 나오는 건 데몬 뿐만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식물을 뽑아내 휘둘러대는 유리아.
개방을 한 헌터 중에도 식물을 사용하는 이가 있었다.
동영상을 통해 그들이 싸우는 장면도 많이 봤었지만.
이건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한도라는 게 없는 건가.
어느 정도 식물을 뽑아낸 이후엔 리소스가 다해 휴식을 필요로 했던 헌터와 달리.
유리아의 식물엔 끝이 없었다.
쿠에에에!
치이익!!
숫자만 많은 것도 아니었다.
가지각색의 식물들.
식물이라 부를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각각 다른 모습을 지닌 식물들은 생김새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공격을 구사하고 있었다.
어떤 식물은 줄기를 뻗어 쏘아지는가 하면 거대한 입을 가진 식물은 산성을 가진 침을 뱉어냈다.
키이잉!
그리고 저 난쟁이 자식.
가장 성가신 놈이었다.
다가가려 하면 순식간에 보라색 구체를 뿜어내 내 이동 경로로 식물을 옮겨 놓았다.
그 틈을 이용해 계속해서 위치를 바꾸고 있는 유리아.
토롱은 식물을 다루며 원거리 공격을 주로 하는 유리아를 이동 구체로 서포트하고 있었다.
날 옮기면 편할 텐데도 식물로 이동만 방해하는 걸 봐선.
토롱의 능력 사용엔 제약이 있는 것 같았다.
다가올 때마다 날 날려버리면 되는 걸 힘들게 식물로 길을 틀어막고 유리아를 이동시키고 있는 게 판단의 근거였다.
가령 한 번 이동시켰던 대상은 일정 시간 동안 옮기지 못한다던가.
굳이 날 옮기지 않는 이유로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었다.
“코오오오오!”
서걱!
식물을 타고 달려드는 데몬을 베어내며.
겹겹이 쌓인 식물 사이로 보이는 유리아와 토롱을 응시했다.
아직까진 토롱이 유리아를 이동시킨 적은 없는 상태.
가설이 맞다면 유리아를 옮길 수 있는 횟수는 일정 시간 동안 단 한 번뿐이었다.
푸화악!
옆에서 흩뿌려지는 피를 바라봤다.
식물을 피해내며 계속해서 베어낸 데몬.
데몬들에게서 뿜어진 피가 사방에서 흐르고 있었다.
됐다.
필요로 하는 충분한 피가 뿌려졌음을 파악하고.
[잭 더 리퍼 - 동기화]
피로 온몸을 빼곡하게 메꾸었다.
그리고.
파앗!!
훨씬 빨라진 속도로 유리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휙! 휙! 쿠우우웅!
내 접근에 맞춰 토롱이 식물로 길을 막았지만 헛수고였다.
동기화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반응속도와 스피드가 생겼기에.
식물이 앞을 가로막음과 동시에 베어내며 다음 루트를 찾을 수 있었다.
“이리 와!!”
“큭…!”
빼곡히 앞을 막는 식물을 가로지르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자.
토롱이 자신의 몸과 유리아의 몸을 보라색 구체로 감쌌다.
한 번 이동시켰고.
사방을 덮고 있는 식물들에 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느껴졌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토롱과 유리아의 기운이 말이다.
아끼려고 했는데.
기태랑에게 도달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무기를 아끼려고 했었다.
누가 뭐라 하든 가장 주의해야 하는 건 로튼의 능력이었다.
그 능력 속에서 날뛸 칸의 검술 또한 마찬가지.
가능하다면 쿨타임이 길게 걸리는 무기는 사용하지 않고 싶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주변을 빼곡하게 감싸고 있는 식물을 둘러봤다.
웬만해선 면도칼로 뚫고 나가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조금 전 마지막 이동을 시켜서인지 계속해서 식물 뒤로 숨어다니고 있는 토롱과 유리아.
한 번에 다 날려버리지 않으면 계속해서 시간이 지체될 터였다.
꼴깍.
타죽진 않겠지.
원래라면 유탈라스로 몸을 감싼 후 불꽃을 사용했겠지만.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검을 휘두르는 칸을 상대할 때 유탈라스는 필수였다.
태랑 님을 지키며 싸워야 할 수도 있어.
비늘을 퍼뜨려 다양한 상황을 대비할 수 있었기에.
지금 저 두 놈에게 라의 불꽃과 유탈라스 두 개를 다 써버릴 순 없었다.
쐐에에에에---!
사방으로 식물 줄기가 날아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피할 필요도 없는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후우.”
한차례 심호흡을 한 후.
[라 - 불꽃의 문양]
불꽃을 꺼내 들었다.
치이익…!
끄윽…!!
상체에 그려진 문양과 동시에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라의 불꽃.
처음 느껴보는 끔찍한 고통이었지만, 못 참을 수준은 아니었다.
스윽.
토롱과 유리아가 숨어 있을 장소를 바라보며.
“불꽃이여.”
화륵…!
“공간을 불태워라.”
응축되어 있던 불꽃을 터뜨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